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서의 셋째 날이 밝았다. 료칸의 이불이 어지간히 두터워서 간밤에 히터를 끄고 잤는데 새벽동안 너무 추워서 몇 번 잠에서 깨는 바람에 잠이 좀 부족했다. 후지산 아랫마을의 추위를 너무 간과한 잘못이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이불을 정리하고 있자니 아침에 일어나면 후지산이 보일 거라고 했던 직원의 얘기가 떠올랐다. 설마 싶은 마음에 바로 창문을 열었다.
객실 창문을 통해 보는 후지산
직원이 얘기한 대로 방의 창문을 통해 보이는 후지산은 정말 깨끗했다. 슬슬 해가 뜨기 시작하는 하늘을 거대한 후지산이 가득 차지하고 서있었다. 날씨도 더할 나위 없이 맑았고 좋은 여행을 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가 들기 시작했다.
다만 간밤에 몸이 차가워진 상태였기 때문에 우선은 온천에 들어가고 싶었다. 막 잠에서 깬 상태로 비몽사몽 온천을 찾아가니 전날 저녁과 마찬가지로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어제저녁시간에 다른 투숙객들을 분명히 봤는데 다들온천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건지 잠이 많은 건지 탕에서는 마주치지를 못했다. 그래도 덕분에 아무도 없는 온천에서 여유롭게 즐길 수 있어서 오히려 좋긴 했다. 몸을 따뜻하게 녹이고 방으로 돌아온 우리는 전날에 약속한 조식시간에 맞춰 식당으로 향했고 테이블에는 이미 음식이 차려져 있었다.
호화롭지는 않지만 정갈했다.
또다시 자신 없는 음식 얘기를 조금 하자면, 닭고기와 두부, 버섯이 들어간 간장 베이스의 나베와 연어구이, 수란, 샐러드, 절인 채소들과 낫또가 있었다. 후식은 베리 종류의 청이 들어간 요거트로 적당히 시큼하면서도 청의 단맛이 적절해서 맛있었다. 식사로는 밥과 된장국이 나왔는데 된장국은 작은 조개가 잔뜩 들어서 국물이 시원하고 맛이 깊었다. 반찬도 다 괜찮았는데 낫또만은 도저히 입에 맞질 않았다. 몇 년 전에 먹었을 때도 별로라고 생각했었는데 조금 으른이 되고 먹어도 마찬가지였다. 맛이 어떻다를 떠나서 식감이 너무 끈적하고 질척해서 영 취향이 아니다. 그래도 메뉴 자체는 전체적으로 가벼우면서도 배를 채우기에 충분해서 아침으로 적절했다.
식사를 끝내고 우리는 방으로 올라가 바로 나갈 준비를 시작했다. 어제와 마찬가지로 오늘도 일정이 꽤 하드 할 예정이라 최대한 빨리 출발하고 싶었다. 1층으로 내려가 바로 체크아웃을 하고 현관을 나서니 공기가 꽤 서늘했지만 날이 맑고 해가 나오기 시작하는 중이었다. 이대로 시간이 지나면 따뜻해질 터였다. 바이크도 간밤에 추웠는지 이슬이 얼어붙어있었는데, 이럴 때는 억지로 때 내려고 하지 말고 시동을 걸어서 엔진온도를 높이면 자동으로 녹는다. 녹은 물은 수건으로 닦으면 끝. 엔진이 예열되는 동안 생각해 보니 이러면 도로도 좀 얼어있겠는데? 싶어서 형한테 좀 조심해서 달리자 말하고 료칸을 나섰다.
첫 번째 목적지는 전날 가지 못했던 후지 5호의 마지막 호수인 야마나카호. 도로를 조금 달리니 금방 시내를 빠져나가 숲길이 나왔다. 거대한 나무들 사이로 풀 냄새가 가득하고 아침 공기가 차고 맑아서 기분이 좋았다. 한동안 공기를 양껏 들이마시고 싶어서 헬멧의 바이저를 올리고 달렸다. 날씨도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날이라 바이크를 타고 돌아다니기 좋아 보였다. 3일 차도 즐거운 여행이 될 거라는 예감, 아니 예언이 떠올랐다.
야마나카호에서 보는 후지산, 날씨 운이 정말 좋았다.
