누구나 처음은 있다.
서울생활은 상상만큼 낭만적이지 않았습니다. 당연히 책만 들고 올라온 저는 서울에 직장이 있는 사촌형 하숙집에 얹혀 살았습니다. 1인용 방인데 제가 들어간 것이죠. 그곳은 노량진에서 거리가 제법 멀었습니다. 지하철 타고 40분 정도 걸린 것으로 기억합니다. 날이 갈수록 학원에 오고가는 시간이 아까웠습니다. 해서 노량진 근처 고시원을 알아봤습니다. 매달 50만원 정도 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큰 돈이었습니다. 금액에 비해 방은 작았습니다. 책상하나, 침대하나인 작은 방이었습니다. 공동부엌, 공동화장실이었습니다. 방음도 안 되었습니다. 방에 있는 것은 힘들었습니다. 집중하기도 어려웠습니다. 하지만 그 곳에서 공부를 해야만 했습니다. 책상 정면, 딱 제 눈 높이에 어머님 증명사진을 붙여두었습니다. 공부한다는 아들 방값을 매달 보내주시는 어머님 수고를 잊지 않고 싶었습니다.
서울에서 공부하는 것 자체가 힘들 진 않았습니다. 어차피 마음 먹은 것이고 해야하는 것이었으니까요. 저는 '해야한다면 열심히 하자.'는 원칙이 있습니다. 한번 할 때, 깔끔하게 하려고 노력합니다. 결국 그것이 시간 아끼고 저에게도 도움이 되었습니다. 공부를 열심히 했습니다. 거짓말 조금 보태면 새벽 5시에 일어나 씻고 도서관 자리 맡아둡니다. 아침을 먹고 자리에 앉아 공부합니다. 12시에 자리에서 일어나 점심 먹습니다. 점심 먹고 공부하다가 저녁 6시에 저녁 먹습니다. 그리고 밤 10시가 되면 고시원에 들어갔습니다. 즉 밥 먹고 집에 갈때만 의자에서 일어났습니다. 의자에 오래 앉아 있으니 엉덩이가 아프다는 것을 직접 경험한 순간이었습니다.
수업도 같이 들었습니다. 전공과 교육학이었습니다. 나중엔 돈이 부족해 전공 수업은 자진해서 관리도우미를 했습니다. 칠판 닦고 허드렛일을 했습니다. 대신 수업료는 면제 받았습니다. 교수님과 학생들 소통 다리 역할도 했습니다. 수업은 재미있었습니다. 스터디 그룹도 만들었습니다. 3명으로 시작한 공부모임은 후에 4명이 되었습니다. 매주 만나 같이 공부하고 이야기 나누었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갔고 11월달이 되었습니다. 사정이 생겨 마산으로, 집으로 내려왔습니다. 전공수업은 인터넷으로 듣고 독서실에서 혼자 공부했습니다.
임용고시 시험 일정이 발표났고 여러 지역에 원서를 내는 수험생도 있었으나 저는 오직 경남, 경남에만 제출했습니다. '1명을 뽑는다면 내가 되면 된다.', '상대가 못하기를 바라지 말고, 내가 안 틀리면 된다.' '경쟁자와의 싸움이 아니라 나와의 싸움이다. 내가 정답만 쓰면 된다.'는 생각으로 공부했습니다. 시간은 흘러 1차 시험을 쳤고 합격했습니다. 2차 시험을 쳤고 최종 합격했습니다. 전화기를 통해 저의 최종합격 소식을 전했을 때 전화기 너머에서 '오빠야! 진짜 축하한다. 용만아 수고했다.'며 울던, 우시던 어머니와 동생 목소리가 지금도 기억납니다. 지금도 확신합니다. 제가 잘해서 만이 아니라 제가 공부하는 것을 지원해주었던 여동생과 어머니 덕분이었습니다.
딱! 제 앞 등수까지 1학기 발령이 났습니다. 저는 2학기에 발령 났습니다. 그것도 마산 중심 중학교 였습니다. 2학기 발령이라 그런지 상담업무였는데 별 일이 없었습니다. 담임도 아니었습니다. '학교는 편안한 곳이구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첫 월급을 받고 깜짝 놀랬습니다. 제가 그 전에 일하면서 받았던 월급보다 너무 적었습니다. '이게 다라고?' 제 기억에 저의 첫 월급은 세후 실수령액 170만원 정도였습니다. 학원에서 받았던 월급보다 훨 적었습니다. 학원보다 학교일이 훨씬 많았습니다. 학원에선 아이들 오기 전 의무적으로 하루에 2명이상 학부모 상담전화하고 수업준비, 수업하고 학생 상담이 끝이었습니다. 그런데 학교에선 업무가 너무 많았습니다. 제가 요령이 없어서 그런지, 교재연구를 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중학교라서 더 그랬는지 모릅니다. 7교시 중 5시간은 수업이 있고 비는 시간엔 공문서 처리, 공문 기안, 학생 상담, 민원 처리 등을 했습니다. 아이들 하교하고 나면 남은 일을 해야 했습니다.
