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지희 Aug 17. 2022

5-2. '좋아요' 100개의 무게

'좋아요'는 어쩌면 '슈가슈가룬'의 하트 같은 것이 아닐까.

  2020년 2월. 대학 생활 마지막 1년을 앞두고 복학을 하기 전, 으레 하던 대로 알바몬을 열고 아르바이트 자리를 찾기 시작했다. 코로나로 전 세계가 들썩거렸던 당시, 알바를 구하는 업장이 있기나 할까 걱정하던 중 내 눈을 사로잡은 알바가 있었으니 다름 아닌 칵테일바 아르바이트였다. 술을 잘 먹지는 못 해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살면서 꼭 한 번쯤 배워보고 싶은 것 중 하나가 바로 칵테일 만들기였다. 그런데 이 아르바이트를 하게 되면 돈도 벌고 칵테일도 배울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은가! 바로 이력서를 넣고 면접을 본 후 다행히 칵테일바에서 일할 수 있게 되었다.

  일하게 된 칵테일바는 꿈의 직장 그 자체였다. 일단 그 공간에서 함께 하는 모든 사람들이 너무 좋은 사람들이었다. 권위의식 없이 항상 알바생들 의견을 잘 들어주시는 사장님부터, 성실하고 유쾌했던 다른 친구들까지. 가게의 분위기도 좋았고 일하는 시간도 딱 적당했다. 여기에 더해 알바 시작 후 내게 부여된 첫 번째 임무가 직접 칵테일 만들고 먹기였다. 달달하고 상큼한 온갖 칵테일을 만들어 보고 심지어 내가 홀랑 마실 수 있다니... 그것도 이렇게 좋은 사람들이랑! 이게 꿈의 직장이 아니면 뭐가 꿈의 직장이란 말인가!


  칵테일 만드는 법, 안주 만드는 법, 손님들께 칵테일 추천하는 법 등. 칵테일바 아르바이트생으로 살아남기 위한 모든 기술을 익혔다고 생각했는데 아주 치명적인 문제가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당시가 '코시국'이었다는 것이다. 즉 내가 만든 칵테일과 안주를 먹어줄, 내 설명을 들어줄 손님들이 사라져 버렸다.


  결국 사장님은 결단을 내리셨고 그 결과, 우리 가게는 치킨과 감자튀김 배달을 시작하게 되었다. 출근해서 칵테일 레시피를 외우던 나는 어느 순간부터 닭을 손질하고 염지하고 튀겨서 양념을 입히고 있었다. 아늑하고 힙한 분위기를 뿜어낼 수 있는데 일조하던 '지하'라는 가게의 위치는 이제 튀김기가 내뿜는 매캐한 연기와 합심해 가게를 생지옥으로 만드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기름 범벅이 된 주방에서 넘어지기도 하고, 올림픽 날 두 개 중 하나의 튀김기가 고장 나 손이 안 보일 정도로 일해보기도 하고, 양념을 끓이다 그대로 방치해 둔 다른 알바생의 실수 덕에 하루 종일 웍을 닦기도 했던 내 2020년 아르바이트의 추억.

  언제까지고 기름 냄새를 풍기며 자리를 지킬 것만 같던 치킨집(?)도 2020년 12월 영업을 마지막으로 결국 문을 닫았다. 어쩌다 보니 나는 가게의 마지막을 지킨 일원 중 한 명이 됐고, 유종의 미가 주는 미화력은 실로 강력해서 이 힘들었던 날들도 다 소중한 추억으로 바뀌어 버렸다. 미화력을 차치하고 실제로도 좋은 추억이 많았다. 치킨 초벌을 끝내 놓고 시원한 레드락 생맥주에 테킬라 한 샷, 레몬즙을 넣어 먹던 데드락은 내 인생에서 가장 맛있었던 술 중 하나로 남았고 이 술을 함께 들이켰던 몇몇 사람들과도 아직까지 잘 지낸다. 손님이 없는 날이면 사장님과 함께 좋은 안주에 술 한 잔씩 하는 것도 그렇게 즐거울 수 없었다. 무엇보다 그 가게에서 일하면서 내가 많이 성장한 것이 느껴졌다. 다양한 아르바이트를 해봤지만 이 정도로 예상치 못한 상황을 마주한 건 처음이었다. 위기 상황을 누군가와 협력해 함께 헤쳐 나갔다는 그 뿌듯함과 가게에 완벽하게 적응해 치킨 마스터가 되어 버린 내가 꽤나 자랑스러웠달까.

  



  그렇게 머릿속 서랍장에서 내 인생의 썰들을 찾던 중 구석에서 조용한 목소리 하나가 공명했다.

  "칵테일바라고 해서 일하러 들어왔을 텐데 맨날 치킨만 튀기게 해서 정말 미안하다. 이게 취업사기가 아니면 뭐겠니..."


  대학가 칵테일바로 무려 10년 동안이나 굳건히 자리를 지켰던 가게의 정체성이 치킨집이라는 거대한 정체성에 패배하자 사장님은 매일 술을 드시며 저렇게 말하곤 하셨다. 그 당시에도 저 말을 들었을 때 내 아르바이트 인생이 꽤나 다이내믹하다고 생각했는데, 뇌리에 박혀버린 '취업사기'라는 네 음절이 결국 이번 시리즈물의 소재를 자동으로 확정 지어 버렸다.  




