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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콜릿책방지기 Dec 08. 2024

<암병동>

50여 년 전 소련의 상황이 지금 우리에게 암시하는 것

   인간은 이기적인 동물인 동시에 사회적인 동물이라서 이타적인 면도 가지고 있다. 사실 사회적인 동물로서의 이타심은 본능적인 것이라기보다는 강요된 이타심에 가까워서 사람에 따라서 크기의 차이가 크다고 생각한다. 비록 숭고한 면을 갖지 않은 이타심이라고 하더라도 집단을 유지하는 데는 필수적이라고 본다. 


   소설의 시작과 함께 루사노프가 입원하는 병실의 풍경을 보면 그런 면들을 정확히 포착할 수 있다. 병증에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같은 병실에 있는 환자들은 모두가 암환자들이다. 그들의 마음속 한쪽에는 생사가 왔다 갔다 하는 상황에서 자기 생명을 지키려는 본능적 욕망이 자리하고 있다. 생존의 본능은 무엇보다 강한 법이라서 이기적인 면모가 더욱 잘 드러날 수 있다. 제멋대로 병실 전등을 끄고 싶어 하는 루사노프도 그렇지만, 의사들이 어떤 약을 처방하는지 정확히 알고 싶은 코스토글로토프의 지식욕도 그런 맥락으로 볼 수 있다.(환자가 알 권리를 가지는 것과는 별개로 의사 돈초바의 상황을 고려하면 그렇다.)


   다른 한쪽에서는 공동생활을 해야만 하는 병실 안에서 자기 안위를 일부 포기하면서 사회생활을 한다. 그러다 보면 어쩔 수 없이 다른 사람의 입장도 헤아리게 된다. 고통은 오롯이 자신만의 몫이므로 병으로 고통받던 외로운 존재가 역시나 자신처럼 고통받고 있는 다른 존재를 보게 된다. 자신의 고통으로 인해 타인의 고통을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이 책의 배경이 되는 소련의 공산주의 실험의 모습 또한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제정 러시아 시대의 극단적인 계급 차이로 인한 민중의 고통을 보고, 고통에서 해방시키려는 시도에서 비롯된 실험인데 이타적인 이상주의는 스탈린의 이기심 앞에서 무력해진다. 정적을 해치우고 자신이 권력을 독점하기 위한 스탈린의 이기심 때문에 코스토클로토프 같은 사람들은 사소한 일로 수용소에 끌려가서 일생이 망가지게 되고, 루사노프와 같은 사람들은 밀고를 통해서 특권 계층이 된다. 


   게다가 시스템이 만들어낸 이타주의는 개개인의 차이를 보지 못하는 형식만 남게 된다. 누구나 공평하게 이용할 수 있는 병원은 음식도 시설도 보살핌도 최소한의 것만 남아서 하향평준화 되어 있다. 의사들도 격무에 시달리면서 간신히 생활하는 수준이라서 환자 한 명 한 명을 제대로 들여다볼 여유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돈초바가 자기 병을 진단받으러 오렌시첸코프를 찾아갔을 때, 오렌시첸코프가 개업의의 필요성을 말하는 것은 단순한 이기심으로 보기는 어렵다. 


   이기심과 이타심이 적당히 버무려진 존재라고 볼 때, 인간은 참 입체적인 존재가 맞다고 수긍하게 된다. 루사노프 또한 급격한 사고의 변화를 보여주는데, 과거에 대한 반성이든 변화한 현실에 대한 적응이든 상관없이 죽음 앞에서 보여주는 깨달음이다. 자신과 비슷하지 않아도, 심지어 너무나 다른 사람들이라고 하더라도 다들 잘 살기를 바라는 그 마음이 인간이 타인과 함께 할 수 있는 포용력이다. 


   “코스토글로토프도 페제라우도, 시브가토프도 제각기 나름대로 살면 되는 것이다. 루사노프도 그 축에 끼여서, 모두 완치되고 행복하게 살았으면 싶었다. 시트가 덮개처럼 씌워졌던 광경이 루사노프의 머리에 떠올랐다가 이내 사라져 버렸다. 다들 잘 살면 돼, 루사노프는 이제 누굴 심문하거나, 조사하지는 않을 것이다.”(286)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상황을 생각할 때,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 이 책을 보면 더 명확해진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이기적이지만, 자기 안위와 권력을 위해 복무하는 이기심을 가진 인간은 타인의 고통을 보지 못한다. 무엇보다도 이상을 꿈꾸며 건설했던 사회조차 인간의 이기심 앞에 초토화되어서 수많은 민중을 더 깊은 나락으로 끌어내렸다. 이상조차 없는 인간이 권력을 갖고자 한다면 그 결과는 예상하고 싶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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