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을 통해서 음악을 느끼고 싶다면
첫 문장이 세 페이지에 걸쳐서 계속 이어지는데, 그 한 문장 속에 두 주인공인 아슬레와 알리다에 대한 중요한 정보가 다 들어있고, 그 문장 하나만 읽고서도 모든 이야기를 다 읽은 듯해서 더 이상 궁금하지 않은 것 같은 기분이 드는데, 묘하게 계속 읽게 되는 것은 아무래도 끊이지 않고 이어지면서 리듬을 느끼게 하는 문장 때문인 것 같기도 하다. 그런 문장을 계속 읽고 있다 보니, 작가의 리듬을 따라가고 싶어서 내 문장도 그걸 흉내 내고 있다.
부모가 열여섯 살 무렵에 모두 죽고 아버지의 바이올린 하나 물려받은 아슬레와, 집을 나간 아버지를 닮아서 어머니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알리다는 서로의 상처를 보듬어줄 수 있는 잘 어울리는 커플이다. 아슬레와 알리다는 바이올린을 통해서 과거와 미래의 노래를 듣게 되며 자신들의 삶이 모두 “운명 지어진 것이며 그렇게 되어야 하는 것임”을 안다. 그러므로 그들은 주어진 삶에 저항하거나 애써 부정하지 않고 순순히 받아들인다.
가난하고 평범한 사람들의 삶 속에서 자주 발견할 수 있는, 체념의 다른 얼굴처럼 보이기도 하는, 운명을 감내하는 모습들을 두 주인공에게서도 볼 수 있다. 그런 모습에서 평범한 우리의 마음을 건드리는 것을 더 많이 볼 수 있는데, 때로는 우리가 외면하고 싶었던 삶의 얼굴이기도 하다.
그래서 감정이 드러나지 않는, 담담하고 분절된 대화 사이에서 우리는 처연한 슬픔을 느끼게 된다. 많은 것을 억누르면서 살아가야만 하는 사람들이라면 행간의 의미가 무엇인지 더 빨리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한 번도 제대로 된 욕망을 품어본 적이 없고 이뤄본 적이 없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그러므로 두 주인공에게는 서로가 가장 의미 있을 수밖에 없고, 그 외의 가치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아슬레가 살인을 저지른 것처럼 보이는데, 그의 범죄가 큰 무게를 가지지 못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둘에게는 언제나 죽음이 가까이 있으므로 그 또한 하나의 이유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죽음과 얼굴을 맞대고 그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하고 외롭게 살아야 하는 둘은 엄살을 피우지도 않는다. 사실 엄살을 피울 대상이 없기도 하지만 투덜거리는 사람은 여느 때고 투덜거린다. 오히려 삶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그들의 모습은 당당하게 느껴진다.
그들에게 유일한 낙은 바이올린으로 상징되는 음악이 아닐까. 그들이 연주하는 음악과 작가가 마치 연주하듯 써 내리는 문장은 자연스럽게 어울려서 하나의 작품으로 완전히 조화를 이루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