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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도 Jun 07. 2024

경주 청년 마을 방문기 2: 하우스메이트는 처음인데요

감포 가자미 마을 방문기 2

청년 마을은 대개 여자 숙소 한 군데, 남자 숙소 한 군데로 나뉘어 참가자들끼리 방을 나눠쓴다. 숙소는 빌라, 아파트, 단독 주택 등 다양한 형태로 제공되며 숙소에 갖춰진 가구나 물품도 숙소 별로 상이하다. 예천 청년 마을에서는 투룸 오피스텔에서 지냈고 경주 청년 마을에서는 방이 4개인 구옥 빌라에서 지냈다. 예천에는 거실에 쇼파와 의자가 있었지만 경주에는 없었고, 대신 예천에 없던 세제와 조미료가 갖춰져 있었다. 아마 한 달 살이와 일주일 살이라는 기간의 특성 때문인 듯하다.


이번 가자미 마을 프로그램에는 여자 크루 5명, 남자 크루 4명이 참가했다. 여자 크루 5명은 함께 구옥 빌라에서 생활했다. 푸른색 페인트를 덧칠한 몰딩, 반구형으로 돌출되어 있는 베란다, 불투명한 미닫이 유리문으로 된 방문, 방마다 딸려 있는 베란다, 기름 보일러와 가스레인지. 오래된 빌라였지만 내부는 깨끗했고 거실이 넓어 9명의 크루들이 다같이 저녁을 먹기 좋았다.


가자미 마을에서의 주중 일과는 대략 이렇다. 10시에 가자미 오피스로 출근하여 팝업 스토어 관련한 업무를 하고 12시에 점심을 먹은 후 2시에 오후 업무를 다시 시작해 5시에 퇴근한다.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가 청년 마을 측에서 준비한 프로그램으로 이루어진다면 오후 5시부터는 크루들끼리 자체 프로그램이 진행된다. 다 함께 요리하기, 밤 산책 나가기, 사운드 스케이프하러 가기, 요가(스트레칭) 함께 하기 등. 자체 프로그램이 종료되면 저녁 10시쯤이었다. 수면 시간을 빼면 개인 시간은 3시간 남짓. 그마저도 '자기만의 방'은 없다. 그러나 이러한 생활 마저 즐겁게 지낼 수 있었던 건 무던하고 다정한 크루들 덕분이었다.


혼자 보내는 시간은 추억이 되지 않지만 함께 보내는 시간은 떠올릴 수 있는 추억이 된다. 거의 모든 일상이 추억이 되었다는 뜻이다. 아침은 스크램블 에그, 시리얼, 요거트, 잼, 식빵으로 전형적인 게스트하우스 조식 조합. 아침에 슬그머니 부엌으로 들어서면 계란을 부치던 크루가 활기차게 묻는다. "같이 드실래요?" 기다란 식탁에 나란히 앉아 조식을 먹으며 수다를 떨었다. 저녁 메뉴는 다채로웠다. 처음에는 일주일에 두 번만 같이 밥을 먹고, 나머지는 각자 먹자고 얘기가 나왔는데 첫 저녁 식사를 같이 한 이후, 그 말은 쏙 들어갔다. "많이 넣으면 맛있겠지." 혹은 "이 만큼밖에 안 남는데 그냥 다 처리하자." 하며 재료들을 잔뜩 넣다가 늘 산더미 같은 양이 되던 저녁. 


3주 동안 우리가 요리한 메뉴들은 볶음밥, 카레, 순두부찌개, 매운탕, 회덮밥, 회국수, 라볶이, 파스타, 볶음면, 타코, 수육, 돼지 껍데기 볶음, 묵무침, 당근라페, 두부구이, 고구마튀김, 군만두이다. 1인 가구일 때에는 이렇게 다양한 메뉴를 해먹지 않았는데 다같이 식단표를 짜고 냉장고 속 재료들을 보며 이거 저거 추가하며 식사가 점점 더 푸짐해졌다. 저녁 식사 상이 완성되면 모두 호들갑을 떨며 사진을 찍었다. 각 숙소마다 한 명의 메인 셰프들이 있었다. 그들이 전두지휘하며 이루어낸 성대한 밥상 앞에 앉으면 밥이 참 달았다. 대가족이 모인 떠들썩한 명절이 오래 지속되는 기분이었다. 


단체 생활에 불만이 없었던 건 모두가 제 몫을 찾으려 부지런히 움직이던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메인 셰프가 요리를 시작하면 누군가 자연스레 양파를 까고 누군가는 야채를 자른다. 누군가는 쌓이는 쓰레기를 정리하고 설거지하며 누군가는 수저를 놓고 상을 닦는다. 요리를 돕지 못한 사람은 어떻게든 설거지를 하려고 했고, 그마저도 못할 때에는 널어둔 빨래를 개고, 쓰레기를 내놓는다. 함께 하는 가사 노동에 묻어 가려는 사람이 누구도 없었다. 아니, 오히려 어떤 몫도 하지 않았을 때 불편해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렇기에 가사 노동이 적당히 배분되어 돌아갈 수 있었다.


우리의 단체 생활이 불편하지 않았던 건 모두가 공유하는 청결의 기준이 비슷했기 때문이다. 가사 노동의 농도를 결정하는 미묘한 기준들이 요구와 조정 없이 자연스럽게 합의되었다. 모든 크루들이 자신의 빨래가 다른 이들의 빨래와 섞이는 것에 별다른 신경을 쓰지 않았다. 속옷과 양말을 같이 빨아도 괜찮게 여겼다. 다른 이가 자신의 팬티를 개는 것에 냉큼 고마워했다. 재활용 쓰레기 봉투가 2개 쯤 가득 차도 무던했다. 화장실 배수구에 머리카락이 보여도 대충 뒀다가 한꺼번에 치웠다.

 

혼자서는 숙제처럼 느껴지는 가사 노동이 함께 할 때에는 가뿐했다. 동시에 가사노동을 함께 하자 '나눠 듦'의 감각이 몸으로 느껴졌다. 먹을 음식을, 입을 옷을, 씻는 공간을 모두 함께 서로를 위해 돌보고 있었다. 가사 노동을 나눌 때에야 얻게 되는 친밀감이 분명히 존재하는구나. 가자미 마을에서 보낸 단체 생활 덕분에 내가 생활 공동체를 원한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실감했다. 노동의 공정함은 생활의 다정함이 된다. 그 다정함은 존중받고 배려받는다는 든든함이 되어 나를 지탱한다. 어쩌다 보니 가사 노동에 대한 깨달음을 얻고 와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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