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20년 넘게 학교에서 아이들과 생활하고 있다. 참 많은 아이들을 만났다. 이 글을 쓰며 돌이켜 생각해보니 어떤 의미로든 기억에 남는 아이들이 있다. 그 아이들 덕분에 눈물도 흘렸고 크게 웃었으며 나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다.
2003년도에 첫 발령을 받았다. 벌써 23년 전이다. 중학교 였으니 그 아이들은 2026년 현재 37살에서 39살정도 되었겠다. 헉! 놀랍다. 아이들 나이를 생각지 못하고 살았다. 이 놈들이 벌써 30대 중후반이라니...그 땐 내가 젊었었다는 것을 잊고 살았다.
작년에 졸업한 학생들은 올해 20살이 되었다. 나도 나이를 한 살 더 먹었다. 중년들은 이해할 것이다. 어느 순간이 되면 내가 몇 살인지 정확하게 모르게 된다. 나이를 말할 자리도 없고 굳이 나이를 기억하려고 하지 않기 에 그럴 수 있다. 내 나이는 모르지만 아이들이 자라는 것을 보면 나도 나이를 먹어감을 알 수 있다. 이 놈이 벌써 고등학생이라니..라면서.
2026년에도 난 10대 후반의 학생들과 만나고 생활할 것이다. 학생들은 수업시간엔 교실에서 내 수업을 듣지만 수업이 끝나고 나면 학교라는 건물 안에서 어른과 청소년으로 만난다. 학생들은 도움이 필요하면 찾아오고, 심심하면 찾아오고, 친구 혼내키려고 일려주려고도 온다. 내가 먼저 부르면 보통 학생들은 긴장해서 온다. 아마 뭔가 찔리는 것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긴장한채로 학생이 오면 내가 처음 꺼내는 말은 보통 이거다.
'샘이 혼내려고 부른게 아니다.'
그럼 학생 표정이 약간 펴진다. 그리곤 조용히 과자 하나를 준다. 그럼 학생 표정에 미소가 올라온다. 이 때가 되어야 이야기를 할 수 있다.
학생들과 다양한 이야기를 나눈다. 일부러 격려하려고 부르기도 하고 칭찬하려고 부르기도 한다. 간혹 진대(진지한 대화)를 위해 부르기도 한다. 진대는 주로 아이 마음을 확인할 때 한다. '그 때 어떤 마음으로 그랬어? 지금 기분은 어때? 앞으로 어떻게 하길 바라노?' 등이다.
학생도 사람이고 나도 사람이기에 우린 항상 최선의 선택, 최선의 대화를 하지 못한다. 실수라는 것을 하기 마련이다. 그것이 그냥 지나가면 싸가지 없는 이 될 수 있고 무례한이 될 수 있으며 무시함이 될 수도 있다. 해서 난 가능하면 학생의 이런 부분을 보거나 들으면 최대한 빠르게 만나서 이야기 하려 한다. 속마음, 진실을 확인하기 위해서다. 해서 내 잘못이면 사과하고 학생이 선을 넘었으면 주의를 주거나 조절하자고 권한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학생과 대화 후 교무실에 돌아와서도 찜찜함이 남을 때가 있다. 그 땐 그 상황을 봤던 학생에게 먼저 물어본다. '아까 샘이 좀 심했나?' '네, 샘, 샘이 조금 심했습니더.'하면 '그렇제?'하고 해당 학생을 얼릉 불러 사과한다. 반면 '아입니더. 글마는 혼이 좀 나야 됩니더.'하면 '그렇제?'하고 우선 지나간다. 그리고 그 학생을 은근히 유심히 관찰한다. 특히 나를 대하는 태도를 본다. 모른 척하고 휙~ 지나가면 '아직 삐낏네.'라고 생각한다. 시간이 지나 장난을 걸어본다. 반응하면 괜찮은 거다. 하지만 반응하지 않으면 뭔가 앙금이 남아 있는 것이다. 이럴 땐 나만의 비장의 카드를 꺼낸다. 이 방법은 나의 생업과 관계있기에 공개는 하지 않겠다. 무릇 고수들은 모두 자기만의 레시피가 있지 않나.^^;;
아이들과 만나며 나의 다양한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학교안에만 있으면 교사라는 나름의 권력에 취하기 싶다. 그 때 아이들의 말을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다. 아이들은 미성숙하다고 보는 시각도 존재하지만 기준에 따라 다르다고 본다. 자기 중심적 사고가 미성숙의 기준이라면 그럴 수 있다. 하지만 전체를 보는 시각을 가진 아이도 있고 말을 이쁘게 하는 아이도 있다. 상대를 특별히 더 배려 잘하는 아이도 있고 기분 나쁘지 않게 표현 잘하는 아이도 있다. 내 편인 아이도 있고 친구편인 아이도 있다. 이런 아이들을 모두 미성숙하다고 일반화한다면 이것은 오판이다.