숲길을 빠져나가니 후지산이 눈앞에 보이고 그 옆으로 큰 호수가 펼쳐져 있었다. 우리는 후지산과 호수를 오른쪽에 끼고 달리다가 적당한 주차장이 보여서 얼른 들어가 바이크를 세웠다. 호숫가는 일종의 공원처럼 되어있어서 길이 쭉 나있었는데 조깅이나 산책을 하는 사람들이 정말 많았다. 바이크를 타는 사람들도 확실히 어제보다 많이 보였고 호숫가를 달리는 길이 꽤 유명한 라이딩 명소라는 모양이었다. 주말에 날씨가 좋아서 일찍부터 놀러 온 사람들이 많았다.
바이크에서 내렸을 때 눈앞에 보이는 호수와 후지산의 모습은 감탄이 나올 정도였다. 넓은 호수가 후지산과 푸른 하늘을 삼키고 조용히 요동치는 모습이 신기했다. 후지산의 존재 자체가 사기라고 한 형의 말이 이해가 되는 절경이었다.
눈에 보이는 모습과 반대로 호숫가를 거니는 사람들은 마치 당연한 일인 양 평화롭고 여유로워 보였는데 그중에는 리트리버를 다섯 마리나 데리고 산책시키는 부부도 있었다. 나는 갑자기 집에 있는 마루가 잘 있으려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마루는 우리 집에서 키우는 다섯 살짜리 거대 골든 리트리버로 한 공장에 방치되어 있는 걸 데려왔다. 이런 곳에서 마루를 키우면서 살면 좋겠다고 형에게 말하니 좋은 생각이라고 맞장구를 쳤다. 만약 그런 이상이 가능하다면 일본 기업에 취직하는걸 조금 진지하게 고려해 봐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사진을 좀 찍고 다시 바이크에 시동을 걸었다. 경치를 구경하며 호숫가를 달리고 있으니 근처에 괜찮은 캠핑장이 있는데 거길 좀 구경하고 가겠느냐는 얘기를 해서 그러자고 했다.
겨울이라 그런지 사람이 많지는 않았다.
sotosotodays CAMPGROUNDS는 야마나카호의 뾰족하게 튀어나온 모래톱 위에 만들어진 캠핑장으로, 어디를 둘러봐도 호수가 눈에 들어왔다. 호숫가에 대충 자리 잡고 캠핑장을 만들면 알아서 괜찮은 장소가 되겠거니 생각이 들자 이 풍경 자체가 너무 부러웠다. 캠핑장 정보를 조금 찾아보니 여름에는 호수에서 카약을 타거나 물놀이도 하는 모양이었는데 방문했을 때는 너무 겨울이라 어림도 없었다. 요즘에는 한국에도 카약을 타는 사람들이 많아졌으니 흥미가 있다면 한번 가보는 것도 좋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캠핑과 카약, 그야말로 감성에 절여진 취미가 아닐 수 없다.
캠핑장을 둘러보고 다시 바이크에 오른 우리는 하코네로 향했다. 하코네는 일본에서 거의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설명이 필요 없는 온천 관광 명소다. 나도 거진 5년 전에 방문한 적이 있는데, 도쿄에서 열차를 타고 가서 산악열차, 유황온천, 케이블카 등을 구경하면 딱 하루정도 즐기기 좋은 코스가 나온다. 내가 갔을 때는 모든 관광코스를 하나의 패스로 묶어 저렴하게 판매했기 때문에 가성비가 괜찮았는데 지금도 그런 게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온천이 아니라 관광이 목적이라면 패스 구매를 고려해 보는 것도 좋은 선택일 것 같다.
케이블카, 유람선, 산악열차. 2017년이라 화질이 아주 구리다.
하지만 정작 우리의 목적은 그런 단순 관광이 아니었다. 기껏 바이크를 탔으니 바이크로만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하는 법. 하코네와 이즈반도 사이에 있는 산악도로에서 능선을 따라 바이크를 타면서 고지대에서 주변을 둘러보는 것이 금일의 주요 목표였다. 그래도 숙소 자체는 하코네가 맞기 때문에 능선 코스가 끝나면 그대로 산을 내려가 다시 하코네로 돌아가면서 주변을 둘러볼 생각이었다.
