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괜찮아,라고 쓰는데 자꾸 '다' 괜찮아,라고 써진다. 습관의 힘일까. 마음도 다 괜찮아,에 익숙한 걸까. 감히, 다 괜찮아라고 말해본다. 아니, '더' 괜찮아. '더' 괜찮다.
지난 9월 28일
새벽 다섯 시
알람에 주저 없이 일어났다. 지난 주말 간청소하느라 미뤄둔 20킬로 장거리 훈련을 하는 날이다. 간단히 씻고 물을 여유 있게 마시고 파워젤 4개와 물병을 챙기고 가방 메고 탄천 종합운동장으로 향했다.
다섯 시 반
길은 어두운데 주차장엔 차들 많다. 수영, 탁구, 체조에 참여하시는 분들이많나 보다. 날은 생각보다 푹하다. 실내 트랙 지나 화장실 들렀다 트랙에들어서니 같은 크루의 에이스급 동료들 예닐곱이 벌써 워밍업 마치고 질주하고 있다. 슬슬 몸을 달래고 신호를 보낸다. 오늘은 21.2킬로 하프 달리는 날이야, 잘 해낼 수 있어, 잘해보자, 다독이며 속삭인다.
다섯 시 사십오 분출발
가장 바깥 레인에서 달린다. 400미터 트랙 맨 우측 8 레인은 450미터다. 처음 시작은 50미터 앞서서 표시된 자리에서 출발해 랩 체크는 골인지점에서 눈으로만 하고 다시 랩타임 누르는 건 시작점에서 한다. 400미터 한 바퀴 2분 10초 450미터 랩 체크 지점은 2분 30초 안팎. 이렇게 달리면 얼추 1킬로당 5분 30초. 오늘의 목표는 한 바퀴 2분 30초 이내 통과다.
어느새 10킬로가 지나간다
파워젤을 먹는다. 진하고 달고 후끈 신호가 온다. 앞서 훈련하던 팀도 반가운 응원의 인사를 남기고 떠난다. 곧바로 6시경부터 늘 트랙을 와서 천천히 달리시는 키큰 할머님 오셔서 달린다. 한 30여분 지나면 거꾸로 뒷걸음질 걷기를 하실 게다. 또 한 젊은 여자분이 트랙 밖을 걷는다. 빠르고 절도 있게 꼿꼿이 걷는다. 할머님이 뒷걸음질 걷기를 시작하고 부부가 도착해서 1 레인을 달린다.
15킬로가 지나간다
두 번째 파워젤을 먹는다. 한 바퀴를 돌며 끝까지 짜고 눌러 깔끔하게 마저 먹는다.고등학생들 다섯과 선생님 둘이 트랙을 달린다. 전력질주를 하고 출발선 근처에서 풋워크를 한다. 아마 복싱부 학생들처럼 보인다. 골인의 시간이 다가온다. 모두 사라진 채 홀로 트랙을 열 바퀴쯤 달린다.하프가 끝났다.
가장 행복한 시간이다. 마치고 천천히 '쿨다운'. 걷지는 않는다. 달리지도 않는다. 다독인다. 모두 돌아간 자리, 혼자 숨을 고르며 다시 숨을 돌아오게 선다. 평이하고 수월한 숨소리 온다. 달리며 오래 뱉어낸 기도를 살피고 하늘 바라보는 길. 길은 언제나 나의 발에 평등하고 공평하다. 잘 마쳤다고, 애썼다고, 그러하다고, 고맙다고. 일렁이던 마음속 잘 가라앉았다고 인사한다.
남은 것은 기록이다. 잔인하게도 몸은 오래 기억하지 못한다. 잦을수록.
10월 8일 토요일 저녁
10월 9일 동아마라톤 하프
대회참가 접수를 했는데, 배번표랑 기념품도 진즉 도착했는데 갑자기 아내 가게에 주일 오전 단체 주문이 생겼다. 일하라 두고 혼저 달리러 가기 미안했다.
대회는 안 가더라도 미리 토요일 저녁에 달리기로 한다. 황새울공원에서 출발해 서울공항 끝나는 지점 어름까지 다녀오는 코스로 택했다. 파워젤 3개에 급수는 최소한의 물 '한 모금'만 공중화장실에서 해결하기로 한다. 아내랑 몇몇 지인들과 서현 단골 쌀통닭집에서 두어 시간 뒤 만나기로 하고 시작한다. 가벼운 워밍업 마치고 달린다.