'왜 내가 이 일을 하는 거지? 난 학생들과 생활하며 좋은 수업을 하고 싶은데 왜 종이 하나에 이렇게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쏟아야 하는거지?' 지금은 달라졌는지 모르겠으나 저는 사범대 다닐 때에도, 임용고시 공부할 때에도 전혀 배우지 못했던 행정일에 훨씬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쓰는 학교에 내던져진 느낌이었습니다. 게다가 월급도 적었습니다. 전 이때부터 학교에 대한, 교육에 대한 신뢰가 깨지기 시작했습니다. 교육자? 스승? 좋은 수업? 학생과 소통? 신뢰? 당시 학교현장에선 불가능한 일로 느껴졌습니다. 하지만 저는 견뎌야 했습니다. 저의 방법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다음 해, 3학년 담임을 했습니다. 저의 의지는 아니었습니다. 해야만 했습니다. 당시 학교는 체벌이 가능했던 시대였습니다. 지금생각하면 부끄럽지만 저는 체벌교사였습니다. 가출한 학생을 엎드리게 해서 허벅지를 때렸습니다. 무슨 생각이었는지 손으로는 때리지 않았지만 학생들 체벌을 어려워 하지 않았습니다. 수업은 최대한 재미있게 하려고 노력했습니다. 단원이 끝날 때마다 '스피드 퀴즈'를 했습니다. 총 5문제씩 출제하는데 교과서에서 배운 내용은 3개 정도, 상식 퀴즈 2개정도로 문제를 만들었습니다. 학생이 나와 설명하고 나머지 친구들이 맞히는 형태입니다. 1등한 조 아이들에게는 칭찬카드를 나눠줬고 아이들은 정말 좋아했습니다.
칭찬카드는 아무나 주지 않았습니다. 순간 순간 보이는 사소한 것에 주었습니다. 시험 잘 쳤다고 주고 그러지 않았습니다. 인사를 잘한다던지, 하필 그 순간 쓰레기를 주었다던지, 친구와 잘 지낸다던지 등 순간을 보고 주었습니다. 칭찬카드는 쓰임이 중요했습니다. 고민 후 학교 앞 문방구 사장님께 말씀드렸습니다. '이 카드를 가지고 오는 학생에겐 500원치씩 계산하셔서 물건 주실수 있겠냐고, 매달 말에 와서 제가 현금 결재해 드리겠다.'고 했습니다. 사장님께선 흔쾌히 동의해 주셨고 저는 매달말 문방구에 가서 장당 500원씩 계산해서 사장님께 돈을 드렸습니다. 학생들은 칭찬카드를 이용해 하교길에 간식을 사먹고 학용품을 샀었습니다. 교육적으로 옳은 방법인지는 모르겠으나 당시 저는 개인적으로 '월급의 10%는 학생들에게 돌려줘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프로젝트는 상당히 오랜 기간 계속되었습니다.
저는 신규교사시절 학생들을 위해 다양한 것들을 시도했습니다. 우선 반 아이들 가정방문을 했습니다. 가정방문을 게임같이 진행했습니다. 집이 가까운 학생 5~6집을 묶습니다. 방문해도 괜찮을 지 학부모 동의서를 받았습니다. 학교 마치면 6명의 학생과 같이 출발합니다. 첫 집에 갑니다. 아이들은 친구집에서 놉니다. 저는 냉장고를 열어보고 학생 방을 둘러봅니다. 그리고 부모님께 자녀가 학교에서 어떻게 생활하는 지, 얼마나 잘 생활하고 있는지 손편지를 씁니다. 편지 제일 마지막에는 '학교에 궁금한 것이 있으면 언제든 전화주십시오.'라는 글과 함께 제 전화번호를 남겼습니다. 그렇게 6집을 다 돌고나면 저녁 7시쯤 됩니다. 마지막 집에오면 학생들이 다 사복으로 갈아입고 있습니다. 자기 집에 가면 옷을 갈아입게 했습니다. 교복이 아닌 사복을 입으면 아이들은 더 활기차졌습니다.
마지막 집을 보고 손편지를 쓰고난 후, 하루종일 샘이랑 같이 다닌다고 수고했다고 학생들에게 라면을 끓여 줍니다. 학생들은 신나게 친구들과 라면을 먹었습니다. 이렇게 2주 정도 하면 모든 학생집을 다 둘러볼 수 있었습니다. 가정방문은 학생을 이해하기 위해 저에겐 아주 중요한 활동이었습니다. 당시 교장선생님은 못 가게 했습니다. 혹시나 모를 민원을 걱정하셨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냥 강행했습니다. 출장을 내되 여비부지급으로 하라는 지시는 따랐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공정하지 못한 처신이었지만 전 가정방문을 해야 학생을 더 정확히 알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기에 따랐습니다. 가정방문하며 경험했던 감동적이고 슬픈 사연들이 너무 많지만 일일이 지면 소개 못하는 것이 아쉽습니다. 확실한 것은 가정방문을 하며 저 또한 더 겸손한 교사가 될 수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가정방문외에 시험 친 날은 축구를 했습니다. 학원 가야한다는 학생들은 제가 직접 그 학원에 전화해서 학원을 하루 쉬게 했습니다. 부모님들께도 직접 전화 했습니다. '학생이 시험 친다고 고생했습니다. 담임의 철학입니다. 시험 후에는 같이 놀아야 합니다. 오늘만큼은 어머님께서 이해해주시면 좋겠습니다.' 당시 부모님들은 흔쾌히 허락해 주셨습니다. 어떤 아버지는 크게 웃으시며 동의해 주셨던 분도 계셨습니다. 지금생각하면 어이없는 부분도 있지만 당시엔 그런 용기(?)가 있었습니다. 저는 약한 팀에 들어가 주전으로 뛰었습니다. 제가 축구를 잘하지는 못했으나 중학생들한테는 지지 않았습니다. 선생님과 같이 뛰는 것만 해도 아이들은 좋아했습니다. 나중에 학생들인 시험기간을 기다리는 기이한 현상이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신규교사시절 전 학생들과 같이 생활하기 위해, 학생들 곁에 서기 위해 노력했었습니다.
<3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