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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경수정 Apr 17. 2019

02 요즘 같은 때에 장애로 웃긴다고?

장애와 코미디

“초원이 다리는 백만 불짜리 다리!”


코미디 무대 위 연기자는 초원이를 흉내 낸다. 오로지 웃음을 위해서. 예능 프로에서 같은 일이 벌어졌을 때는 온 국민의 질타를 받았던 상황과 달리 이 사람의 흉내에는 누구도 뭐라 말을 못 한다. 굳이 문제를 제기하기에는 무대와 코미디언이 너무 무명해서일까.


아무래도 연기자 본인이 장애의 당사자인 까닭이 클 것이다. 스탠드 업 코미디언 한기명은 무대에 올라 장애를 소재로 코미디를 선보인다. 팔을 비틀거나, 혹은 비틀린 팔에 “가만히 있어 병신아”를 외치고, 자신은 시력이 거의 없기 때문에 안경을 벗으면 ‘눈에 뵈는 게 없다’고 이야기한다. 청각 장애까지 있는 자신을 장애 종합선물세트라 소개한다.


웃기는 사람이 어떤 심정인지는 몰라도 보는 입장에서는 상당히 불편한 구석이 있다. 일단 장애를 똑바로 응시하기도 힘든데, 옆에 코미디까지 붙었다. 다들 웃으니 일단 웃긴 웃는데 관객들은 속으로 웃는 게 맞는 것인지 찝찝하다. 썩 내키지는 않지만 장애를 지니고 무대에 올라선 용기에 손뼉 치며 웃어야 할지, 자기 비하에서 그치지 않고 타인의 장애까지 비하하는 것에 문제를 제기하며 자리를 박차고 나가야 할지 혼란스럽다. 결국 산등성이 팔자 눈썹 밑으로 입꼬리는 올라가버리고, 두 손이 영혼 없이 짝짝대기 시작하는 어딘가 부자연스러운 순간에 당도한다. 장애인 스스로가 자신에서 나아가 장애 자체를 유희의 소재로 삼는 코미디를 어떻게 봐야 할까?


먼저 소수자가 같은 소수자적 정체성을 공유하는 이를 바로 그것으로 비하하는 것이 혐오인지 고민이 든다. 혐오 표현이 일반적으로 불특정 다수가 어떤 정체성을 이유로 소수에게 휘두는 것이라는 전제를 벗어나기 때문이다. 주체가 바뀌니 문제가 한층 더 복잡해졌다. 장애인이 본인은 물론 타인의 것이기도 한 장애라는 정체성을 비정상으로 간주하고 낮춤으로써 웃음을 유발한다. 장애가 부정적인 의미를 내포한 비정상이라는 차별과 편견을 강화할 수도 있다. 그런 유희에 동의하지 않는 다른 이에게는 모욕감을 들게 할 가능성도 있다. 그런데도 혐오가 아닐 수 있을까? 장애와 코미디가 만나는 지점은 혐오 표현의 범주를 벗어날 수 없을 것 같다.





“편견에 기반한 ‘동정’과 ‘혐오’는 자기만족에 불과한 ‘폭력’과 같다.”


발달장애아의 엄마이기도 한 류승연 작가의 말이다. 혐오인지 동정인지 중요하지 않을 수 있다. 나쁜 뜻 없이 안타까워하는 ‘착한’ 마음일지라도 편견에 기반했다면 그것은 폭력이 된다. 이러한 관점을 빌려 본다면, 장애를 소재로 한 코미디에서는 ‘비하’라는 형식 그 자체보다 무엇에 기반한 발화인지 살펴보는 것이 더 중요하다. 한기명의 코미디는 무엇에 기반하는가? ‘자기를 이야기하는 주체성’이다. 장애를 이야기하는 방식이 비하가 될 수 있지만 적어도 장애는 너희들 정상인의 눈에서 숨겨야 할 것이라는 편견에 균열을 가한다. 장애인이라면 무기력하게 남들의 도움만을 기다리며, 매사 우울하고 슬퍼해야 하는 고정불변의 대상화된 이미지를 부순다. 동정으로 폭력 하는 사람들의 반대편에 위치한다.


무대에 장애인이 서있는 것, 그리고 자기 이야기를 하는 것만으로도 주체성을 충분히 획득할 수 있지만 한기명은 멈추지 않는다. 관객들의 허를 찌르고 웃음을 터지게 하면서 더 적극적으로 주체를 발현한다. 그가 꺼내 든 장애 혹은 장애인 비하는 사실 비장애인들의 상식인 것이어서, 그들을 흉내 내는 것이 된다. 자기 비하는 역설적으로  상대의 편견을 꼬집고 냉소하는 것이 된다. 장애를 말하지만 그로 파생되는 위계를 지우고 무대와 객석 사이의 선을 지운다. 다소 어색한 웃음이어도 공간에는 환대가 오간다. 장애가 전시된 무대, 그를 내려다보는 객석이 싸늘하도록 철저히 분리된 프릭쇼(freak show)와는 대척점에 있다.


어떻게 해도 긍정하기는 어려운 장애를 소재로 웃긴다는 것은 불편할 수밖에 없다. 동일한 장애를 가진 이에게 상처로 작용하거나 비장애인에게 대응하는 방식이 무례하다고 느껴지는 표현도 많다. 그럼에도 지지하게 되는 것은 장애인이 무대에 서는 이미지 자체만으로도 장애에 대한 사회적 편견과 인식을 바꿔나갈 수 있는 시작점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어떤 식으로라도 장애를 이용하는 것에 반대하지만, 지금 현실은 이런 고민마저도 세심함으로 치부될 만큼  편견은 수도 없이 많고 견고하다.






“내 개그를 듣고 웃으면 장애인 비하고, 안 웃으면 장애인 차별이야”


지금까지의 고민을 무색하게 하는 펀치라인이다. 그런 고민은 다른 데 가서 하고, 내 앞에서 웃기면 그냥 웃으라는 듯이 던진다. 한기명의 스탠드 업 코미디는 장애인 인식 개선을 위해 시작한 것이 아니다. 그냥 웃기고 싶어서 무대에 올랐다. 하다 보니 그 비슷한 꿈을 가지게 되었더라 했다. 그의 코미디를 보며 할 수 있는 적절한 반응에는 환대의 마음으로 마음껏 웃으며 손뼉을 치는 선택지도 있겠지마는 여러모로 유튜브 댓글 중 하나인 다음과 같은 말이 더 바람직할 수도 있겠다.


“솔직히 같은 장애인이고 유사한 소재인데 <2018 브리튼 갓 탤런트>에 나온 'Lost Voice Guy'에 비하면 좀 떨어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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