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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추임새 Jan 08. 2019

남편에게 선언했다. "그래. 나 페미니스트야"

결혼하고 출산한 여자들의 페미니즘 이야기

드라마나 영화에서 러브스토리의 해피엔딩은 결혼인 경우가 많다. 나도 결혼하면 행복할 줄 알았다. 엄마가 된다는 것은 축복이라는 말을 믿었다. 결혼하고, 엄마가 된 후의 삶이 충분히 만족스럽지 못한 누군가가 있다면 그들에게 문제가 있는 거라고. 나는 다를 것이라 기대했다.


결혼하고 애 둘을 낳았다. 결혼 이후의 삶을 '행복과 불행'으로 단순하게 나눌 수 없음을 알았다. 기쁜 날도 많았지만 이해 못 할 일들, 힘든 일들, 어쩔 수 없는 일들이 쌓였다.


결혼제도 안에서 수행해야 하는 엄마의 역할, 아내의 역할, 며느리의 역할, 딸의 역할은 쉽지 않았고 가슴에 돌덩이 하나 얹고 살아가는 기분이었다.


'결혼한' 페미니스트가 되다


 "당신이 페미니스트야, 뭐야?"


결혼 3년 차 쯤. '이건 아닌데' 싶을 때, 내 불편한 감정을 말하기 시작했더니 남편은 내게 불쑥 이런 말을 했다. 그때의 나는 페미니즘에 전혀 관심이 없던 사람이었기 때문에 매우 당황스러웠다.


페미니스트가 어떤 사람인지 잘 알지 못했고, 그 말을 하던 남편의 말투나 태도로 보아 내가 "그렇다!"라고 말하는 순간 '사회 부적응자', '테러리스트', '불순세력' 등 이 사회에 존재하면 안되는 인간상임을 시인하는 꼴이 되는 분위기여서 이렇다 할 대꾸를 못 하고 침묵했다.


남편이 내게 던진 "페미니스트야, 뭐야?"라는 말은 의문형 문장이었지만, 질문이 아니라 공격의 말이었다. 내가 느낀 불편한 감정을 표현했을 뿐인데, 그게 뭐 못할 말이라고 그런 취급을 받는지 억울했다. 이렇다 할 사과도, 이해도 받지 못한 채 '나=페미니스트=문제 있는 사람'이 되었고, 답답함은 여러 질문이 되어 돌아왔다.


페미니스트는 어떤 사람인가? 페미니스트가 된다는 것은 부정적인 의미인가? 페미니스트에 대한 오해든, 내가 페미니스트라는 오해든. 마음에 쌓인 찝찝함을 풀어야 했다. 남편이 나를 향해 '페미니스트'라고 할 때 마음이 불편했던 이유가 뭘까.


가만 생각해보니 내게도 페미니스트의 이미지는 센', '독한', '이기적인', '상식 밖의', '불행한' 여성이었다. 페미니스트라는 말에 동의하거나 부정하진 않았지만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마음이 컸던 이유는 '그런' 여자가 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페미니즘 책을 읽고, 특강을 듣고, 페미니스트 모임에 참여할수록 그때의 내가 얼마나 무지했는지, 페미니즘에 대한 오해가 얼마나 깊었는지 깨달았다. 부족함이 많지만 과감하게 스스로 페미니스트 선언을 했다.


"그래. 나 페미니스트야!"


분노 이상으로 나아가는 여유


나는 한 남자의 아내고, 두 아이의 엄마고, 누군가의 딸이고, 며느리다. 남성 중심 지배 질서가 완고한 결혼제도에서 한 여성인 내가 한 사람으로 존중받는다는 것은 생각처럼 쉽지 않다. 오랜 관습은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아주 작은 균열도 큰 대가를 치러야 한다.


여성 문제가 사회적 관심사로 떠올랐지만 일상은 변한 것이 없었다. 불평등한 현실 고발은 넘쳤지만 내 하루를 바꿀 수 있는 전략은 찾기 어려웠다. 나를 둘러싼 부당함에 대해 더 이상 침묵하며 살 수는 없다고 다짐했지만 저항하는 방법을 몰라 혼란스러웠다. 분열, 갈등, 외로움이 반복되니 매일이 도전인 삶이었다.


내게 돌파구가 되어준 것은 엄마들과의 연대, 소통, 글쓰기였다. 엄마 페미니즘 탐구모임 '부너미'를 만들었고,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나'의 경험을 '우리'의 경험으로 언어화하면서 서서히 삶의 주체가 되었다(관련기사:나는 왜 페미니즘 '엄마' 모임을 직접 만들었나).


결혼 제도 안에 들어가자마자 시작되는 남자 집안과 여자 집안의 차별, 호칭의 문제, 여성을 향한 미묘한 일상적 하대, 가사분담의 불평등, 임금시장에서의 부당한 대우, 고립육아의 구조적 문제, 아들과 딸에게 행해지는 성차별적인 태도, 모성압박, 죄책감 등. 결혼하고 출산한 여성들이 경험하는 다양한 문제들을 당사자 관점으로 다루면서 현실을 좀 더 명확하게 파악하기 시작했다.


문제의식을 함께 탐구하고, 작은 실천과 노하우를 공유하면서 내 삶은 많이 달라졌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엄마라는 존재 자체를 다시 바라보는 관점을 갖게 되었고, 삶의 태도와 가치관을 재설정하며 분노 이상으로 나아갈 수 있는 여유도 생겼다.


