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삶에 대한 깊은 성찰
여기 어느 황량한 마을이 있다. 계절은 언제나 혹독함을 안겨주고, 딱히 내세울 만한 것이 없는 세상과 동떨어진 마을이다. 마을 사람들은 방직 공장에서 일하며 하루하루를 연명하며 살아간다. 매일매일이 똑같이 흘러가서 구분되지 않는 날들을 살아가는 중이다. 무심한 듯 살아가고 있긴 하지만 한편으로는 생존을 위한 지난한 싸움을 하고 있는 중이고, 매일 매 순간 살아남기 위한 일을 하며 버텨내는 중이다. 문득 그 싸움 한가운데에서 멈춰 서서 삶의 가치에 대해 생각해 보면 아무 가치가 없거나 미천해 보인다.
“죽을 힘을 다해 노력해도 내가 처한 상황이 나아지지 않으면, 영혼 깊숙한 곳에서부터 나 자신이 결국 가치 없는 인간이라는 자괴감이 밀려오는” 법이다. 소설의 배경은 어느 작은 마을이지만 우리 삶을 대입해 봐도 크게 다르지는 않다. 아무리 노력해 봐도 그저 그런 삶을 살고 있는 것 같고 SNS를 들여다보면 다른 사람들보다 크게 뒤처져 있는 것 같아서 삶의 의미를 찾기 힘들어 깊은 우울의 늪에 빠지는 우리의 모습이기도 하다.
이 마을의 부자인 미스 어밀리어도 마을 사람들과 크게 다른 것이 없다. 가진 것은 많지만 그게 삶의 빛이 되진 않는다. 어밀리어의 낙이 소송을 거는 것이라는 걸 보면 알 수 있다. 그런 어밀리어의 삶에 한 줄기 빛이 드리워졌을 때는 사랑이 찾아왔을 때다. 그 순간 살아가는 의미가 생겨나고 별 볼 일 없는 삶에 윤기가 돌기 시작한다. 어밀리어를 찾아왔을 때 꼽추 라이먼은 자신의 초라한 처지에 서글프게 울지만, 어밀리어의 사랑을 받게 된 순간부터 다른 사람이 된다.
“사랑을 받는 사람은 사랑을 주는 사람의 마음속에 오랜 시간에 걸쳐 조용히 쌓여온 사랑을 일깨우는 역할을 하는 것에 불과한 경우가 많다. 사랑을 주는 사람들은 모두 본능적으로 이 사실을 알고 있다. 그는 자신의 사랑이 고독한 것임을 영혼 깊숙이 느낀다.”(51)
사랑은 고독한 것이지만 당사자뿐 아니라 주변을 변화시키기도 한다. 송사를 좋아하는 사람이었지만 마을의 의사 역할 또한 맡고 있던 어밀리어가 사랑을 시작한 순간부터 그녀의 정체성을 후자 쪽에 더 가까워진다. 너그러워진 마음은 마을의 카페도 탄생시킨다. 사실 어밀리어를 사랑했던 마빈 메이시도 사랑하던 동안은 악당이 아니었으니, 미천한 삶에 찾아온 사랑의 힘이 얼마나 큰지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소설이 말하고자 하는 것이 단지 사랑의 힘에 관한 것은 아닌 듯하다. 보통의 사람들과는 조금 다르게 보이는 사팔뜨기 어밀리어와 꼽추 라이먼, 악당 마빈 메이시라는 인물들의 사랑을 보여주고 나서 작가는 에필로그를 덧붙이며 소설을 마무리 짓고 있다.
에필로그에 나오는 열두 명의 죄수들은 어딘가 의미심장하게 느껴진다. 예수의 열두 제자들도 그랬듯이, 이 땅에 유배된 죄인과 같은 우리들은 모두 어딘가 불완전하고 비뚤어져 있는 존재들이라는 생각이 떠오른다. 소설의 인물들과 에필로그의 죄수, 우리들은 그런 면에서 하나로 연결된다. 그리고 죄수들이 노래하는 순간은 아마도 우리가 사랑하는 순간들일 텐데, 그 “희열과 공포”의 순간이 척박한 삶에 한 줄기 빛이 되는 순간임이 틀림없을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하고 나면, 인간이 살아가는 의미에 대해 이 소설이 말하고 있는 것이 어렴풋하게 보이게 된다.
길지 않은 분량인데다 잘 읽히는 소설이 사랑과 삶에 대해 다양한 성찰을 할 수 있는 깊이까지 갖춘 것은 매우 드물다고 생각한다. 이 소설이 좀 더 널리 읽혔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