우리는 예정대로 하코네의 온천, 료칸 명소를 지나(사람이 많아서 차가 좀 막혔다.) 우선은 토토코 오다와라라는 해산물 마트 + 휴게소로 향했다. 그곳의 푸드코트에서 제철회를 잔뜩 올린 덮밥을 파는데 그게 꽤 맛있다는 모양이라 점심을 먹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주차장에 바이크를 대고 건물로 들어가니 식당으로 올라가는 계단밑까지 줄이 길게 서있었다. 주말 점심시간이니 어느 정도는 예상한 부분이기도 했고 도쿄로 돌아가는 날 해안도로를 따라 달릴 예정이라 그때 다시 방문하면 되니 오늘은 일단 포기였다. 그래도 뭔가 먹기는 해야 해서 마트에서 초밥을 사다가 간단히 요기를 했다. 나는 고등어 초밥을 먹었는데 회덮밥만은 못해도 마트 초밥치고는 신선하고 꽤 맛있었다. 과연 바닷가 마을.
점심을 대충 때우고 바쁘게 바이크에 올라탄 우리는 휴게소를 나가서 원래 목적지로 향했다. 능선길의 입구는 그 근처라 10분 정도 달리니 시작지점이 나왔는데 단순한 산길임에도 톨게이트가 있었다. 그렇다 유료 도로인 것이다. 한국도 그런 곳들이 몇 군데 있긴 하지만 일본은 꽤 많은 길이 유료도로이고 이번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일본 유료도로에 대한 얘기는 하단의 부록에서 더 설명하도록 하고 글을 이어나가겠다. 우리는 길 옆에 바이크를 잠시 세우고 현금을 준비한 뒤 게이트로 들어섰다. 이 코스도 워낙 유명한 길이라 우리 말고도 바이크나 차를 탄 사람들이 많이 보였다.
능선 코스는 예상한 것보다 괜찮았는데, 주변 풍경도 풍경이지만 길이 구불구불하니 타는 맛이 있었다. 이건 바이크를 타보지 않은 사람들은 잘 모르는 감각이겠지만 커브를 돌며 바이크와 몸을 눕히고 달리는 건 상당히 재미있다. 이 바이크를 내가 온전히 조종한다는 기분도 들고 이리저리 기울어지지만 절대 넘어지지 않는 바이크가 상당한 고양감을 준다. 특히 오르막이나 내리막에서의 커브는 일반 도로에서의 커브와 달리 꽤 스릴이 있어서 마치 롤러코스터를 내가 조종하는 느낌이 든다. 이런 코스를 흔히들 와인딩 코스라고 부르며 즐기는 사람들이 많은데 설명이 길어질 것 같으니 패스.
타이칸잔 전망대에서 보이는 후지산과 아시노호
산의 능선을 따라 달리면 왼쪽으로는 태평양이 오른쪽으로는 후지산이 보였다. 산길은 높았고 맑은 날씨가 더해져 정말 멀리까지 보였다. 길을 달리다가 중간에 Taikanzan 전망대에 잠시 멈춰 사진을 찍었는데 오전까지는 바로 앞에 있었던 후지산이 꽤 멀어져 있었다. 하코네가 품고 있는 아시노호와 후지산이 동시에 보이는 모습이 전망대의 주요 포인트라는 것 같았다. 전망대 안에는 바이크 용품을 파는 카페도 있었지만 다음에 들를 장소도 카페여서 따로 뭘 마시지는 않고 구경만 하다가 다시 바이크에 올랐다.
다음 목적지는 능선길 중간에 있는 Bikers Paradise라는 이름의 카페였다. 바이크 라이더들의 문화에는 바이크 카페 혹은 라이더 카페라고 부르는 것이 존재하는데, 이것의 역사적인 유래는 부록에서 설명하기로 하고, 쉽게 말해 라이더들이 찾는 카페로 바이커즈 파라다이스도 그런 부류들 중 하나였다. 아무래도 라이더들이 모이는 장소다 보니 라이딩 관련 편의시설이 잘 되어있었으며 바이커즈 파라다이스는 내가 본 중에서도 가장 규모가 크고 시설이 넓었다. 우리는 이미 주차되어 있는 다른 라이더들의 바이크를 구경하다가 안으로 들어갔다.
