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에게 품는 지독한 환상들의 향연
어른이 된다는 것은 막연히 동경하면서 상상 속에서만 키워가던 대상의 실체를 알게 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 과정에서 어린 시절에 품고 있던 아름다운 이미지들과 색채들이 무참히 깨어지기 때문에 우리는 아쉬움이나 서글픔을 느끼게 된다. 어쩌면 사실을 알게 되는 과정이면서 다른 단계로 나아가서 또 다른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그 변형이라는 것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굴곡이 일어난 것이기도 하기 때문에 그런 안타까운 마음을 갖게 되는 것이다.
게르망트로 이주한 마르셀이 어린 시절부터 막연히 동경해 온 게르망트의 세계에 본격적으로 발을 들여놓게 되는 이 이야기는, 마르셀 자신이 변해버린 감정에 대해 직접적으로 안타까움을 드러낸다기보다는 소설을 읽는 독자가 마르셀을 보면서 그런 감정을 느끼게 된다. 물론 마르셀도 간접적으로, 처음 라 베르마를 들었을 때 기쁨을 느끼지 못했던 것이 “지나치게 큰 욕망을 품고 다가갔기 때문”이라고 말한 것처럼, 그가 게르망트 사교계에 대한 감정도 그런 변화를 겪으리라는 것을 미리 예고하고 있기는 하다.
어쨌든 마르셀의 마음은 “알지도 못하는 유명 연극배우를 보려고 배우들이 나오는 문 앞에서 ‘오랫동안 서서 진을 치는’ 극성팬들이나, 감옥 혹은 궁정 안쪽에서 무슨 소리가 들릴 때마다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것 같은 죄수나 위인에게 욕을 퍼붓거나 갈채를 보내려고 기다리는 격노한 또는 심취한 군중도, 그때 이 귀부인의 출현을 기다리면서 내가 느꼈던 감동은 느끼지 못했으리라.”(96쪽)하고 말할 정도로, 게르망트 부인으로 향하는 그 동경으로 인해 삶에 대한 애정까지도 솟아나는 걸 느끼게 된다.
그 맹목적인 마음은 당연히 과한 구석이 있어서, 부끄러움도 느끼지 못하고 생루에게 게르망트 부인을 만나게 해달라고 머리를 굴리는 걸 보면 오히려 독자가 얼굴을 붉히게 된다. 하지만 생루 또한 상대의 진실한 모습을 결코 보지 못하면서 연인 라셀에 대한 사랑에 가슴앓이 하고 있기 때문에 둘은 비슷하면서도 조금씩 다른 모습으로 우리에게 안타까운 마음을 갖게 한다. 그러는 동시에 즐거운 기분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런 시절과 순간을 지나온 사람이라면 아마 두 가지 감정이 동시에 생길 것이라고 생각한다.
환상의 세계를 향한 동경의 마음을 품고 있던 사교계에 막상 들어갔을 때 마르셀이 보는 것은, 그동안 키워왔던 환상이 충족되는 곳이 아니라 그 환상이 깨지면서 들어선 실망의 자리에 속속들이 채워지는 실제의 다양한 모습이다. 사교계의 허상일 수도 있고, 여전히 선망의 대상이 될 만한 귀족들의 우아한 자태일 수도 있고, 문화와 예술에 대한 수준 높은 심미안이면서 동시에 실망스러운 지식일 수도 있다. 그런 모든 모습을 품고 있는, 대단해 보이기만 하던 귀족들의 모습을 통해서 마르셀이 우리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것은 그들도 동일한 인간의 얼굴을 하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아마도 이 소설을 관통하는 주제는 소설 전반부에 나온 이 대목에 모두 담겨있는 게 아닐까 싶다.
“나는 프랑수아즈가 나를 좋아하는지 아니면 싫어하는지를 직접적으로 확실히 알 수 없음을 깨달았다. 이렇게 해서 프랑수아즈는, 인간이란 내가 생각했듯이 장점이나 결점과 계획, 우리에 대한 견해를 가진 명료한 부동의 존재가 아니라(울타리 너머로 온 화단이 내려다보이는 정원처럼) 우리가 결코 꿰뚫고 들어갈 수 없고 직접적으로 인식할 수도 없는 그림자이며, 이런 주제에 대해 말과 행위의 도움을 받아 만들어 내는 믿음은 각각 서로에게 불충분한 데다가 모순투성이 지식만을 제공할 뿐이며, 우리는 이런 증오와 사랑이 번득이는 그림자를 마치 진실인 양 번갈아 상상한다는 것을 내게 가르쳐 준 최초의 인간이었다.”(10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