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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체 Nov 20. 2022

짠하다 : 키워드 '내핍耐乏'

궁窮함을 견디다

 아침 7시 반 탄종을 달리고 오는 길에 듣는  라디오.   내년은 '내핍耐乏'의 해가 될 거란다. 그래서 출연자 교수는 내년 키워드로 '내핍'을 꼽는단다. 오랜만에 듣는 말에 여러 덩달아 떠오는 말들이 있다.


핍진, 결핍, 궁핍, 핍박, 빈핍 ㆍㆍ  ㆍ


모자랄 핍


'갈 지之'자에 '한 일一'자 인지 '삐침 별'인지 하나만 얹혔다. 마음이 기운다. 다들 어렵다는데, 더욱 살기 어렵다는데 평평한 채 살아 민망하고 덧없어 맘 한쪽 가라앉는다. 없는 이들은 이미 내핍하고 핍진하여 느낌 없다. 부러 되돌릴 것도 없이 새해라고 더할 것 없이 한결스레 같다.


 겨울이 없는 이들 살기 힘들듯 세상 경기 안 좋고 물가 높고 실질소득 줄어 소비 가라앉으면 더 힘들다. 옆에 ㅂㄹ미용실과 ㄴㅂ떡집 ㅅ횟집 두부집 모두들 지금도 장사 안되어 매달 버틴다는데,  내년은 진짜 견디고 버티는 날들이 이어질 판이다.


 누구를 탓하고 지적하고 손들어 말할 겐가. 답답하고 어려운 약육강식의 세상, 대한민국. 무서운 일이다. 아이들은 태어나지 않고 부자들은  더 큰 부유를 실어가고 비정규직은 넘치고 원청,  하청, 재하청에 재하청의 먹이사슬 이어진다.


 괴랄怪辣한 나라에서의 삶이 참으로 억척시다. 다들 잘 견디고 버티어 언제 올 지 알 수 없는 밝고 찬란한 날들에 닿아야 한다. 홀로 잠자기 전 명상을 하고 아침에 달리고 하루를 바삐 흘려보내고 그러다 남는 자투리 30여 분의 시간엔 알차게 맨발로 공원을 걷는 그런 억척의 날들이 견디고 버티는 나만의 요령이고 요량이다.


 운이 좋아 생각이, 몸이 문득 평온에 닿으면 지금의 날들이 그 밝고 찬란한 날이 된다.


 세상은 온통 성공의  길과 떼돈 획득의 이치를 알리느라 바쁘다. 먹방과 육체와 축적. 먹방 시연과 육체의 활기와 부의 축적의 세상. 정신이 사라질 정도의 매혹적 정보들의 홍수를 건너는 세월. 잠잠하기 힘들고 모든 것에서 멀어지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


 그리하여 잘 살아가기 위해 더 견디고 버티고 아끼고 참아야 하는 세월이 온다는데 무엇을 하고 하지 말아야 하나 묻는 짠하디 짠한 십일월의 밤이다. 이것은 궁상인가 묻다 멈추고 토닥인다.  바꾸려던 노트북을 더 착실히 써보기로 한다. 가민 워치 업그레이드 욕심을 내려놓고 지금 가진  빨강도 고맙다고 쓰다듬어 본다. 책을 사는 횟수를 줄이기로 한다. 넘치는 러닝화의 숫자를 기억한다. 자전거를 본다. 웃음은 덤으로 가파른 등을 토닥인다.

지난 주말 들른 광장시장 전골목 넘치는 활기가 나를 살린다

  핍乏은 모자랄 핍이다. 완전한 바닥은 아닌 채 건너갈 수 있는 시절의 간격이 '모자랄 핍乏'이다. 삶이 언제 '모자랄핍乏' 아닌 '넉넉할 윤潤'이나 '가득할 만滿'이었던가. 끝내 바닥에서 피를 토하는 이들, 생각으로도 '짠하다'는 고통이 전해오는 그들은 핍진의 시절을 알고, 느끼고 건널까. 건너고야 보이는 벼랑의 직선이 있다. 한 발 한 칸 떨어진 이들은 절대 모를 것이다. 나도 그렇다.

쌓인 잎들이 흙이 되고 바람이 될 때까지는 기다리다 지친 푸른하늘의 꿈이 오롯이 잎들의 친구가 되었다 한다

 이제 겨울이다. 핍진乏盡의 시절들의 도래를 맞닥뜨린 채 웅크리고 있다. 겁낼 것도 무서워할 것도 갖지  아니한 채 무념 바라본다. 시절은 아프고 난 동시대의 하늘을 함께 지고 살아 걸어간다. 어깨 겯은 동무처럼 사람들의 힘이 필요하다, 나도 너도 그리고 이 마을의 나무들도. 떨군 스스럼 없이 가득 외로운 날들.


 살아진다는 것은 필시 견딘다는 것이리.

 고요의 강물 아래 요동치는 흐름에 떠밀리지 않게 발톱 손톱 온몸으로 버티고 선 화강암 자갈처럼.  영광도 호기도 어느 펄럭이는 깃발도 무릅쓰고 견딘 아,  저 노년의 핏빛 바랜  고운 주름처럼..


 살아진다는 것은 나중의 회상

 지금은 절벽에 붙은 사선의 소나무

 그리하여  지금 미친 듯이 달리는 푸른 산양

 살아있자 하여 아름다운 날들

 돌아보면 생生이 우러러 빛이 되어 있으리


  내핍의 세월을 건너서 닿은 강언덕에 푸릇푸릇 초록 풀빛 내려앉은 봄날의 오후 세 시는 누구에게나 있다. 아무것도 아닌 날들이 쌓인다. 건너는 길이다. 건너 바라보면 다시 돌아가기 무섭다. 어쨌든 삶은 지나가고 있다. 고마운 일이 지나가고 있다며 믿고 건넌다. 강언덕에 앉아 볕 지기를 기다린다. 저녁은 오고 별은 빛나리라. 또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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