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로 살아간다는 것(27)
요즘 다시 코로나가 유행할 기미를 보이고 있다. 아시아를 중심으로 확진자와 사망자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한국도 예외가 아니다. 아시아권에서 유행을 하면 1~2개월쯤 뒤에는 꼭 우리나라로 넘어오기 때문에 지금이 코로나에 대해 가장 경각심을 가져야 할 시기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지지난 회에는 우리 집에서 와이프가 코로나에 걸린 얘기를 했었는데 오늘은 몇 년 전에 엄니가 코로나에 걸렸던 얘길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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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는 2021년쯤 됐던 것 같다. 한창 코로나가 기승을 부릴 시기였다. 그때 우리 가족이 모두 코로나에 한 번씩 걸렸지만 고혈압으로 주 3회 신장투석을 받고 계시면서 귀에는 진주종, 왼쪽 눈은 거의 실명 상태이신 엄니는 아직 코로나에 걸리지 않았었다. 우리가 모두 엄니에게 항상 마스크를 쓰시고 외출했다 돌아오면 꼭 손을 씻으시라고 신신당부했기 때문일까? 엄니는 우리가 모두 코로나에 걸리고 나서 일 년 후쯤 코로나에 걸리셨다.
어느 날, 엄니가 감기 기운이 있으셔서 신장투석 받으러 가면서 그 병원에서 코로나 검사를 하셨고 그게 양성반응이 나와서 바로 엄니는 그 병원 코로나 격리 병동에 입원을 하셨다.
"아범아, 나 코로나 걸렸단다. 검사하던 사람이 바로 입원하라고 해서 지금 입원실로 간다."
차에서 엄니를 기다리던 나에게 갑자기 이런 전화가 걸려왔다. 응? 이렇게나 빨리? 난 순간 긴장했다. 그 당시는 나이 드신 분들과 기저 질환이 있는 분들이 코로나에 걸리면 격리병동으로 가서 줄줄이 돌아가시던 때였기 때문이다. 혹시나 이 전화가 엄니와의 마지막(?) 통화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가슴이 뜨끔했다.
"아범아, 세면도구하고 슬리퍼하고 그런 것들을 가져와서 이 병동 간호사에게 주면 나한테 전달한다고 하니 집에 가서 그것 좀 가져와야겠다, 그리고 여기서 바로 신장투석은 하면 된다고 하니, 코로나가 다 나을 때까지 여기서 입원하는 수밖에 없겠다."
엄니는 좀 당황하긴 하셨지만 조근조근 입원 절차를 나에게 설명하셨다. 하기야 엄니는 그 병원에서 몇 번이나 입퇴원을 반복했기 때문에 그런 건 '척하면 척' 알 정도로 익숙한 우리 모자였다. 그런데 이번엔 이야기가 다르지 않은가? 엄니는 '들어오면 웬만해선 못 나간다'는 코로나 격리병동의 노약자들 얘기를 못 들어본 것일까? 난 그 얘기는 빼고 침착하게 말했다.
"엄니, 알았어요, 내가 가서 금방 갖고 올 테니 거기서 주는 밥 잘 드시면서 계세요, 혹시 또 뭐 필요하신 거 있으면 전화하고..."
"그래, 알았다. 설마더러 한 일주일 있으면 낫겠지, 요즘 코로나 백신이고 치료제고 다 좋다던데 그거 먹으면서 있으면 되겠지..."
엄니는 평생을 지켜오신 초긍정 마인드로 코로나 격리병동쯤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말하셨다. 하지만 난 다시 걱정이 되었다. 그 코로나 격리병동이 현대판 아유슈비츠 수용소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엄니, 그래도 거기 간호사들 말 잘 들으면서 계세요, 뭐 먹고 싶은 거 있으면 전화하시고요..."
"그려, 걱정 마라, 지금은 딱히 뭐 먹고 싶은 거도 없으니 한숨 자고 나면 알아서들 해 주겠지..."
