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건 아집입니다. 그냥 개나 줘버리길요.
저는 평탄하고 전통적인 커리어 패스(career path)를 거친 사람은 아닙니다.
대학원까지 마친 후 첫 직장이 공무원이었고, 그 곳에서 5년이라는 꽤 오랜시간을 보냈어요.
그 후 커리어 전환을 위해서 느즈막히 유학길에 올랐었고, 유학 후 비즈니스로 발을 들인게 30대 중반이었습니다.
남들은 20대 중후반에 대기업에 입사해서 사원-대리를 거쳐 과장이 될 무렵 저는 대기업 지주사 Business Intelligence조직의 과장으로 바로 입사를 한거죠.
시간이 많이 지난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너무 스킬적으로든, 애티튜드 든 일할 준비가 안되어있었어요.
공무원시절에는 한글파일만 썼었지 MS오피스도 잘 사용할 줄 몰랐는데, 제가 들어갔던 부서가 메타 데이터를 분석하는 일이어서 그 일을 전문적으로 해왔거나 통계를 전공한 사람들과 함께 일하려니 실력도 딸리고 실수도 정말 많았죠.
또, 매우 느슨한 공무원 조직에서 일하다 사기업으로 오니 맥락을 읽을 줄도 몰라 눈치도 부족하고 빠릿빠릿함(a.k.a 알짝깔딱센)도 없었어요.
반면, 신생조직이고 그룹 회장님 직속 보고라인이어서 왜 이렇게 일은 많은지, 팀장이던 상무 포함 모든 조직원들이 거의 매일 매일을 새벽까지 일했고, 항상 주중에 일을 마치지 못해 주말도 하루 정도는 일했었죠.
그리고 조직장님의 기대수준은 또 얼마나 높은지 그렇게 미친듯 조직 전체가 달려가도 칭찬보다는 지적질 세례였죠.
그러니 저는 그런 저의 단점을 빠르게 커버하고 조직의 페이스에 맞추기 위해 최선을 다 했었는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던 것 같아요.
지금 생각해보면 직장내 괴롭힘이라고 고발 당할텐데, 당시 2010년대 초반 조직장이던 그 높은 분은 성격이 너무 괴팍해 저를 포함한 몇 명에게 대놓고 모멸감을 주는 발언과 행동을 많이 했었죠. 가스라이팅의 달인이기도 했고요.
비꼬고 인신공격을 한다던지
사람을 세워놓고 소리를 지른다던지
회식자리에서 남자 부장님에게 옷입는 센스에 대해 장장 2시간 동안 연설을 늘어놓는다던지
마우스를 집어 던지기도 했고요.
옆자리에서 일하던 동료 과장은 실신해서 실려나가기도 했답니다.
아뭏든 다시 가던길 가보면
저는 저의 특유의 무한 긍정감과 '할수 있다' 정신으로 이 상황을 타개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내가 지금보다 더 열심히 하다보면 압도적으로 이 일을 잘 해낼 수 있는 날이 올거고, 이 조직장에게 인정을 꼭 받아야겠다, 그 이후에 이직을 하겠다라고 생각한거에요.
이대로 그냥 도망치듯 나가버리면 왠지 나의 첫 사(社, private)기업 커리에가 망쳐지고, 평생 상처로 남을 것 같고, 앞으로 아무것도 잘 할 수 없을거다라는 생각도 있었어요.
그 생각은 두가지 측면에서 참, 바보같은 생각이었던 것 같아요.
첫번째, 그런 인간 쓰레기가 조직장으로 있는 조직에서는 하루라도 빨리 빠져나오는게 답이에요. 버티고 극복하면 돌아오는건 몸과 마음의 병이죠.
나는 나를 잘 모르는 그 사람에게 모욕감을 느끼면서 동시에 충성해 일해야 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세상은 크고, 수많은 사람들과 일자리가 있는데, 굳이 그런 사람을 매일 봐야할 필요가 없죠.
내 소중한 자아와 자존감은 지켜져야죠. 나 위에 일이 있는게 아니니까요.
두번째, 그 일은 내가 즐겁게 잘 할 수 있는 일이 애초에 아니었던 거에요.
나의 core 역량이 무엇인지 파악하지 않고 돈 많이 준다니까 일을 덥썩 물었고, 내가 잘 할수 없는걸 붙잡고 있는게 잘못된 일이었죠.
십수년이 지난 지금 돌이켜보면 나라는 사람은 '디테일' 보다는 '큰 그림', 분석 보다는 아이디어 내고 빠르게 달려가는걸(실행) 더 잘 하는 사람인데 데이터 분석 업무가 잘 맞았을 없죠.
아무리 노력을 하더라도 나의 역량이 거기에 없으니 퍼포먼스가 잘 나올 수 없고, 지적받고 심리적으로 위축되고, 효율성 낮아지고- 이런 악순환이 계속 되었던 것 같아요.
또, 수정에 수정을 거듭해 보고서 버전 30개(ver. 30) 만들고, 다 만들고 오타 나와서 새벽 두시에 100장짜리 보고서 두세번 재출력해 제본하고 하는 일들이 저에게 만족(fulfilling)을 주는 일이 아니었고, 따라서 집중도와 완성도가 떨어지는 부분도 있었다고 생각되요.
저는 지금도 그때 생각이 많이 나요. 내가 어떻게 2년 반이라는 시간을 그렇게 견딜 수 있었을까. 왜 내가 더 빨리 결단하지 못했을까 후회도 되고요.
물론 그 시간이 무의미했다는건 아닙니다.
그 엄청난 양의 인풋-물리적인 시간과 고뇌 덕에 초단기간에 빠르게 성장했고, 다음 챕터로 잘 넘어갈 수 있었죠.
엄청나게 몰입해서 일했던 것도 돌아보면 좋은 경험이긴 했어요. 고민의 깊이와 폭이 커져서, 체화가 되었으니까요.
그런데 그렇게까지 몸과 마음이 너덜너덜 해지면서 했어야만 했을까? 라고 생각해보면 그렇지는 않다는거죠.
십수년전 30대 중반의 순진했던 나에게 얘기해주고 싶네요.
그 일을, 그 사람을 극복하겠다는 생각은 개나 줘버려. 그냥 너에게 맞는 옷을 찾아 입어!
마음을 가다듬고 너가 더 즐겁게, 잘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발견해보렴.
너는 작은 디테일에 강한 사람이니, 새로운 아이디어를 내는걸 잘하는 사람이니
너는 그림 그리기를 잘하는 사람이니, 뛰어다니는걸 잘 할 수 있는 사람이니
너와 너가 하려는 일을 믿고 밀어 줄 수 있는 사람들을 당장, 빨리 찾아보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