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 기업 회장의 호텔 이용법 2
낯선 번호에 바쁘기도 해서 나는 손가락을 지그시 대고 빨간색 종료 버튼을 슬쩍 밀었다. 하지만 전화는 다시 걸려왔고 난 이번에도 거침없이 버튼을 밀어 제쳤다. 이런 내 상황을 알리가 없는 상대방은 재차 신호를 보내왔다. 받지 않으면 안 될 것처럼 진동소리는 우렁찼다.
'우르르르르 우르르르르!
나는 짧은 한 숨을 내 쉬고 전화기를 향해 손을 뻗었다. 책상 앞 거울에 비친 내 미간 사이로 접힌 주름이 보였다.
이윽고 나는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거칠고 얇은 목소리를 확인할 수 있었다.
''여보세요''
"네 안녕하세요 아침부터 죄송합니다. 혹시 XXX 선생님 맞으신가요?"
성대를 오래도록 사용한 흔적이 역력한 그 목소리는 노년기에 접어든 남자임에 틀림이 없었다. 노화한 그 성대는 얼굴에 흐르는 윤기만큼이나 또랑또랑한 정 회장의 것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목소리는 끊이지 않고 이어졌지만 그것은 어쩐지 힘없이 축 늘어져 있는 얼굴 가죽을 연상케 했다. 그런데 나를 선생이라 부르는 이 노파는 아침부터 내게 무슨 볼 일일까. 궁금하기도 했지만 보이스피싱이 아닐까 의심도 들었고 해서 솔직히 성가셨다.
“네. 그런데 무슨 일이시죠?”
"아 카드배송으로 연락드렸습니다. 지금 호텔 앞인데요."
얼마 전 대출을 받을 일이 있어 은행에 갔다가 일명 직원의 꺾기(대출을 빌미로 카드 가입이나 보험상품 등을 가입시키는 불공정행위)에 꺾여 신용카드를 만든 일이 있었다. 바로 그 카드배송 서비스의 일환으로 그 노인은 아침나절부터 나를 찾았던 것이다. 순간 그 노파에게 가당치도 않게 동정심이 느껴졌다.
신용카드 배송업무는 본디 노인들의 몫이었던 것처럼 언제부턴가 자연스럽게 그들 손을 통해 배송이 되기 시작했다. 카드배송 업무가 노인들의 재취업 일자리로 둔갑한 걸까. 굳이 시선을 많이 돌리지 않아도 우리 주변엔 요즘 이러한 노인들이 쉽게 눈에 들어와 박혔다. 지하철을 타면 한껏 야윈 몸으로 백화점 쇼핑백들을 휘감고 돌아다니는 노인들, 한겨울 비지땀을 흘려 가며 폐지 줍기에 여념이 없는 허리 굽은 노파들도, 고단한 새벽을 뚫고 힘겹게 첫차에 몸을 실어 건물 청소를 다니는 젊은 노년들의 모습도 어느샌가 버젓이 우리 일상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그들은 도대체 어디서 왔단 말인가. 이러한 노인들의 난망스러운 노동 행태는 무엇이란 말인가. 어색하고 낯설어야 할 모습들이 익숙함 때문에 자연스럽게 보였지만 오히려 이러한 자연스러움이 내게 이젠 불편하게만 느껴졌다. 삶이 저물어 갈수록 가벼워져야 할 발걸음인데 그들의 노후는 생물학적 나이와는 상관없이 역행해 가고 있는 듯했다. 단순히 느슨하게 살아온 삶의 대가라고 치부하기엔 무언가 이치에 맞지 않았다. 그중에는 분명 치열하게 살았던 삶도 있을 것이고, 한때는 잘 나가던 인생도 있을 것이다. 또 누군가는 영악하고 악착스럽지 못해 무한 경쟁에서 밀려난 노장도 있을 것이다. 과거에 그들이 보낸 최선의 세월이 고작 이런 현실을 가져다 줄 거라고 어느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그 노파에게서 카드 우편을 건네받는 순간 낯빛 좋던 정 회장의 얼굴이 떠오르며 묘하게 가슴이 저미었다. 배부른 권력자들, 기득권층들은 그들이 만들어 놓은 이 불공정한 시스템으로 얼마나 많은 노년들의 젊음과 시간을 탈곡해 가버린 것일까. 또 그들이 쟁취한 성공으로 얼마나 많은 동료들을 이 사회의 패자로 전락시켜 그 가슴에 아픔과 상처를 남겼을까.
그러고 보니 정 회장을 응대했을 때와 그 노파를 대응했던 내 모습은 사뭇 달랐다. 나 역시 돈과 권력을 위해 일하는 한 낱 자본주의에 속해있는 소모품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치솟았고 그 때문에 몇 번이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이 사회가 품고 있는 얼개의 모순을 들먹이기 전에 무의식에 숨어 있는 나라는 인간의 이중성에 이내 고개를 떨 꿔야 했다. 내가 움켜쥐고 살았던 그 위선적인 생각들이 한없이 부끄럽고 부끄러웠다. 이 탁한 생각으로 채워진 나를 어떻게든 게워내고 싶었다.
퇴근길에 리어카를 끄는 한 노파가 눈에 들어왔다. 뙤약볕 아래서 하루 종일 주워 담았는지 폐지 덩이들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리어카에 쌓여 있었다. 지친 기색이 역력한 노파는 끌다만 리어카를 세워두고 바닥에 주저앉아 막걸리를 병째 들이켰다. 붉은 태양의 잔상이 아직 남아 있는 저녁 하늘은 그의 신산했던 삶의 그림자를 길게 비추었다. 노년의 밥벌이를 위한 그의 혹독한 투쟁은 언제나 끝이 날까. 지금 내 눈앞에 벌어지는 일들이 기어코 남의 일이라고만 단정 지을 수 있을까. 씁쓸함이 마음 곳곳에 번져갔다. 그리고 정처 없이 뒤섞인 여러 감정들이 가을 낙엽처럼 후드득 떨어졌다.
정 회장의 실체는 이 전 편인 <모 기업 회장의 호텔 이용법> 글을 참고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