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이 선물; 고통과 상처
"오하요 고자이마스!"
"난다요! 오마에!(이게 뭐야 이 자식아!)"
"고노야로 빠가네!(이 새끼 바보 아냐!)"
호텔에서 근무할 때의 일이었다.
근무를 시작함과 동시에 일본 손님의 느닷없는 공격에 나는 적잖이 당황스러웠다. 그는 내 면전에 고함을 지르고 심한 욕설을 내뱉더니 끝내는 볼펜까지 집어던졌다. 얼굴을 간신히 비껴간 볼펜은 내 아래턱을 맞고 튕겨져 나가 바닥으로 굴러 떨어졌다. 그는 자신의 분노를 폭발시키는 듯했다. 얘기인즉슨 객실 키가 3번이나 오작동을 일으켰고 그에 그는 화가 단단히 났던 모양이었다. 쉴 새 없이 쏟아지는 그의 고약한 말들에 나도 감정이 격해져 갔지만 가슴팍에 단 명찰은 어금니만 꽈악 물게 했다.
그렇게 한바탕 소란이 지나갔다. 근무하다 보면 거의 일상에 가까운 흔한 일이었고 마음에 담아 두지 않으려 했다. 그런데 그날따라 그 잔상이 쉽사리 사라지지가 않았다. 터벅터벅 지친 발걸음으로 걸어가던 퇴근길에 내 직업에 대한 회의감이 큰 파도처럼 밀려왔다. 끊임없이 반복되는 온갖 수모와 설움, 소외감들 그리고 고객들의 안하무인적 태도에 염증이 느껴졌다. 내일이면 출근길로 변해 있을 이 퇴근길이 갑자기 두려워졌다.
그 날 따라 버스는 왜 그리 안 오던지. 애꿎은 버스 탓만 하다가 괜히 콧등이 시큰해졌다. 이게 다 뭔가 싶었다. 누군가 툭하고 한 마디만 하면 왈칵 눈물이 쏟아질 것 만 같았다. 또 이런 약해진 내 모습이 싫어 화가 나기도 했다.
버스 창가에 기대어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멍하니 상념에 젖어 있었다.
버스에서 내려 아파트 단지에 들어서자 키가 작은 어르신들이 기다란 장대를 들고 나무 주위를 빙 둘러 서 있었다. 무얼 저리 하시나 잠시 지켜보니 나무 가지치기 중이셨다. 어슷비슷 잘려나간 가지 뭉치들은 단지 길목마다 자리하고 있었다. 그 길목은 어르신들이 땀으로 빚은 노동의 현장이기도 했다. 얼마나 오랫동안 수목관리 일을 해오셨는지 알 수는 없지만 나뭇결만큼이나 숱한 질곡의 세월을 보낸 흔적이 까맣게 그을린 그들의 이마에 주름으로 새겨져 있었다. 이마를 빼곡히 채운 흙빛의 주름을 보는 순간 하루 종일 요란했던 마음이 조금씩 고요해지기 시작했다. 내 처지에만 눈이 달려 몸과 마음을 모두 빼앗긴 채 하루 종일 끌려 다니는 내 모습이 새삼 부끄럽게 느껴졌다.
도대체 언제 즈음이어야 할 까. 살아온 날들보다 살아갈 날들이 적게 남았다고 느껴질 때가 되어야 이 관성적인 감정의 전이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헛된 욕망, 오랜 집착, 자기 연민, 인정 욕구, 곤란 없기를 바라는 마음... 족쇄 같은 이 낡은 의식들을 대체 언제까지 달고 다녀야 할까.
숙연해진 마음을 움켜쥐고 떨어진 가지들을 뒤로한 채 집으로 향하는데 문득 궁금한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 자릴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이내 키 작은 어르신한테 다가가 물었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혹시 가지치기를 왜 하시는지 여쭈어봐도 될까요."