평범한 엄마들의 이야기


사회에서 엄마인 '나'라는 존재는 그저 타자에 불과했다. 아이로 인해 자신의 삶을 포기한 연민의 대상이거나, 과한 교육열로 아이들을 불행하게 만드는 비뚤어진 욕망의 화신들이거나, 희생의 가치를 몸소 실천하는 위대한 존재거나, 이기적으로 자신의 아이만 챙기는 '맘충'으로 호명되는 혐오의 대상이거나, 모성신화를 깨고 자아를 찾아야 하는 교육의 대상이었다.


페미니즘을 공부하면서 구조적인 성별 불평등 문제를 이해하게 되고 조금씩 나를 설명할 언어를 찾아갔지만, 속 시원하게 갈증이 해소되지는 않았다. 학자들의 글, 비혼과 비출산을 외치는 젊은 여성들의 글, 엄마로 살고는 있지만 조력자가 있어서 궁지로 내몰리지 않아도 되는 여유가 보이는 글, 저 멀리 외국에 살고 있는 나와 상황이 전혀 다른 엄마들의 번역된 글로는 나를 충분히 설명할 수 없었다.


여러 방면으로 엄마의 삶에 대한 해석은 넘쳤지만 정작 당면한 현실을 살아내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평범한 엄마들의 당사자성이 담긴 이야기는 부족했다.


우리 사회에서 엄마들의 이야기는 맘카페 게시판에나 차고 넘친다. 엄마들의 고통은 단순히 하소연이나 불평, 불만, 수다로 폄하되며 사소한 것으로 취급된다. 일상을 억압하는 불평등 문제가 심각한데도 공적으로 언어화되지 못한다는 것은 안타깝고 쓸쓸한 일이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기혼, 출산 여성 당사자로서의 목소리를 냈고, 한 출판사에서 이런 나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 주며 엄마들의 이야기를 책으로 만들자고 제안했다. 그동안은 페미니즘 책을 선정해 읽고 독후감을 쓰고 토론 거리를 모아 서로의 고민을 나누며 소통하는 것이 중심이었다면, 이번에는 본격적으로 글 쓰는 모임을 시작했다.


엄마페미니즘 탐구모임 '부너미' 10명의 엄마들이 모여 엄마들의 언어를 만들기 위해 고군분투 중이다.

하고 싶은 말이 있는 10명의 엄마가 모였다. 출산한 지 얼마 안 돼 갓난 아기를 돌보고 있는 엄마, 곧 복직을 앞둔 육아 휴직자, 하루 2시간씩 잠을 자며 육아와 일을 병행하는 프리랜서, 남편과 역할을 바꿔 주부양자로 일하고 있는 직장인, 창업해 회사를 운영하는 CEO까지 다양한 상황에서 고군분투하는 여성들이다.


일하랴 육아하랴 집안 대소사 챙기랴 숨 막히는 일상에서도 우리의 고민을 많은 사람들과 나눌 귀한 기회라고 생각해 열심히 치열하게 쓴다. 하고 싶은 말이 많아서. 도저히 이대로 살 수 없어서. 가부장제의 고인 물이 되지 않기 위해. 잘못된 문화를 물려주지 않기 위해.


페미니스트도 결혼하나요?


"페미니스트는 결혼도 안 하고 애도 안 낳죠?"


비혼, 비출산을 외치는 젊은 페미니스트들이 주목받으면서 자연스럽게 생긴 질문인 듯하다. 결혼하고 출산한 여성이 페미니스트라면 곧 이혼할 여성, 모성애 없는 이기적인 엄마라고 부정적인 시선을 보내기도 한다.


그러나 나는 결혼하고 출산한 여성들은 모두가 한 번쯤은 페미니스트였거나 페미니스트가 될 확률이 매우 높다고 생각한다. 엄마가 된 후에 맞닥뜨리는 현실적인 문제들은 엄마가 되기 전보다 훨씬 더 광범위하고, 복합적이고 장벽이 높아서 혼자 힘으로 해결하기 어렵기에 누구보다 페미니즘이 필요한 여성들이라 믿는다.


연재기획 '페미니스트도 결혼하나요?'는 결혼하고 출산한 10명의 여성이 이 사회를 향해 던지는 질문의 시작이다. 사회가 변화하기를 기다리지 않고 스스로 변화의 주체가 된 엄마들이 출산, 그림자 노동, 감정노동, 젠더교육, 엄마의 공간, 돈, 일, 꿈, 친정엄마 등의 주제를 당사자 입장에서 연재한다.


정제된 언어와 통계, 지식으로 무장하고 설득하는 글이 아닌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엄마들의 치열한 고민이 담긴 글, 작은 시도라도 해보는 투쟁의 기록, 분노와 슬픔, 좌절을 직시하며 주체가 되어가는 혼란의 글이다.


우리의 이야기를 만난 더 많은 엄마들이 일상의 익숙함에 질문을 시작하면 좋겠고, 그렇게 각자 다른 환경에서 다른 고민을 하고 있을 엄마들이 더 많은 경험과 노하우를 공유하면 좋겠다. 침묵을 깬 엄마들의 이야기가 더 많아질수록 우리 사회의 '엄마'라는 존재가 좀 더 진실에 가까워질 것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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