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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눈별 Jul 16. 2023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아빠가 망했을 때 나도 망한 것이다.

1997년 사업을 하던 우리 아빠는 망했다. IMF의 영향이 컸다. 아빠는 13살부터 가구 만드는 일을 배워 평생 목수로 살았다. 어린 나이부터 돈을 차곡차곡 모아 낸 가구 전시점이 IMF 때 망해버린 것이다. 직장을 잃고 큰 빚을 지게 되었다. 모든 상황을 추스리기엔 너무 버거웠는지 아빠는 방에 숨어버렸다. 작은 방에 들어가 나오지 않았다. 밥도 먹지 않고 화장실도 가지 않았다.


아빠가 숨어있는 작은 방에선 항상 담배연기가 새어 나왔고, 텔레비전 소리가 웅얼대듯 들렸다. 그 방앞을 지날 때마다 아빠는 왜 죽지 않고 저렇게 가족들을 힘들게 하는 걸까 원망의 마음이 피어났다. 아빠의 사업 빚은 엄마의 몫이 되었다. 엄마는 식당일, 청소일 가리지 않고 돈을 벌었다. 그런데도 우리 집은 항상 가난했다. 일을 많이 해도 다 빚 갚는 데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아직 어린 언니와 나를 보살필 만큼의 돈도 남지 않았다.


학교에서 급식비 미납지를 줄 때마다 내 이름은 빠지지 않았다. 반 친구들이 모두 보는 앞에서 미납지를 받을 때마다 눈물이 차올랐다. 급식비는 청소년 시절 내내 나를 괴롭혔다. 중학생 때는 급식실에서 밥을 먹고 있는 내 앞에 성인 남성 두 명이 찾아왔다. 학교 급식을 담당하는 외주업체 사람이었다. 급식비를 내지 않았으니 밥을 먹을 수 없다고 내게 말했다. 반 친구들 뿐만 아니라 전교생이 내가 급식비를 내지 못한다는 걸 알리고 싶었던 걸까. 나는 그 자리에서 급식실을 떠나 집으로 왔다. 가난은 참 구차하다. 아빠 사업이 망했을 때 나도 망한 것이다. 내가 돌이킬 수 없는 상황에서 나는 휘청거렸다.


아빠는 그 방에서 15년 만에 나왔다. 내가 23살이 되었을 때였다. 방에서 살며시 나와 앉아 있다가 몇 년 후엔 다시 일을 시작했다. 넉넉지 않은 월급이지만 매달 꾸준히 돈이 들어왔다. 가족 모두가 돈을 벌기 시작했다. 아직 남아있는 빚을 갚느라 버거웠지만 그래도 돈이 융통되니 살만 했다. 이렇게 살면 곧 안정될 거 같다는 생각에 안심이 되었다. 아빠가 쓰러지기 전까진 말이다.


아빠는 2019년 봄 뇌출혈로 쓰러졌다. 다행히 빨리 발견해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지만 일을 그만두어야 했다. 그맘때 계약직이던 엄마도 직장을 잃었다. 아빠의 빚은 자연스럽게 언니와 내 몫이 되었다. 온갖 보험료, 생활비, 대출금도 우리의 몫이었다. 나는 학자금 대출로 2000만 원의 빚이 있다. 한 달에 35만 원씩 6년을 갚아야 했다. 학자금 대출을 포함해 내가 갚아야 하는 돈은 한 달에 75만 원이었다. 최저임금을 버는 나에겐 너무나 큰돈이다. 성인이 되고 돈을 벌기 시작했을 때 나는 중심 잡기를 시도했다. 적은 월급이지만 잘 계획해서 쓰면 괜찮았다. 가끔 먹고 싶은 걸 먹고, 갖고 싶은 걸 살 수도 있었다. 아주 조금 기대했다. 가난에서 벗어나기를


아빠가 쓰러지지 않았다면 우리는 가난에서 벗어났을까, 엄마가 계약직이 아니라면 그랬을까, 언니가 혹은 내가 대기업에 다녔다면 우린 가난에서 벗어나 자유로웠을까. 예순다섯 살이 넘은 나이에도 공장에서 고된 일을 해야만, 계약직이지만 잘리지 않고 버텨야만, 적은 월급을 쪼개고 쪼개 적금을 들어야만 겨우 숨 쉴 수 있을 만큼의 공간을 내주는 가난이었다. 우린 벗어날 수 있긴 했을까.


요즘 꿈을 자주 꾼다. 흰색 코끼리들이 신나게 달려온다. 내가 하늘을 날기도 한다. 집에 누워있는데 물이 차올라 내 몸이 붕 떠오른다. 용을 만나 숲을 뛰어다니기도 한다. 너무 생생하고 특이한 꿈들이다. 아침에 깨어 꿈해몽을 찾아본다. ‘큰 부자가 될 암시의 꿈이다.’ ‘일의 운, 돈의 운이 상승한다’ 하나같이 해몽이 좋다. 마치 불가능할 것만 같은 꿈이다. 어릴 적 내 꿈은 부자가 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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