그렇게 엄니와의 마지막 통화(?)가 될지도 모를 통화를 하고 나서 전화를 끊었다. 그때 당시 코로나로 인한 사망자가 너무 많아 장례식장과 화장장은 차례를 기다려야 되고 시신을 담는 관이 동날 지경이었다. 엄니에게 말은 안 했지만 이렇게 엄니의 임종도 지키지 못하는 게 아닌가 하는 걱정이 내 머리를 짓눌렀다.
일주일이면 퇴원할 거라던 엄니의 예상을 보기 좋게 빗나가고 격리병동에 들어간 지 3주 차, 4주 차에 들어갈 즈음이었다. 어느 날 저녁, 운동삼아 집 앞 강변을 걷고 있는데 엄니에게서 전화가 왔다. 엄니는 완전히 쉬어서 갈라진 목소리로 전화기에 대고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아범아, 나 죽겠다!"
엄니의 목소리만으로 그럴 것 같았다.
"왜요?, 엄니?, 뭔 일이래요?"
"목이, 목이 많이 아파, 침을 삼키기도 힘들구나, 온몸에 힘이 없고 열은 어떻게나 나는지..."
내 머릿속에서 앵앵거리는 앰뷸런스 사이렌이 울렸다. 비상 상황이었다.
"그럼 간호사를 불러서 말하세요."
"간호사는 와서 링거 달아주고 주사 놔주고 약 주고 가버려, 목이 타고 마른데 물을 안 줘!"
"네?"
나는 깜짝 놀랐다. 나도 코로나로 일주일정도 집에서 자가격리를 해 봤지만 무엇보다 가장 힘든 것이 목이 아픈 '인후통'이었다. 그런데 그 인후통은 약을 먹어도 주사를 맞아도 쉽사리 나아지지 않는 것이었다. 그나마 따뜻한 물을 컵에 담아 수시로 마시면서 목을 달래는 것이 그 고통을 덜어내는 유일한 길이었다. 그런데 따뜻한 물을 안 준다니? 그러면 안 되는데?
"거기 정수기 없어요?, 정수기로 가서 떠다 먹으면 되죠."
"정수기는 복도에 있는데 병실에서 나오지 마래, 그리고 물을 떠다 달라고 하면 안 된다고만 해~"
엄니의 죽어가는(?)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들려왔다. 이러고 있어선 안 되겠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치고 대퇴부를 강타했다.
"엄니, 거기 딱 기다리세요, 내가 따뜻한 물 받아갈 테니, 이런 병원이 있나!"
나는 씩씩거리면서(?) 집사람에게 전화를 걸어 따뜻한 보리차를 좀 끓여서 보온병에 담아놓으라고 했다. 그리고는 곧장 집으로 가서 그 보온병을 들고 차를 타고 병원으로 직행했다.
격리병동은 그 말처럼 일반병동과 떨어져 있었다. 코로나 환자들을 격리시켜 놓은 곳이라 그런지 병동으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관계자 외 출입금지'라는 글씨가 빨간색으로 쓰여있었다. 하지만 내가 누군가, 대한민국 소방관이 아니던가, 거기다 이 병원 환자의 아들이니, 누가 보더라도 '관계자'가 아닌가? 입에는 마스크를 쓰고 손에는 비닐장갑을 끼고 보온병을 들고 거기로 잠입(?)했다. 그리고 엄니가 있다는 2층으로 계단을 타고 올라갔다. 복도 입구는 불이 꺼져 있었다. 옆에 있는 간호사실이라고 쓰인 방의 문을 두드렸다.
"계십니까?"
나는 문을 살짝 열었다. 책상 위에서 팔을 괴고 엎드려 자던 간호사 한 명이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봤다. 비몽사몽간이라 꿈인지 생시인지 모를 눈으로 나를 보면서 물었다.
"여긴 어떻게 들어오셨어요?"
