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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래이쓰 Mar 25. 2024

여자친구와 여자인친구

우선 나는 전형적인 한국식 연애를 하는 사람은 아니다. 기존에 만났던 남자들 중에 한국인이 거의 없기도 하고, 그나마도 썸만 타다 끝나서 한 번도 한국식 연애를 해본 적이 없다. 내가 말하는 한국식 연애란 주말에 무조건 만나서 데이트하는 거고, 서로 비밀 없이 공유하고, 하루종일 대화가 끊기지 않게 연락을 주고받으며, 서로의 남사친 여사친을 인정하지 않고, 개인적인 약속이나 친구들과의 계획을 허락을 맡아야 하는... 그런 연애를 말한다. 나는 솔직히 '깻잎 논쟁'이 왜 논쟁인지조차 이해가 안 가는데 만약 깻잎논쟁을 반대하고, 남사친과 어울리는 걸 금지하고, 주말에 파티에 가는 걸 금지한다면 절대 못 사귈 것 같다. 


다행히 지금 만나는 이 분은 그런 면에 있어서 너무 편하고 좋다. 심지어 일본인들은 연락을 잘 안 한다던데 몇 시간 동안 사라지거나 만나기로 한 날까지 답장이 없는... 그런 미친놈은 아니라 더욱 좋았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서로의 미래 계획도 공유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점이 비혼주의자로서 부담도 없고 참 편하고 좋았다. 연락 빈도, 연애관이 비슷하다고 생각했고 그런 부분으로 싸울 일이 없을 줄 알았다.. 그가 선을 넘기 전까지 (내 기준으로...)


내 일본인 친구 중에 캐나다로 2년 동안 유학을 떠나는 계획을 여자친구에게 말하지 않고 캐나다에 온 남자애가 있다. 그는 유학원에서 상담을 받고, 고민을 하고, 학비를 낼 때까지 여자친구에게 말하지 않았고 비행기표를 산 후에야 여자친구에게 말했다고 한다. 이 놀라운 이야기를 들을 때, 나는 벌어진 입을 다물수가 없을 정도로 충격을 받았는데 내 옆자리에 있던 다른 일본인 여자애가 본인도 그랬다며, 근데 자신은 내 다른 친구처럼 롱디(장거리 연애)를 하는 게 아니라 헤어졌다며, 결혼을 했거나 결혼을 약속한 사이도 아닌데 내 인생을 왜 연인과 상의하냐며 나를 더욱 경악하게 만들었다. 


연애 초기, 정확히 어떤 주제의 대화였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대화를 하다가 내가 무슨 질문을 했는데 그가 "아. 그건 내 사생활이야"라고 대답한 적이 있었다. 나는 조금 상처받을 뻔했지만 '그래? 그럼 나도 내 얘기 안 해줘'라고 어깃장을 부리는 걸로 그냥 넘어갔었다. 그리고 사건은 내가 저녁을 차려놓고 기다리고 있다가 퇴근한 그와 밥 한 숟가락을 떴을 때 터졌다. 갑자기 전화를 받더니 일어나 나가는데 수화기 너머로 여자의 앵앵대는 목소리가 들렸다. 잠시 후 다시 돌아와 동료가 다른 동료랑 사귀다가 차였는데 울고 있다며 나가도 되냐는 것이다. 어차피 다른 동료도 함께 있다고 했다. 나는 절대 안 된다고 했고 그는 거절 못 하겠다고 불평하더니 다시 전화를 받고 무려 40분을 통화를 했다. 물론 그 시간 동안 열받은 나는 남은 음식을 버리고 상을 치워 버렸다. 자세한 상황을 모르지만 알고 싶지도 않았다. 그는 마침내 전화를 끊고 내게 물었다. "대체 왜 화가 난 거야?" 


응? 왜 화가 났냐고? 제정신이야? 서로 언쟁이 오고 가고 내가 "I don't understand!"라고 하자 그는 오히려 "You don't need to understand" 라며... 이건 자기의 사생활이고 친구관계인데 왜 화를 내냐고 되물었다. 그렇게 상대 배려 안 하고 네 맘대로 다 할 것 같으면 연애를 뭐 하려 하냐. 그럼 여자친구인 내가 여자인 친구들과 뭐가 다르냐. 등등... 이 상황은 헤어질 생각까지도 하게 만들었다.    


그 이후, 내가 화난 이유 (기껏 차려놓은 저녁을 먹다가 나에 대한 배려 없이 동료에게 가도 되냐 묻고, 40분을 통화한 것. 엄청난 응급 상황이 아님에도 그런 이유로 나보다 그 동료를 더 우선순위에 두는 것 같은 말과 행동 등등...)를 자세히 설명하고 이해시키려고 하자 그는 사과를 했고 결국 우리는 화해했다. 나는 그냥 친구가 아니라 여자친구이니까 가장 그에게 가까운 사람이고 싶고, 비밀을 공유하고 싶고, 언제나 우선순위이고 싶다. 각자의 사생활을 존중하고, 충분한 각자만의 시간을 갖는 우리지만 그래도 친구보단 가까운 연인 사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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