전시되어 있는 바이크들. 왼쪽은 홍보용 오른쪽은 바이크 튜닝 관련해서 전시된 바이크
카페의 시설은 단순히 크기만 한 것은 아니고 나름 즐길거리도 있었다. 큰 홀에는 유명한 바이크 제조사들이 홍보를 위해 전시한 바이크들이 있어서 실제로 타보거나 이것저것 만져볼 수 있었고, 몇몇 브랜드의 바이크들은 3000엔 정도를 주면 직접 트랙에서 몰아보는 것도 가능했다. 평소에 마음속에 넣어둔 바이크가 있다면 시승할 수 있는 좋은 기회 같았다. 나도 혼다의 헌터커브를 타보고 싶어서 고민했지만 시승 시간에 비해 가격이 너무 비싸서 그만뒀다. 그 외에도 오프로드 트랙에서 작은 전기바이크를 타는 놀거리가 있었는데 겨울이라 운영 중이지는 않았다.
참고로 해당 카페는 무려 입장료가 따로 있다. 아무래도 시설의 유지비 때문이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조금 의아했다. 나야 뭐 관광으로 온 거고 이번이 아니면 딱히 기회도 없으니 기꺼이 돈을 내고 커피를 주문해 자리에 앉았다. 주변을 좀 둘러보니 카레를 먹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카레를 파는 게 일본 바이크 카페의 고유문화인지 아니면 그냥 카레가 맛있어서 그런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카레 맛이 좀 궁금했지만 막 점심을 먹고 올라온 참이라 먹지는 못했다.
우리는 커피를 마시며 조금 여유를 가지기로 했다. 아침부터 정말 부지런히 도 움직였고 슬슬 피곤함이 올라오는 참이었다. 그래도 다행이라 해야 할지 능선 코스는 다음에 들를 장소를 마지막으로 숙소가 있는 하코네 안쪽으로 다시 돌아갈 예정이었다. 하코네에 대해서 생각하다가 갑자기 숙소가 어떤 곳인지 궁금해져서 형에게 물어보니 료칸이나 호텔은 아니라고 했다. 그리고 힙한 곳이라고 도 얘기했는데 도대체 힙한 숙소라는 게 뭔가 싶었지만 가보면 알겠지 싶었다. 아무리 힙하다 해도 인스타 카페처럼 다 쓰러져가는 인테리어는 아니겠지.
이런저런 얘기를 하면서 커피잔을 비우니 시간이 꽤 지나있어서 다시금 바이크에 올랐다. 하늘을 보니 슬슬 해가 넘어가는 중이었다. 여기는 산골이고 도시보다도 빠르게 어두워질 터, 호수와 산 너머로 지는 노을을 보는 게 조금 기다려졌다.
이즈 반도 옆의 스루가 만과 아시노호
우리는 갈대숲 사이의 전망대에서 피날레를 만끽하고 능선 코스를 빠져나가는 길에 올랐다. 이제 산길은 끝이고 하코네 신사를 보고 숙소로 향하는 일만 남았다. 아시노코 스카이라인을 따라 구불구불 산길을 내려가면 아시노호가 나오고 호수를 오른쪽에 끼고 둘레를 반바퀴 돌면 하코네 신사가 나올 터였다. 내려가는 길에는 펜션인지 별장인지 알 수 없는 빈집들이 많았는데 사람이 사는 동네라면 있어야 할 마트나 편의시설이 거의 없어서 마을이라고 부르기는 어려워 보였다.
하코네 신사 근처까지 가니 지나다니는 사람들과 관광버스가 많아졌다. 이 말은 능선에서 돌던 것과는 달리 이번에는 진짜 관광 명소라는 뜻이었다. 우리도 명색이 관광객인데 하루 종일 돌면서 들른 제대로 된 관광지가 하나뿐이라는 게 조금 우스웠다. 주차요원의 유도를 따라 주차장에 바이크를 세우고 우리는 토리이를 보러 호수 쪽으로 향했다.
호숫가의 토리이가 조금 신비스럽게 보인다.
신사 주차장에서 계단을 따라 쭉 내려가면 아시노호에 세워진 토리이가 나온다. 여기도 2017년에 이미 둘러본 적이 있는 장소라 그다지 새롭게 느껴지지는 않았지만 오히려 익숙하기에 여유롭게 둘러볼 수 있었고 마지막 예정으로는 딱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만 주변에 관광객들이 너무 많아서 다른 사람이 안 나오는 카메라 구도를 찾기가 불가능했다. 위의 사진에 나오는 토리이 바로 밑에서 사진을 찍으면 그게 가능하긴 한데 그러려면 긴 줄을 서야 했다. 나나 형이나 사진 하나 찍으려고 줄을 서는 종류의 인간은 아니라 눈으로 둘러보고 다시 신사로 올라갔다.