  그렇게 나는 지금까지 서술해 놓은 <칵테일바 알바 사기당한 썰>을 총 3부작에 걸쳐 연재했다. 그림을 어떻게 그려야 하나 걱정이 많았는데, 그림이라는 것이 참 오묘한게 계속 그리다 지우기를 반복하면 어느새 한 컷이 완성되어 있다. 당연히 '잘 그렸다'는 평가가 나오는 그림은 아니지만 적어도 각 인물을 구분할 수 있고, 그 인물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분별되기는 한다. 어수룩한 실력과는 별개로, 나는 이번 만화를 그리면서 내 지난 추억을 곱씹어 볼 수 있었고 또 이 추억덕분에 새로운 도전을 할 수 있음에 감사했다. 시원해 보이는 데드락을 그려보며 그라데이션을 조금이나마 자연스럽게 하는 방법을 습득했고, 잭다니엘을 그리면서 세밀한 그림을 그려보기도 했다. 이렇게 한 계단, 한 계단 성큼성큼 올라갈 수 있는 도전이 재밌었다.

  그렇다면 이번 시리즈 물의 목표였던 '좋아요' 100개는 어떻게 됐는지 궁금하실 텐데, (내 기준) 놀랍게도 이 숫자를 달성했다. '좋아요' 100개를 향해 차츰차츰 숫자가 올라가더니 어느 순간 100개를 넘겼고 이 글을 통해 유입된 독자들이 다른 게시물에도 '좋아요'를 눌러주는 기적의 메커니즘이 작동했다. 그리고 나는 내게 돌아온 100개 이상의 '좋아요'를 보며 이것들이 애니메이션 <슈가슈가룬>의 하트 같다는 생각을 했다.


  혹시 <슈가슈가룬>을 아시는 독자분이 있을까? 투니버스 전성기 시절과 초딩 시절을 함께 보낸 나에게 아직까지도 가장 생생히 기억나는 애니메이션을 고르라면 나는 단연 <슈가슈가룬>을 고르겠다. 내 동년배라면 한 번쯤은 봤을 애니메이션으로, 당시 나는 용돈 모아놓은 걸 이 애니메이션 코디 스티커 사기에 탕진할 정도로 좋아했다.

내 초등학생 시절 전설의 애니메이션 <슈가슈가룬>

  <슈가슈가룬>은 마계에서 인간계로 내려온 두 주인공, 쇼콜라(좌)와 바닐라(우)가 여왕 선발시험을 치르기 위해 좌충우돌 학교 생활을 하는 것이 주된 내용인 애니메이션이다. 인간들의 하트를 더 많이 수집한 사람이 차기 마계 여왕이 되는 시험인데, 내가 '좋아요'와 비슷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바로 이 하트다.

  

  이 애니메이션의 설정상 인간은 누군가에게 호감, 우정, 사랑 등의 마음을 품게 되면 그 마음에 해당하는 색을 가진 크리스탈 하트가 가슴 속에 생긴다. 그리고 그 감정의 대상이 마계인이라면 마계인 당사자는 주문을 외워 그 인간의 하트를 수집할 수 있다. 남학생들에게 인기가 많은 바닐라는 항상 '슈가슈가룬~ 바니룬~ 하트, 하트를 주세요~'라는 오글뽕짝한 대사와 함께 수십 개의 하트를 한 번에 얻고는 한다. 이렇게 얻은 하트는 여왕 선발 시험에서 자신의 재능을 증명하는 수단으로, 마계의 물건을 쇼핑할 수 있는 재화로, 얻기만 해도 기분 좋은 아름다운 물체로 기능한다. 그리고 이 애니메이션에 과몰입했던 어린 시절의 나는 이 하트가 참 갖고 싶었다. 쇼콜라와 바닐라가 한쪽 눈을 감고 다른 한쪽 눈엔 브이자로 펼친 손을 갖다 대면 인간들의 마음에 하트가 있는지 없는지를 볼 수 있었는데, 나는 마계인도 아닌 주제에 혹시나 다른 사람들 마음에 하트가 보일까 하며 그 동작을 참 많이도 따라 했었다. 하지만 마계인이 아니라서 그런지 내겐 단 한 번도 하트가 보이지 않았고 당연히 가질 수도 없었다. 소심하게 좌절감이 뭉게뭉게 피어났다. 나는 왜 마계인이 아니라 인간으로 태어난걸까, 한탄스럽기도 했다. 9살의 나는 <슈가슈가룬>에 그 만큼 진심이었다.

  다행히, 심각한 과몰입러에게도 시간이라는 약이 존재했다.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내 초등학생 시절을 찬란하게 채웠던 <슈가슈가룬>은 그저 추억의 애니메이션 중 하나로 내 기억 속 다락방에 자리 잡게 되었다.

  잊혀가던 하트가 문득 생각난 건 올해 처음으로 SNS를 운영하며 '좋아요'를 받기 시작했을 때였다. 관심과 공감이라는 형태의 붉은색 하트가 내 피드에 조금씩 쌓이는 것을 보며 2022년의 하트는 여기 있었구나, 깨달은 것이다. 내 창작물을 보러 온 사람들의 반응이자, 어떤 작가들에게는 수입과 직결되는 상징이자,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는 그것. 그것이 2022년의 하트였다. 사람들의 더블 터치가 만들어 준 '좋아요'를 통해 내가 얻은 감정은 어린 시절 <슈가슈가룬>의 하트를 보며 설레었을 그것보다 더 컸다. 얼굴을 마주하고 우정과 호감, 사랑을 나눈 사람들이 주는 에너지와는 또 다른, 불특정 다수가 내 창작물을 보고 호응해준다는 희열은 꽤나 무거웠다. 묵직한 '좋아요' 100개의 존재감이 실감 났다. 뭔가를 더 창작하고 싶었다. 후딱 펜을 들고 싶었다.  



  아홉 살이었던 나를 만나게 된다면 말해주고 싶다. "너 스물다섯 살 되면 하트보다 좋은 거 100개 모을 수 있다"라고 말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5-1. '좋아요' 100개의 무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