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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메시스>

어떤 사람에게 주어진 천벌이라는 운명

by 초콜릿책방지기

마치 우리 시대의 코로나처럼 폴리오가 인간의 생명을 덮쳐서 아무렇지도 않게 앗아가던 시기가 있었던 모양이다. 우리말로 하면 ‘천벌’이라는 뜻의 이 책 <네메시스>를 읽기 전에는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어쨌든 유행병이 돌면 인류의 일부가 속수무책으로 순식간에 사라지던 시기는 언제나 있었다는 것은 알고 있었으니 너무 낯선 이야기는 아니다. 게다가 우리는 코로나를 겪었으니 이 이야기는 지금의 이야기처럼 읽히기도 한다. 1944년 무렵 미국에서 일어난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역병이 닥쳐온 시기에 개개인에게 미치는 영향과 반응은 조금씩 다를 텐데, 이 소설의 주인공 버키 캔터에게는 그 모든 비극이 무자비한 하느님의 소행이라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만약 하느님이 선한 존재라면 그런 일이 벌어질 이유가 없고, 그런 비극이 선량한 사람들에게 닥칠 수가 없다는 것이다. 버키는 놀이터 감독으로 일하면서 보던 아이들이 폴리오에 걸려서 한 명씩 죽어 나가는 이유를 도저히 납득할 수가 없다. 그것도 특별히 건강하고 괜찮은 아이들이 그렇게 된 것을 보면서 그 모든 비극의 원인이 하느님 탓인 것 같다. 나아가 자신을 낳다가 이른 나이에 죽게 된 어머니의 운명도 양심이 없는 하느님이 문제인 것 같다. 그러나 책임지지 않는 하느님은 폴리오가 확산되는 비극을 멈추지 않고, 결국 책임의 화살은 버키 자신에게로 향한다.


챈슬러 놀이터에서는 그곳을 감독하던 자신이 무언가를 놓쳤기 때문에 놀던 아이들이 폴리오에 걸려버렸고, 인디언 힐에서는 자신이 위퀘이크로부터 폴리오를 데리고 왔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하느님이 인간을 구원하지 않으면 자기 스스로가 나서서 책임을 지고 구원해야만 한다는 이상한 책임감에 사로잡혀서 끊임없이 자신을 학대한다. 마샤의 아버지가 버키에게 “우리는 아무런 근거 없이 우리 자신을 가혹하게 심판하기도 해. 하지만 잘못된 책임감은 사람을 쇠약하게 만들 수 있다네.”(107)라고 말하지만 이 말은 버키의 마음에 가닿지 못한다.


도대체 버키는 왜 그런 식으로만 생각하게 된 것일까. 자기를 낳다가 어머니가 죽어버렸고 아버지가 도둑이었다는 불명예가 있긴 하지만, 자신을 기꺼이 보살펴주는 희생적인 조부모가 있을 뿐 아니라 지극한 사랑을 보여주는 여자친구 마샤도 있다. 시력이 너무 나빠서 태평양 전쟁에 징집되진 못했지만 뛰어난 운동신경을 갖고 있어서 다이빙이며 창 던지기 같은 운동을 잘한다. 주어진 운명에 일장일단이 있다면 버키가 그런 면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좋은 것과 좋지 않은 것을 동시에 갖고 있는 사람이다. 그런데 버키는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이 도무지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다. 보통 사람이라면 싸움을 피하고 목숨을 보전하게 된 것을 행운으로 여기겠지만 운이 나빠서 전쟁에 가지 못했다고 생각하고, 폴리오에 걸려서 불구가 되자 마샤가 결혼하자고 간청하러 왔을 때도 사랑하는 여자를 나쁜 운명에 끌어들이지 않기 위해 거절한다. 그렇게 비틀어진 생각에 갇혀서 나이 들어가는 버키라는 문제적 인물에 대해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는 화자는 이렇게 말한다.


“사람의 운은 좋아지지도 하고 나빠지기도 한다. 누구의 인생이든 우연이며, 수태부터 시작하여 우연-예기치 않은 것의 압제-이 전부다. 나는 캔터 선생님이 자신이 하느님이라 부르던 존재를 비난했을 때 그가 정말로 비난하고 싶었던 것은 바로 우연이라고 생각한다.”(243)


주어진 우연 혹은 운명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 화자는 결혼을 해서 두 아이를 낳고 행복하게 살고 있다. 화자도 한때는 챈슬러 놀이터에서 운동을 하던 학생이었으므로 버키가 한창 빛나던 시절을 기억하고 있다. 그가 창 던지기 시범을 보이며 놀이터의 아이들에게 영웅처럼 보이던 순간도 기억하고 있다. 화자의 기억 덕분에 버키의 비극은 좀 더 선명해진다.


“챈슬러 놀이터와 인디언 힐 양쪽에 초래된 대재난은 그의 눈에 자연의 악의에 찬 부조리가 아니라 그 자신이 저지른 큰 범죄로 보였고, 이런 생각 때문에 그는 자신이 한때 소유했던 모든 것을 내놓고 인생을 망쳤다. 버키 같은 사람의 죄책감은 남이 보기에는 터무니없지만, 사실 불가피한 것이다. 그런 사람은 구제할 수 없다. 그가 하는 어떤 일도 그가 안에 품은 이상에는 이를 수 없다. 그는 자신의 책임이 어디에서 끝나는지 절대 모른다. 그는 절대 자신의 한계를 믿지 않는데, 다른 사람들의 고통에 체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엄격한 선을 천성적으로 짊어지고 있어, 자신에게 어떤 한계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면 반드시 죄책감을 느끼기 때문이다.”(274)


운명에 순순히 굴복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인간의 특징이 아니다. 불가사의한 힘 앞에서 반드시 반항해 보고 인간이 무력해 보이는 비극 앞에서 필사적으로 그 이유를 찾아봐야 한다. 그래야 인간은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고 주어진 운명에 어느 정도는 타협하듯 순응할 수 있다. 버키는 타협하고 순응하는 단계까지 나아갈 수는 없었던 인물이다. 도저히 해결할 수 없고 인간의 힘이 닿을 수 없는 일에 대해서도 포기할 수 없었던 인물이다. 그래서 인간에게 주어질 수도 있는 더 나은 삶이라는 걸 받아들일 수 없었던 인물이기도 하다. 그래서 조용히 혼자 시들어갈 수밖에 없다.


“대신 그는, 이 순교자는, 왜에 미친 이 사람은 필사적으로 더 깊은 원인을 찾으며, 그 왜를 하느님이나 그 자신 안에서 발견하거나, 아니면 신비하게도, 불가사의하게도, 그 둘이 무시무시하게 합쳐서 생겨난 단일한 파괴자에게서 찾는다. 그가 그의 삶을 시들게 해 버린 고통들을 쌓아가는 것에 내가 아무리 공감한다 해도, 그것은 어리석은 오만, 의지나 욕망의 오만이 아니라 환상적이고 유치하고 종교적인 해석의 오만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266)


그에게 주어진 천벌은 아마도 벌어진 일에 대한 이유를 찾는 것을 멈추지 못하는 태도일 것이다. 그 이유를 찾아 헤매느라 눈앞에 있는 좋은 것을 볼 수 없었던 것 또한 그에게 주어진 운명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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