'어떻게 들어오다니, 당연히 걸어 들어왔지, 혹시 내가 귀신으로 보이니?'
난 속으로 이런 말이 생각났지만 그런 말은 하지 않고 이렇게 말했다.
"여기 이**환자라고 계시죠? 제가 그 아들 됩니다."
"아, 그러세요?"
그녀는 이제야 상황파악이 좀 됐는지 몸을 일으켜 의자에 등을 붙이고 앉았다. 난 비닐장갑 낀 손으로 보온병을 그녀의 책상 위에 놓으면서 말했다.
"어머니가 목이 아프신데 따뜻한 물을 마실 수가 없다고 해서 집에서 좀 끓여 왔어요, 번거로우시겠지만 이거 어머니께 좀 전달 바랍니다."
그녀는 좀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입에 흘린 침을 슬쩍 닦았다. 그리고는
"네 알겠습니다."
하고는 역시 비닐장갑 낀 손으로 내가 내민 보온병을 옆으로 옮겨놨다.
"그럼 잘 좀 부탁하겠습니다."
그렇게 마무리 인사까지 야무지게 하고는 난 그 격리병동을 나왔다. 그 간호사가 엄니에게 그 보온병을 잘 전달한 덕분인지 엄니는 거기에 보름쯤 더 머무르다 퇴원하실 수 있었다. 그 이후로는 엄니가 요청하면 따뜻한 물을 정수기에서 떠다 줬다고 했다. 우리 모자의 진심(?)이 통한 것일까? 그때를 생각하며 엄니는 요즘도 가끔 내게 그 얘길 하곤 하신다.
"그래도 니가 그 뜨뜻한 물을 보온병에 담아와서 내가 살았다."
엄니답게 좀 직설적인 아들 칭찬 같긴 하지만 그래도 내 보온물병 덕분에 엄니가 사셨다고 하니 기분은 좋다. 그런데 그 병원 간호사는 왜 엄니에게 따뜻한 물을 안 줬을까? 아마도 코로나 환자와는 접촉을 최소화하라는 치침(?)을 맹신한 탓일 테지, 그러니까 자기들의 업무인 주사와 약을 주는 것 외에는 최대한 환자와 접촉을 피하려는 마음으로 그랬을지 모른다. 물론 코로나가 아니라 다른 병이었다면 움직일 수 있는 환자는 직접 정수기로 가서 물을 떠먹고, 움직일 수 없는 환자는 보호자나 간병인이 물을 떠먹여 주면 되니까 그 말이 일리가 있다. 하지만 보호자나 간병인이 같이 있을 수 없는 코로나 격리병동에서 환자마저 물을 떠먹으러 정수기가 있는 복도로 나오지 못하게 한다면 그것은 그 병의 가장 기초적인 치료인 인후통에 수분공급을 막는 일이 아닐까? 그들은 자신들의 주 업무인 주사와 약을 주는 일에 매몰되어 가장 기본적인 치료를 도외시한 것이다. 그래서 그런 가장 기본적인 치료로 살릴 수 있었던 환자를 죽음의 문턱에까지 몰고 간 것은 아니었을까?
이것이 나의 지나친 비약일지도 모르지만 그때를 생각하면 아직도 모골이 송연 -이런 표현은 역시 50대 이상 아저씨나 가능할 듯~- 하다. 업무 매뉴얼에 빠져 환자가 정작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지 못하는 우리 의료계의 현주소를 보는 것 같아 가슴이 답답하다. 5년 전 그런 시행착오를 거쳐 갈(?) 사람은 가고 남을 사람은 남았다. 그런데 오늘 우리 앞에 다시 코로나라는 큰 파도가 몰아치려고 한다. 그런 시행착오를 또다시 거칠 것인가? 아니면 그런 시행착오를 거울삼아 이번에는 그 파도를 피할 것인가? 그것은 오늘 바통을 이어받은 새 정부와 의료계와 우리 국민 모두의 손에 달려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