일본에 온 첫날에 공항에서도 느끼긴 했지만 신사에는 유독 푸른 눈의 관광객이 많았다. 내가 몇 년 전에 왔을 때는 외국인이 별로 없었는데 코로나가 누그러들면서 눌러왔던 역마살이 터진 게 아닐까 싶었다. 허긴 서양 쪽 문화에서 보기엔 이런 신사의 분위기가 동양의 신비처럼 느껴질 것이다. 와우! 이스턴 오리엔탈 컬처! 베리 굿!
하코네 신사
하코네 신사는 일단 규모 자체가 그리 크지 않고 도쿄의 아사쿠사 신사와 비교해서 조용하고 차분했다. 게다가 계단을 꽤 많이 올라가야 하기 때문에 산에 둘러싸인 모양새라 운치가 있고 거목의 그늘이 드리운 붉은 신사 건물은 꽤 느낌이 있었다. 신사가 밀고 있는 주요 운세는 교통안전! 바이크를 타는 우리들에게는 잘 어울리는 선택이었다. 나는 따로 참배는 하지 않았고 형은 100엔인지 50엔인지를 넣고 기도했다. 100엔으로 교통안전을 얻을 수 있다면 이득이긴 하다.
신사를 한 바퀴 돌고 다음은 드디어 숙소다. 신사를 둘러본 후부터는 솔직히 꽤 힘들었다. 아무리 바이크를 타고 돌아다녔지만 오래 앉아있는 건 그것 만으로도 꽤 고생인 법이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숙소가 바로 코앞이라 신사 주차장을 나가 3분 만에 도착했다. 숙소의 이름은 RoheN Resort&Lounge HAKONE, 게스트 하우스였다. 다만 우리가 예약한 것은 별도의 방으로 도미토리 형태는 아니었다. 나도 나이를 먹었는지 모르는 사람들과 뒤엉켜 지내는 게 싫다.
외부와 객실. 사진 뒤로 테이블이 놓인 공간이 있고 2층침대가 그리 편하지는 않았다.
메인 홀. 저녁이 되면 장작불을 피워준다.
바이크를 문 앞의 장작더미 앞에 세우고 안으로 들어가니 왜 형이 힙하다고 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입구로 들어가면 바 형태의 주방 겸 데스크가 보이고 그 앞에는 여러 명이 앉을 수 있는 테이블이 놓여있어서 뭔가 유럽의 주방 같은 느낌이 났다. 짧은 계단을 내려가면 메인 홀이 나오는데 중간에는 화로 겸 테이블과 주변으로 소파가 있어서 저녁에 모여 대화를 나누기 좋아 보였다. 위의 사진에는 안 나왔지만 작은 칵테일 바도 있고 불 앞에 앉아 술을 마시며 하하 호호 대화하는 모습이 상상이 갔다. 만약 내가 인싸였다면 처음 보는 다른 여행객들과 얘기를 나누다가 다음을 기약하며 메일주소를 주고받았겠지만 어림없지, 아싸들은 체크인을 하고 바로 객실로 향했다.
객실은 비즈니스호텔 정도의 크기에 전체적으로 깔끔하고 좋은 방이었다. 우리는 짐을 풀고 잠시 쉬면서 오늘의 남은 시간을 어떻게 쓸지 얘기했는데, 편의점에 들를 겸 호숫가를 조금 산책하다 돌아와서 숙소 식당에서 저녁을 해결한다는 심플한 계획이 금방 세워졌다. 온천에 갈까 말까 마지막까지 고민했지만 바이크를 타고 왔다 갔다 해야 하는 게 너무 귀찮아서 그만두기로 했다. 오늘의 바이크는 이제 그만.
밤에 잠기는 빈 선착장은 고요하고 쓸쓸하게 느껴진다.
우리는 조금 쉬다가 다시 거리로 나왔다. 길에는 슬슬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이 버스를 기다리거나 걸음을 재촉하고 있었다. 예정대로 해가 지는 호숫가 선착장을 조금 거닐다가 숙소 앞 로손에서 마실 것과 먹을 것을 사서 숙소로 돌아왔다. 방에서 각자 샤워를 하고 조금 더 쉬다가 그대로 누워있으면 잠들 것 같아서 저녁을 먹으러 내려갔다. 숙소 내부를 설명할 때 얘기했던 홀에서 식사를 주문할 수 있어서 우리는 탄두리치킨과 스테이크 그리고 트러플 오일을 뿌린 감자튀김과 맥주를 두 잔 시켰다.
