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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체 Oct 08. 2022

실감實感하다  :  다섯 글자 두 글자

엄마의 필적筆跡과 가을의 엄습

  엄마가 없다. 엄마가 사라졌다. 엄마가 죽었다. 엄마가 전화하지 않는다. 엄마를 볼 수 없다.


 작은 떨림이다. 이것은 자각. 알고는  있지만 몸과 마음에 매달려 있지 않아, 매양 머리에 이고진 감정과 인식이 아니므로, 입술로 말하고 되뇌어 반복하지 않으므로,  이것은 삶을 훼방하거나 해코지하지 않는 비켜 선 위치다. 살아야 하고, 살아 있어야 하므로. 어느 순간 '문득'이나  무엇의 충동에 의해 벌컥 다가와 무너뜨리려 한다. 현실 인식. 이를 '현타'라 하던가.


 비타민C  찾다 서랍 속에서 오래된 통장을 찾았다. 엄마의 글씨. 다섯 글자 '집안 계 통장', 작은 목도장 견출지 붙은 나의 이름 두 글자 'ㅂㅎ'. '집안 계 통장'의 '계'자가 '게'로 보이기도 했다. 엄마의 글씨다. 엄마다. 엄마가 아니다.

굳이, 엄마의 글씨는 엄마가 아니다,라고 토닥이며 서 있다.

 두려운 것은 하필 가을이라는 일이다. 안 그래도 심간(心間)은 스물이 넘어서부터 빈틈없이 해마다 가을을 엄숙하고 처절하게 온몸으로 치받아 제낀다. 몸이 여지없이 먼저 반응한다. 각질이 일어나고 눈꺼풀에 눈곱 아닌 작고 가벼운 꺼풀들 다. 목이 칼칼하고 전에 없던 피로감이 무거운 이불처럼 온다. 가을이 온다고,  늘 그래 왔듯이 잘 맞으라 한다.


 몸에 이상 징후들이 생기면 며칠 후 마음에 반응이 온다. 무기력 진지함 침묵 식욕부진 늘어짐 집콕.


 오로지 과다한 걷기와 달리기로 몸부터 달래고 맘과 영혼 살살 문지르고 홀로 두면 돌아설 것이라며 태연한 척한다.

벤자민 화분갈이를 했다. 엄마 베란다가 아님으로 하여 다른 벤자민 되기를  기대해도 될 것인가, 기대해도 되는 것인가. 화사한 토분이 자못 촌스럽다. 잘 골랐다. 다행이다.

 가을이다, 하필 가을이다.

 엄마 없는 추석처럼 엄마 없는 가을도 한 번은 지나야 할 작은 언덕. 달리다 보면 애써 기대하기도 한다. 언덕. 넘었을 때의 그 기쁨과 내려갈 때의 통통거림, 그 발랄 때문에 언덕이 보이면 애써 좋은 척한다. 삶에서 언덕들과 벼랑과 험지들이 얼마나 많겠는가. 감정은 순간이어서 돌아서면 또 멀고 희미해진다. 그것 또한 다행이다.


 엄마의 글씨 하나에 온통 엄마의 부재를 실감한다. 다시 돌아오는 평범과 일상이 구부러지고 고꾸라진 감정을 내버려 두지 않는다. 이 또한 다행이다. 실감 나지 않는 일들이 실감 나는 즉물(卽物)의 시간. 고이 바라본다. 멍, 멍, 멍하니 눈을 감고 흐느끼는  시간이 지나간다. 종이 울리듯 알람 진동이 퍼덕거리면 수업이 시작된다. 나의 30년 사교육은 빈틈이 없다. 아이들은 시간에 맞춰 도착한다. 어김없이 중간고사는 시작되고 시험 결과는 나를 압박한다. 흐느끼는 슬픔의 실감은 생계와 밥벌이의 살벌한 실감 속에 움츠러 잦아든다. 이 또한 다행인가.


 엄마의 필적을 만진다. 잡히지 않을 흔적을 담는다. 눈과 귀와 입술에 고이 담는다. 검은 네임펜의 흘림체 자국은 단호하고 똑 부러졌다. 30년 된 통장 겉싸개 비닐은 빳빳하여 살아있다. 엄마의 손끝 닿았다 놓인 가운데 기운 자리 하나에 손때 묻었다.

통장 뒷면에 '집안계' 적혔다. 볼펜 꼬옥 눌러쓴 엄마의 손가락 고스란히 보인다.

 엄마, 종부(宗婦)로서 '집안계통장' 간수와 재촉과 굳은 신념으로 버틴 십여 년의 고생으로 고조부 증조부 무덤에 세운 비석들은 아직도 건재하다. 해마다 벌초를 하고 해마다 돌아보고 흐트러진 봉분과 기운 석대들을 잡아준다. 늙고 늙어가는 작은 손들이 매만진다. 그 손도 이제 거의 없다. 철마다 해마다 앞서 챙기던 엄마 떠난 조상들의 자리는 아래 한 켠, 엄마 자리가 되었다.  엄마의 '집안계통장'은 그렇게 흔적을 남기고 엄마를 그 자리로  데려갔다.


 가을이 왔다. 실감 나지 않는 일들의 실감實感이 잦으면 무뎌져 그 실감도 일반이 되고 '일상'이 되려는가. 가능하련가.


 엄마는 가고 가을이 왔다. 하늘 높고 갈바람 불어오는 가을이 왔다. 무담시 산책길에 상수리나무 갈참나무 도토리들 투둑 툭  투둑 툭툭 떨어진다. 길에 내내 떨어지고 떨어진다. 어디로 가려고 그토록 거세게 도토리 알밤들은 떨어지는 것일까. 엄마는 가고 가을이 왔다.

어쩌자고 가을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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