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 전 서울의 모습을 생생하게 보는 기쁨
지금부터 약 100년 전 서울은 100년 후를 상상해서 비교하는 것보다는 당연히 훨씬 쉬운 일이다. 격변의 역사를 지나온 우리에게 그때의 서울은 그저 일제강점기 아래의 고통스러운 삶을 지레짐작해서 상상하면 된다. 3·1 운동 직후에 썼다는 이 소설은 독립운동의 실패에서 온 패배감과 무력감도 어느 정도는 저변에 깔려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시험 대비로 어릴 때 읽었던 내용은 모두 잊은 채) 좀 더 암울한 이야기를 예상하게 된다.
그런데 의외로 소설을 통해 보게 되는 당시의 삶은 지금의 우리와 많이 다르지 않다는 것에 놀라게 된다. 일단 삼대에 걸쳐 가장 큰 갈등의 축이 되는 돈에 얽힌 문제들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친숙한 주제인데, 제인 오스틴이 성공적인 결혼을 통해 눙쳐 버린 문제들을 여기서는 매우 현실적으로 드러내고 있기 때문에 더 사실적으로 느껴진다.
자신이 일궈놓고 지켜놓은 막대한 재산을 가문의 정통성을 스스로 만들어가면서 지켜내려는 조의관은 전시대를 계승하는 대표자이면서 굉장한 현실주의자다. 그의 가부장적 힘은 전적으로 돈으로부터 나오는데, 아들인 조상훈은 그 힘을 고스란히 물려받을 의지가 없다. 2년 동안 미국 유학을 다녀온 조상훈은 아버지의 가치관을 물려받지 않으면 경제권을 쥘 수 없음에도 기독교인의 정체성을 유지하려고 한다. 아마도 새로운 가치관으로 새로운 세계를 꿈꾸었던 것 같은데, 그게 여의치 않아 보이니 아무것도 책임지지 않고 술과 여자와 아편으로 쉽게 도망가 버린다.
그에 반해 일본 유학을 하고 있는 손자 조덕기는 상황을 좀 더 객관적으로 보는 인물이다. 조부처럼 전적으로 현실주의자라고 할 수도 없고, 아버지처럼 이상주의자라고 할 수도 없는 인물이라서인지 매사에 온순한 태도를 보이는 인물이다. 그래서인지 가장 현대적인 인물로 느껴지기도 한다. 굳이 갈등 상황을 만들지 않으면서 자신에게 보다 유리한 결정을 하는 현명한 인물이랄까. 다만 아내에게 하는 행동은 그다지 현대적이지 않다는 것이 한계이다.
아무튼 1930년대 서울의 젊음은 조덕기를 축으로 하고 김병화, 홍경애, 필순이를 비롯해서 김의경과 수원집도 포함시킬 수 있을 것이다. 가문과 재산을 지켜나가야 하는 조덕기와 독립운동을 하는 김병화, 잘못된 선택의 책임을 지고 있지만 독립적인 홍경애, 고무공장을 다니며 부모를 봉양하면서도 더 나은 미래를 꿈꾸는 필순이와 같은 인물들과 함께 첩이 되어서라도 일신의 안녕을 꾀하려고 하는 수원집과 김의경이 동시에 살아가는 사회인 것이다. 이렇게 정리해서 놓고 봐도 지금 우리들의 모습과 많이 다르지 않다. 심지어 수시로 음식 배달을 시켜 먹는 문화까지 비슷하다.
이 소설을 통해서 식민지였던 100년 전 서울의 인간군상과 삶의 모습들이 낯설지 않고 여전히 동질감을 느낄 수 있다면 작가가 그들의 모습을 생생하게 잘 보여준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면서 동시에 드는 생각은 100년 후 서울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이 지금의 소설을 보면서 지금과 같은 공감을 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도 생겼다. 어쩐지 100년 후의 모습은 예상 밖의 모습들이 펼쳐져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이 책을 통해서 근대와 현대를 관통하는 문화적 동질성이 예상보다 크다는 사실을 새롭게 발견하게 된 것이 뜻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