이쯤에 음식사진이 나와야 한다는 건 알고 있지만, 정말 피곤했는지 우리 중 누구도 음식 사진을 찍지 않아서 보여드릴 게 없는 점 사과드린다. 그래도 사진으로 남겨야 할 특별한 맛은 아니었고 관광지의 숙소라 가격이 꽤 비싸서 가성비는 그닥이었다. 힙한 것들이 그럼 그렇지 뭐. 식사를 끝내고 방으로 올라간 우리는 거의 일과처럼 편의점에서 사 온 과자와 맥주를 먹고 얘기를 나누다가 저녁을 마무리했다.
3일 차는 정말 바이크로 시작해서 바이크로 끝나는 바이크뿐인 날이었다. 그게 좀 힘들긴 했지만 애초부터 원하던 방식이기도 했고 길을 달리며 본 것들이 너무 멋있어서 굉장히 만족스러웠다. 바이크나 차를 타고 여행할 사람들에게는 꽤 추천하고 싶은 코스다.
여기서부터는 부록이다. 관심 없는 사람들은 넘기자.
부록 1 - 일본의 유료도로
한국도 유료도로가 꽤 있지만 일본과는 비교가 안 되는 수준이다. 그도 그럴게 한국에서 톨비를 받는 경우는 대부분 고속도로거나 고속화도로이고 몇몇 다리에 국한되는데, 일본은 거기에 더해 "여기서도 돈을 받아?" 싶은 산길이나 일반도로들 조차 유료인 경우가 많다. 아시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일본정부는 한국정부에 비해 민영화를 꽤 많이 추진한 상태이고 유료도로들도 그것들의 일환이라고 보면 된다. 말하자면 민간이 소유한 민간도로인 것이다.
도로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관리비가 많이 들어가고 수시로 보수를 해줘야 하는데 한국의 경우 고속도로는 한국도로공사가 관리하고 지방도로는 관할 지방정부가 관리한다. 이를 위한 관리비 중에는 톨비도 있지만 국민들의 세금도 들어가게 되는데, 일본의 민간도로는 말 그대로 민간에서 관리하기 때문에 이에 대한 비용을 전적으로 통행자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고 이것이 유료 도로가 되는 것이다. 참고로 일본의 유료도로는 도로에 영향을 주는 정도에 따라 꽤 세세하게 요금이 나뉘어 있는데, 당연하지만 2륜차가 가장 적은 비용을 지불하고 트럭이나 버스등이 상대적으로 높은 비용을 지불한다.
부록 2 - 바이크 카페 이야기
2차 대전 후 영국 런던에는 락커즈라고 불리는 집단이 있었다. 그들은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좋은 교육과 생활을 영위하는 소위 부유층으로 전후 영국 사회에 대한 염증을 느끼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불만을 표출할 작은 일탈이 필요했고 가죽재킷과 부츠를 신고 바이크를 타는 것이 하나의 유행처럼 번지게 된다. 재미있는 점은 일탈이라고 해서 마약을 하거나 술을 마시고 거리를 질주하는 게 아니라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다가 경주를 하는 게 주요 문화였다는 것이다.
그들은 커피를 마시던 카페에서 다른 카페까지 누가 더 빨리 도착하는지를 놓고 경주하기를 즐겼고 점점 더 빠른 바이크를 선호하게 된다. 이를 위해 그들은 자신들의 바이크에서 필요 없는 부품을 떼어내고 공기저항을 덜 받는 형태로 바이크를 직접 개조했는데 이러한 종류의 바이크가 현대의 바이크 장르로까지 굳어지면서 cafe racer라고 불리게 된다.
본론으로 돌아와서, 바이크 카페는 이러한 역사적 상징성에서 영향을 받아 하나의 문화로 발전하게 된 케이스라 추측할 수 있다. 게다가 사실상 모든 국가에서 음주운전은 불법이기 때문에 술을 마실수도 없고, 바이크 여행 도중에 간단히 들려서 모임을 가질 공간으로 카페만큼 적당한 형태도 없었을 것이다. 가죽재킷을 입고 할리데이비슨을 탄 아저씨들이 모여서 하는 일이 딸기라떼나 커피 마시기라니 참으로 잘 어울리는 문화가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