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로 살아간다는 것(29)
(사진 - 안마의자 설치 전문 네이버 블로그 펌)
며칠 전에 엄니 집에 갔을 때였다. 아파트 현관에서 비밀번호를 치고 들어갔는데 불이 꺼져 있어서 난 엄니 집에 아무도 없는 줄 알았다. 그런데 TV는 혼자 켜져서 떠들고 있었다.
"엄니 뭐 하세요?"
어둠이 눈에 익자 소파에는 엄니가 앉아있었다. 어둑한 방 안에서 혼자 TV를 보고 계셨던 것이다. 불도 안 켜고...
"왜 불도 안 켜고 TV를 보세요, 눈 나빠지면 어쩌려고..."
난 그 말을 하고 나서야 쓸데없는 걱정(?)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엄니의 한쪽 눈은 이미 거의 실명상태고 나머지 한쪽도... 하지만 그러니까 더욱 눈에 신경을 써야 한다는 생각이 들면서 좀 화가 나기 시작했다.
"제 말 안 들려요? 왜 불을 안 켜고 TV를 보시냐고요?"
엄니는 손을 들어 천장에 달린 LED 등을 가리켰다. 두 개로 나뉜 LED등의 한쪽이 깜박거리고 있었다. 두쪽중에서 한쪽이 나간 지는 좀 되었다. 한 6개월 정도? 그러다 이번에 나머지 한 개도 마저 나가버린 모양이었다. 순간 엄니에게 좀 미안한 마음이 들면서 빨리 고쳐드리지 못한 내가 원망스러워졌다. 나머지 한 개가 마저 나가면 고치려고 생각했는데 두 개가 다 나가고 보니 이렇게 어두운 거실이 되어버린 것이었다. 그것도 모르고 어두운 거실에서 TV를 보고 있는 엄니에게 화를 내려고 했던 것이다.
"담에 올 때 등 고쳐드릴게요, 우선 이거라도 켜고 계세요"
난 베란다 등을 켰다. 베란다에서 들어오는 주황색 등이 거실을 비추니 그나마 어둡지는 않았다.
"근데, 애비야"
"왜 그러세요?"
"저 안마의자 어찌 좀 하면 안 되겠니?, 저기서 뭐가 자꾸 떨어져 싸서~ 여기 경비원 아저씨에게 말하니 아들이 올 때 같이 밖에 내다 놓으면 수거업체에서 가지고 간다고 하면서 너 오는 날을 물어보던데, 다음 25일에 온다고 했는데, 그때 같이 하면 되겠지?"
난 거실 한편에 놓인 안마의자를 돌아보았다. 벌써 십 년, 아니, 이십 년이 다 된 그 안마의자는 내가 장가 가기도 전 총각시절에 부모님께 사 드린 것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작동도 잘 안 되고, 무엇보다도 가죽이 낡아서 앉을 때마다 옷에 뭐가 묻고 바닥에 가죽 부스러기가 떨어지기 때문에 요즘은 거의 쓰지 않고 있는 것이었다.
"안마의자 굳이 버려야 돼요?, 여기 그냥 놔두면 될 텐데, 돈 들여 버릴 필요가 있어요?"
"그래도 뭐가 자꾸 떨어져 싸서..."
말끝을 흐리는 엄니를 보면서 어차피 그날 올 때 같이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알았어요, 그날 등도 갈고 안마의자도 내놓고 같이 할게요..."
그렇게 엄니에게 말한 며칠 후, 그날이 되었다. 엄니를 병원에서 모시고 와서 같이 점심 식사를 하고 나서 경비원 아저씨에게 전화를 했다. 그러자 그분이 올라오셔서 나와 함께 안마의자를 꺼내는데 예기치 못한 상황이 발생했다. 안마의자의 폭 사이즈가 커서 현관문으로 나가지 않는 것이었다.
"응?, 이게 왜 이러지? 이걸 어떻게 들여왔지?"
곰곰 생각해 보니 그때 설치하던 분들이 공구를 가져와 조립을 했던 기억이 났다. 하지만 지금 엄니 집에는 공구라고 할만한 것이 없었다.
"아, 이건 안 되겠네요, 전문가가 와야 할 것 같습니다."
안마의자를 꺼내느라 나와 함께 뻘뻘 땀을 흘리던 경비원 아저씨가 이제는 두 손을 들었다는 듯, 내게 던진 말이었다.
"네, 일단 제가 제자리에 갖다 두고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경비실도 비어있을 텐데, 저희 때문에 여기 오래 계실 수도 없을 테니 먼저 내려가세요."
난 경비 아저씨를 1층 경비실로 내려보내며 말했다. 다음번에는 우리 집에서 공구를 좀 가져오고 소방서에서 같이 일하는 동료 한 명을 데려와야 할 것 같았다.
"엄니, 다음 근무하고 나서 우리 소방서에서 사람 한 명 데려올게요, 그 사람이랑 같이 하면 될 것 같아요."
그래서 다음날 소방서에 가서 그 동료에게 사정을 말하니 그는 흔쾌하게 도와주겠다고 했다. 천군만마를 얻은 느낌이었다. 우리는 그 다음날 엄니 집으로 가서 작업을 시작했다. 소방관 두 명이서 이 정도 일쯤은 식은 죽 먹기였다. 연결 나사가 헛돌아 좀 애를 먹긴 했지만 양쪽 팔걸이를 해체하고 나니 현관문을 충분히 통과할 수가 있었다. 둘이서 앞뒤로 밀고 끌며 그 안마의자를 주차장 입구 재활용 창고 앞에 갖다 놓고 경비원 아저씨에게 말했다. 경비원 아저씨는 깜짝 놀라며 그걸 어떻게 꺼냈냐고 물었다. 직장에서 동료가 와서 도와주었다고 하니 그분도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곧바로 다시 집으로 들어가 led 등을 교체했다. 안마의자와 마찬가지로 십 년 이상 엄니집 거실을 비춰주었던 led등은 우리의 손을 거쳐 교체되었다.
이렇게 led등을 교체하고 나서 스위치를 올리니 엄니 집 거실은 눈이 부시게 밝았다. 속이 시원했다. 엄니도 병원에서 와 보시더니 마치 딴 집 같다고 좋아하셨다. 아버지가 계실 때는 내가 신경 쓰지 않던 것이었는데 점점 엄니 집에 내가 신경 써야 할 것들이 많아지고 있다. 엄니가 몸이 좋지 않고 점점 나이가 들어가니 내가 엄니 집에 갈 때마다 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일을 하나하나 하고 나면 내 맘이 이렇게 좋으니 또 안 할 수가 없다. 그날 일을 도와준 동료도 고맙고, 좋아하는 엄니를 보니 내 맘도 좋다. 그런 의미에서 안마의자를 옮기고 led등을 교체한 그날은 나에게 정말 보람 있는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