사람 많고 어둡다. 지난 폭탄 쏟듯 했던 물난리와 태풍 '힌남노'에 끊긴 전선들과 가로등 정비가 아직도 복구되지 않았다. 성남시도 느릴 때가 있다. 천변이 심하게 어두워 발끝이 예민하고 착지에 긴장이 서린다.
만나교회 지나니 호흡 편코 몸이 가벼워진다. 다리 밑에서는아마추어 가수들이 노래를 한다. 빈틈없이 아마추어다워 신난다. 음 높고 만만히 소리를 지르고 박자는 좋다. 10킬로 지나갈 때 파워젤 먹고 화장실에 들른다. 반환점이 다가온다. 서울공항 도로변 땅에 붙은 전등은 밝고 환하다. 산책하고 달리는 주민들에 더해 비행기들의 안전도 겸하여 보호하는 장치일 것이다.
반환점을 돌아 이제 오는 길은 가볍게 푸득인다. 날개처럼 팔을 치고 발을 올린다. 항상 반환점까지는 오직 '하나님 하나님 감사합니다'만 반복하여 되뇐다. 길고도 간절한 깊고 낮은 호흡이 열 한 글자를 수없이 반복한다. 처음 뱉는 언어처럼 간곡하고 강고하게.
반환점은 열 개의 기도를 남겨놓았다는 뜻이다. 1킬로에 한 제목, 혹은 한 사람을 위한 기도다. 11킬로 지점은 아내, 그다음엔 큰 아이, 그다음엔 둘째. 그리고 그리고 그리고.
간절한 것들은 반복되어도 새롭다. 달릴 때마다 반복하고 되뇌어도 언제나 처음처럼 낯설고 새롭고 치열하다. 간절함은 무엇에 닿고 무엇을 이루고 남기는 것일까. 아는가. 간절함이 얼마나 허망한지, 그리하여 날마다 길에 설 때마다 울부짖어도 새로워 또 앞세우고 기도한다. 기도하고 기도해도 매번 채우지 못한 헛헛함으로 멈추는 것들. 믿음이 약한 자들이어.
엄마의 새벽도 이 간절함을 바닥에 놓고 매일매일 세우고 다시 세우고 빌어온 것임을 이제야 본다. 아무리 힘을 다해 이름을 놓고 기도를 해도 채워지지 아니함을 어찌하는가. 다시 길에 서서 달리고 새벽 깃을 세워 일어나 무릎을 꿇는가. 간절함의 태도가 나를 달리게 한다. 엄마들의 새벽 기도도 그 언어가 아니다. 그 배고픈 잠의 시간을 돌려세워 일어나는 그 자세가, 그 시간이 간절함을 채우는 기도다.
혼자 퍼득퍼득 발과 팔과 숨의 리듬을 얻어 타고 달린다. 피와 혈관들의 화려함과 분주함이 보일 지경이다. 생생하고 파릇파릇한 돌기들과 혈기들. 평화롭고 자애로운 몸과 영혼의 균형 잡힌 시간이다. 15킬로 넘어서면 거리낌 없이 자못 팽팽하여 마치 다 올라 정상에 서서 나부끼는 바람의 내음 맡는 듯 호기롭게 발 들어 옮긴다.
끝났다. 21.2킬로미터.
황새울공원 화장실에서 얼굴을 씻고 고글을 닦고 머리칼에 스민 땀들을 비워낸다. 평온한 손이 얼굴을 닦아준다. 간절함으로 숨을 보태왔다. 길들도 더불어 기도를 받쳐준다. 누구도 이 기도의 무게와 간절함의 깊이를 헤아리지 않는다. 하나님도 되묻지 아니한다. 네 길 위에 잘 달렸으면 되었다. 애썼다. 잘 될 것이다. 그럼 됐다. 그치?
치킨집에 가벼운 수다와 맥주 한 잔을 넘치게 부어주고 돌아오는 밤길. 둥그런 달 따라오며 토닥인다. 좋으라 한다. 좋으라 하며 등을 대주는 푸른 꿈들에게 사랑한다고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