가식적으로 하는 말이 아니라 난 나보다 뛰어난 아이들을 아주 많이 봐 왔다. 이 아이들은 다양한 부분에서 뛰어났다. 잘 참는 아이도 있었고 정말 재미있는 아이도 있었고, 당당한 아이도 있었고 겸손한 아이도 있었다. 붙임성 좋은 아이도 있었고 같이 있으면 행복해지는 아이도 있었다. 그런 아이들을 볼 때마다 난 진지하게 묻는다. '넌 어떻게 해서 그런 생각을 하니? 너 어제 무대에서 이런 말을 했잖아. 그 말은 준비한 거였어? 이 숙제 아주 힘들어 했잖아. 어떻게 끝까지 해 냈노? 니 스트레스 진짜 많이 받는 것 같던데 어찌 웃으면서 할 수 있노?' 그럼 아이들은 답한다. 그것도 솔직하게. 이게 정말 큰 배움을 준다.
살아보니 알겠다.
많이 아는 것이 힘이 아니다. 많이 알아주는 것이 힘이다.
내가 잘난 것을 남에게 더 많이 보이는 것이 힘이 아니라 상대 말을 많이 들어서, 상대를 많이 알아주는 것이 힘이었다. 어른이나 교사는 아이들에게 상대적으로 강자다. 이 들은 마음만 먹으면 계속 말을 할 수 있다. 주로 말하는 자가 강자, 듣는 자가 약자다. 역할 바꿈이 필요하다. 강자지만 들어야 한다. 약자가 충분히 말할 수 있는 기회를, 순간을, 시간을 주어야 한다. 그리고 충분히 들어야 한다. 말을 끊지 말고, 판단하지 말고, 그냥 들어야 한다. 다 듣고 나면 다른 말 필요없다. 그냥 '잘 들었다. 말해줘서 고마워.'라고 하면 된다.
난 이런 것들을 아이들과 생활하며 확실히 알게 되었다. 고맙게도 이런 말들을 직설적으로 해주는 아이들이 있었다. 당시엔 불편했던 감정도 있었다. 하지만 그 표현조차, 나에대한 애정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들이었다.
나의 욕심 중 하나는 이것이다.
아이들이 나를 만나 어떤 부분이든 새로운 배움을 느꼈으면 좋겠다. 나도 아이들을 만나 어떤 부분이든 새로운 배움을 느끼고 싶다. 그럴려면 더 이야기 나눠야 하고 더 많은 순간을 함께해야 하고 더 진솔해야 한다. 타인과 진솔한 만남을 가질 수 있는 것 자체가 이미 특별한 능력이다.
난 더 훌륭한 사람이 되고 싶은 생각은 없다. 다만 아이들과 계속 재미있게 지내고 싶다. 학교 안에서 만남이 나의 삶을 더 풍요롭게 해 준다. 이것을 이미 나의 삶으로 증명되고 있다.
방학이지만 내일도 출근한다. 아이들이 있는 학교도 재미있지만 아이들이 없는 학교도 운치가 있다.
난 행복한 교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