한 참을 기다려도 어르신은 답이 없으셨다. 바쁘신데 혹시 내가 방해라도 된 걸까. 머쓱해진 난 다시 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아 젊은이. 쉽게 말해 나무에게 이발을 해주는 거라네."
뒤를 돌아보니 그제야 어르신은 자신의 키보다 몇 곱절 긴 장대를 거두시고는 말문을 터주셨다.
"지나치게 길게 자란 가지나 난잡하게 자라난 가지를 잘라내서 나무가 더 예쁘고 튼튼하게 자랄 수 있게 도와주는 거네. 이렇게 가지치기를 해주면 나중에 그 부위에서 두세 개의 가지가 더 곧게 뻗어 나와. 그럼 나무가 더 풍성해지고 예뻐지지"
"아 그래요?! 그런데 어떻게 한 개의 가지를 잘라냈는데 그곳에서 두세 개의 가지가 나와요? 그 부분은 그냥 옹이가 지지 않고요?" 귀찮으실 법도 한데 그런 내 질문에 이윽고 어르신은 이렇게 답해주셨다.
''나무도 사람과 똑같아. 상처를 주면 아파하지. 가지치기도 일종의 상처 주기야. 가지를 쳐주면 나무는 그 자리를 아파해 그리고 생각을 하지. '이렇게 계속 가지치기 당하 다간 곧 죽겠다' 싶은 거지. 그럼 나무는 더 열심히 싹을 틔우고 가지를 뻗어내고 꽃을 피운다네. 죽기 전에 조금이라도 더 씨를 흩날리려고 말이야. 나무도 사람처럼 생존본능이 있다고 생각하면 되네. 결론적으로 두세 개를 만들어내는 건 나무가 살려고 발버둥 치는 거야. 잘려나간 자리에 가지가 돋아난 걸 자세히 보면 절박함과 간절함이 묻어 나와. 다른 가지보다 더 단단하고 색깔도 예뻐." 어르신은 전에 가지치기를 했던 곳을 가리키셨다. 예전에 잘려 나간 자리에 돋은 가지를 보니 정말 반들반들한 게 하늘을 향해 더 곧고 예쁘게 뻗어 나가는 게 눈에 보였다.
어르신은 말을 이어갔다.
"또 가지치기를 하고 나서가 더 중요해. 사람도 상처를 입으면 소독약을 발라주듯이 나무도 소독을 해줘야 해. 관리를 잘못하면 허약해지고 병충해 피해를 입어서 가지치기 한자리부터 썩어 들어가거든”
"아 그렇군요. 정말 사람하고 비슷하네요!" 나는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그런데 재밌는 게 뭔지 아나? 이렇게 가지치기를 안 해주면 나무는 잎도 대충 피우고 꽃도 잘 안 펴. 열매를 안 맺는 건 물론이고. 굳이 힘들게 꽃 피우고 열매를 맺지 않아도 나는 잘 살아간다 이거지. 그럼 그 나무가 나무로써의 역할을 하겠어? 과수원에서 나무가 열매를 못 맺으면 과수원 주인이 가만있겠냐고. 다 베어버리고 다른 나무 심어버리지. 아파트의 조경나무들도 시들해져서 조형미는커녕 방음, 방풍, 차폐 같이 제 역할을 못해내고 어설프게 존재하다간 결국 스스로 고사하거나 사람의 손에 잘려 나가 버린다 이거지.”
선사의 죽비 같은 어르신의 말씀에 나는 한동안 멍해 있었다.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상처와 고통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어쩌면 삶 자체가 고통의 연속일지도 모르겠다. 비록 상처와 고통에 속박되어 있지만 오히려 그것들로 인해 인간의 존재가치가 더욱더 명료해지는 건 아닐 까. 병마와 고독 속에서 마지막까지 삶의 불꽃을 태우며 인간의 모습을 보여준 니체도 '고통은 살아있다는 증거'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하루의 마지막 봄볕이 지천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무심결에 외면하고 지나쳤을 한순간을 노인과 나무를 통해 곱게 피워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