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으로 듣는 음악
솔직히 밝히자면 앤솔로지를 그리 선호하지는 않는다. 주제에 따라 엮은 책에서 각 작가의 개성과 장점을 포착해 내기에는 내 역량이 한참 부족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한 작가의 글을 적어도 책 한 권에서 모두 읽어내야 그 작가만의 색깔이 보일 수 있다고 믿었고, 그것이 조금 더 진정성 있게 한 작가를 읽어주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오기도 했다. 게다가 앤솔로지 안에 묶여있는 작품들 중에서 마음에 드는 한두 작품 때문에 나머지는 상대적으로 저평가해서 그 작가의 작품을 더 이상 찾아보지 않게 되는 일이 생기기도 했다. 한 마디로 불호 쪽으로 분류한 작품의 작가에게는 편견을 갖게 되는 나쁜 버릇이 있어서 앤솔로지는 되도록 읽지 않는 편이다.
하지만 이 책은 이미 알려진 쟁쟁한 작가들의 모음집이다. 주제가 음악이라니, 거부할 수 없는 유혹의 앤솔로지다. 언어로 풀어내는 음악은 음악 자체와는 또 다른 매혹을 품고 있다고 생각해 왔고, 눈으로 듣게 되는 음악은 음악에 대한 감각을 더 증폭시켜 준다고 생각한다. 와인이나 초콜릿의 맛을 볼 때도 그 음식이 품고 있는 맛에 대해 섬세하게 설명을 해주는 것을 듣고 난 뒤 맛을 보면 훨씬 더 많은 맛을 느낄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언어가 동반된 감각은 그 감각을 제한할 수도 있지만 모르던 감각을 끌어내기도 한다고 믿는다.
아주 오래된 팝송인 「러브 허츠 Love hurts」를 알던 사람도, 혹은 모르던 사람도 김애란의 <안녕이라 그랬어>를 읽고 나서 노래를 들으면 기존의 감각과는 다른 느낌으로 이 노래가 다가온다는 걸 알게 된다. 살면서 겪게 되는 수많은 이별 앞에서 우리는 언제나 크고 작은 상처를 받게 되고 당혹감을 얻게 되는데, 김애란 작가는 이 노래에 그 감정을 정말 잘 입혀두고 있다. ‘안녕’이라는 단어는 반갑다는 인사도 되고 헤어지는 인사도 되는데, 언제든 다시 만날 수 있다는 전제 속에서 말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에는 분명한 차이가 발생한다. 그러므로 작품 속 화자는 영원한 이별을 해야만 하는 사람에게는 평안을 빌어주는 ‘안녕’을 말하게 되기를, 마치 외국어를 처음 배우는 사람처럼, 수많은 말을 품고 그저 안녕이라고 말하게 되기를 바라고 있다. 소설의 서두에 헌수와의 대화에서 이미 그 소망을 품고 있다. “평소 자기 고통을 남한테 잘 표현 안 하는 사람이 부르는 이별 노래”처럼, 어른처럼 그렇게.
김연수의 <수면 위로>에 나오는 드뷔시의 「달빛」은 기진이 엄마를 떠올리게 하는 음악이다. 그리고 기진이 죽고 난 뒤에는 화자가 기진을 떠올리게 하는 음악이 된다. 그리고 묘하게 맞물려 있는 기억은 그 음악이 오므라이스를 떠올리게 한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이 소설은 유튜브 영상도 상상하게 만든다. 글자를 읽으며 맛과 소리와 영상을 동시에 모두 떠올리는 것을 의도하고 있는데, 그건 마치 좋고 싫음이 동시에 한 곳에 있을 수 있는 삶의 속성처럼 보인다. 살기 싫으면서 살고 싶은 마음, 인생이 지긋지긋한데 무언가를 놓쳐서 다시 살아야만 할 것 같은 그 마음, 숨을 쉴 수 없어서 숨쉬기를 그만두고 싶은 동시에 제대로 숨 쉬고 싶은 그 마음 말이다. 모순된 자기 생각 안에 갇혀서 ‘수면 위로’ 올라가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한 발 떨어져서 자기를 볼 수 있는 계기가 필요한 게 아닐까.
윤성희의 <자장가>는 갑작스러운 사고로 죽게 된 고등학생 딸이 혼자 남은 엄마를 위해 엄마의 꿈에 들어가 자장가를 불러준다는 내용이다. 한 번 쓱 읽고 나면 어디선가 많이 본 것 같은 기분이 드는 소설이라서, 마치 익숙한 자장가를 다시 듣고 있는 느낌이다.
은희경의 <웨더링>은 본격적으로 구스타프 홀스트의 『행성』이 중심 소재로 등장하고 클래식 음악계에 있는 기욱이 주인공으로 나오면서 “음악소설집”에 걸맞은 소설에 대한 기대감을 증폭시킨다. 기욱이 기차에서 만난 인물들도 홀스트의 음악과 연결이 되는데, 옆자리에 앉은 노인은 홀스트의 악보를 눈으로 보면서 음악을 듣고, 대각선 자리에 앉은 인선은 남자친구와 처음 음악회에서 들었던 음악이 『행성』이었고, 건너편에 앉은 준희는 노인이 보는 악보로 인한 호기심으로 인해 그 자리에서 그 음악을 듣는다. 음악은 그날의 날씨와 그곳에 있던 사람과 그 순간의 감정들을 연결해주고 있어서 이 소설에서 음악의 역할은 지대하다. 어쩐지 아쉬운 점은 음악의 스케일이 우주적인 만큼 소설의 범주도 조금 더 넓고 컸으면 어땠을까 하는 것인데, 단편으로 그것을 담아내기에는 어려웠을 것 같다.
편혜영의 <초록 스웨터>는 사실 음악의 비중은 미미하다. 죽은 엄마가 짜다가 만 초록 스웨터를 마저 짜주면서 화자의 빈자리를 채워주는 사람들, 혈연으로 연결되어 있지는 않지만 초록색 실로 연결되어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지금은 혈연으로 이어진 공동체보다는 헐거운 듯 보이지만 실처럼 연결되어 있는 어떤 가느다란 공동체가 더 의미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하게 만드는 이 소설은, 음악으로만 본다면 오래된 카세트테이프 안에 들어있는 음악처럼 연하고 바랜 그리움과 같은 느낌이다. 아마도 음악소설집 안에 들어있지 않았다면 조금 더 따뜻하게 빛나지 않았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