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목포에 발을 디뎠을 때, 나는 속으로 조용히 중얼거렸다. ‘왜 이제야 왔을까.’ 그런 감상이 스며든 도시는 내게 둘뿐이었다. 제주도와 목포. 그 둘은 나의 여행 지도 위에서 오래도록 공백으로 남아 있었지만, 막상 처음 방문한 순간부터 마음 깊이 스며들어 버렸다. 목포를 처음 떠올릴 때, 나는 여수를 함께 떠올렸다. 늘 비교될 수밖에 없는 두 해안도시. 여수는 어머니가 먼저 가보고 싶어 했던 곳이었고, 장범준의 노래가 불씨가 되어 두 번째 방문 때는 낭만포차를 찾았다. 그 후로 몇 차례, 엑스포의 잔향이 남은 거리를 따라 여수를 다시 찾았고, 3년 전 코리아둘레길 남파랑길 원정대로 그 도시의 골목골목을 조금 더 가까이 들여다보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목포라는 이름이 조용히 내 안으로 흘러들었다. 코리아둘레길의 동료 중 한 명이 목포에 살았고, 그의 부모님이 횟집을 운영한다는 말에 자연스레 그 집은 우리의 아지트가 되었다. 그곳을 방문하기 전, 나는 목포에 대해 예습을 하다가 뜻밖의 사실을 마주하고 놀랐다. 도시가, 생각보다 너무 작았던 것이다. 지도 위의 목포는 작고 단출했다. 여수에 비하면 면적으로는 감히 견줄 수조차 없었다. 그러나 여행자는 면적보다는 내실을 본다. 도시의 본질은 넓이에 있는 게 아니라, 그 안에 깃든 이야기와 사람, 그리고 맛에 있다.
그 기준으로 보자면, 목포는 여수를 능가하는 곳이었다. 내게 도시는 세 가지로 말한다. 헤리티지, 시민성, 그리고 먹거리. 목포는 이 셋을 단단히 품고 있었다.
목포는 원래 작은 어촌이었다. 1897년 개항 이후, 운명은 이 조용한 마을을 항구도시로 바꾸어 놓았다. 일본은 이곳을 통해 자원을 실어 나르고, 그 흔적은 오래된 건물들로 남았다. 만호동과 유달동에는 300여 채의 근대 건축물이 지금도 숨을 쉰다. 그 건물들은 시간의 비늘을 간직한 채, 마치 거대한 기억의 책장을 넘기듯 그 시대를 들려준다.
거리 곳곳은 살아 있는 박물관 같았다. 붉은 벽돌과 목재 창살로 된 구 일본영사관, 신고전주의 양식의 조선내화 공장, 그리고 1935년에 지어진 화신백화점은 이제 카페와 갤러리, 문화공간이 되어 사람들을 맞이한다. 오래된 것들이 새로운 쓰임을 찾아 다시 빛나는 모습은, 마치 오래 잊힌 노래가 다시 유행을 타듯 반가웠다.
유달산의 곡선을 따라 골목길을 걸으면, 바다와 섬이 시야에 들어오고, 그 풍경 속에서 마음은 저절로 느려진다. 이 도시는 사람도 풍경도 모두 푸근하다. 정이 많고 담백한 주민들, 배를 타고 생계를 이어가는 이들의 삶이 거리마다 배어 있다. 목포의 공기는 그저 습한 해풍이 아니라, 오랜 삶과 정서가 증발한 안개였다. 전라도의 넉넉함이 골목 끝까지 스며 있다.
목포의 맛은 그 넉넉함의 정점을 이룬다. 광어회, 갈치조림, 홍어, 낙지연포탕, 꽃게장. 바다의 보물들이 식탁에 올라오면, 그 자체로 하나의 역사책이 된다. 낙지와 해초는 단순한 음식이 아니라, 유배의 시간을 견딘 이들의 인내심이자, 섬의 고요한 풍요다. 전통시장의 소박한 간식들마저도 정성이 들어가 있다. 먹을거리 하나하나가 이 도시의 심성이다.
목포는 꾸밈이 없다. 그래서 더 진실하다. 겉은 화려하지 않지만 속은 깊다. 노동의 땀, 역사라는 그늘, 사람의 숨결이 도시의 결을 이루고 있다. 나는 이곳을 ‘관광지’라고 부를 수 없었다. 목포는 관광지가 아니다. 목포는 감정이고, 기억이며, 숨결이다.
바다의 향과 낡은 벽돌, 이웃의 따스한 인사와 풍성한 식탁이 어우러지는 목포의 거리는, 과거와 현재가 나란히 걷는 시간의 산책로다. 그 길 위에서 나는 어느새 마음이 느려졌고, 세월에 잃어버린 나의 조각들을 하나둘 되찾았다.
그리고 다시 중얼거렸다.
‘이곳을 왜 늦게 찾아왔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