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책임할 줄도 모르는 이들에게
“무책임할 줄도 몰랐던 나에게,
도망은 처음으로 건넨 위로였다."
무책임하기 싫어
꾸역꾸역 밀어 넣었던
해야 하는 일, 하면 좋은 일, 할 수 있는 일들이
어느 순간 덩어리가 되어 나를 잠식했다.
삼켜지면서도 무책임할 수 없어
하면 좋은 일, 해야 하는 일을 해나갔다.
잠식에서 다시 조금 벗어난 것 같았다.
삼켜진 부분이 마모된 줄도 모른 채
망가짐을 뒤로하고
다시 힘을 주어 해야 하는 일을 해나갔다.
마모가 번져 몸을 일으킬 수 없을 때에야
잠식에 삼켜짐을 택했다.
밀린 설거지가 가득한 싱크대도,
가득 쌓인 메세지도,
할 일을 정리한 체크리스트도,
모두 불이 꺼졌다.
나는 무책임한 사람이 되었다.
울리는 핸드폰을 무시하고 쇼파에 드러누웠다.
놀랍도록 아무 일도, 질책도 없었다.
벗어남으로부터 도망쳐서야 편해졌다.
잠식에서 도망가려 애쓰던 처절함이
잠식 안에서 나를 따스히 감싸주는 온기가 되었다.
무책임할 줄도 몰랐던 우직함으로부터 도망치자
나는 조금 비틀렸지만 이제야 살았다.
오늘 나는 도망쳤지만,
비로소 나임을,
나에게 건네는 처절한 위로임을 안다.
나는 도망으로 나를 안아줄 테다.
오늘도 나는,
마음을 글로 바꾸며 놓아주는 연습을 한다.
그렇게 나에게 다정해지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