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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r Zorba Mar 13. 2018

나는 좋은 아빠가 될 권리가 있다

(10) 첫째와 둘째 사이_아빠

아이가 떼를 너무 써서, 나도 모르게 울컥해서 매를 들었어요. 너무 화가 나서 아이가 겁에 질릴 정도로 혼을 냈는데, 순간 그렇게 나를 옥죄고 혼내시던 우리 어머니의 모습이 겹쳐 보여 소름이 돋더라고요.



 진료실에서 만났던 아이 엄마가 아이를 키우면서 겪었던 어려움을 이야기하며 토로한 내용이다. 그렇다. 우리는 알고 있다. 모든 양육은 대물림되기 마련이다. 아이가 성장해 가정을 이루고, 또 한 생명을 잉태하여 양육하는 과정에서 자신이 어린 시절 부모에게 받았던 양육의 형태는 가장 중요한 지침이 된다. 의식적으로 ‘우리 부모님이 했던 것’을 떠올려 이를 그대로 따르는 경우도 있지만, 무의식적으로 몸에 밴 습관들이 양육에 자연스레 적용되는 때가 더 많다. 그리고 주변 사람들은 놀라며 이야기한다. 


얘! 어쩜 아기에게 하는 게 너희 엄마랑 똑같니?


 당사자도 뒤늦게 자신의 행동에 과거 부모님의 모습을 겹쳐보며 묘한 감정을 느끼기도 할 것이다. 무의식적인 양육의 대물림은 말 그대도 ‘무의식’이라 자신이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물 흐르듯 자연스레 내 생각과 행동의 패턴을 형성한다. 그리고 아이를 키우는 데 있어서 그 영향력은 상당히 강력하다.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부모님에게 받은 양육을 아이에게 그대로 답습한다. 

 최근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는 학대, 방임과 같은 끔찍한 사건들에서 학대한 부모 자신도 학대의 그늘에 자라났음이 밝혀진 경우가 많았다. 보건복지부의 ‘2014년 전국 아동학대 현황’ 보고서에 따르면 아동학대 가해자 100명 중 적어도 5명꼴로 어린 시절에 같은 형태의 학대를 받은 적이 있다고 한다. 5%라는 수치가 적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드러난 신체적 학대의 행태 외에도 방임이나 언어적 학대 등을 고려하면 그 수는 더욱 많을 것이다. 성장 과정에서 부모와 부정적으로 상호작용했던 경험은, 아이의 성격이 형성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무의식의 수면 아래 가라앉아 있던 기억은 시시때때로 의식의 수면 위로 올라와 그 부모 자신도 모르는 사이 아래 세대의 양육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 참 안타까운 일이다. 


 극단적인 경우를 예로 들었지만 양육의 모든 순간에 부모의 영향이 묻어남을 부인할 수는 없다. 물론, 일반적인 경우라면 부모의 양육을 그대로 반복하는 것이 큰 문제를 일으키지는 않는다. 기껏해야 훈육이나 교육에서 의견 차이와 같은 미묘한 수준일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과정이 꽤 자동적이고 무의식적으로 진행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애써 알아차리고 조심하려 하지 않으면, 언제나 같은 실수를 반복하게 된다는 것이다. 나의 아버지는 대도시가 아닌 경북 외진 곳에서 막내아들로 태어나셨다. 어머니를 일찍 여의고, 학업을 위해 청년기부터 집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외롭게 자취 생활을 했다. 본인의 입으로는 절대로(!) 자신의 삶을 구구절절 이야기하지는 않는 과묵한 분이시기에, 아버지의 삶이 어떠했을까를 추측할 수 있을 뿐이지만, 당신의 성장기와 청년기는 무척 외로웠을 것이다. 응원과 지지 없이 목표를 향해서 걸어가는 삶은 얼마나 쓸쓸했을까. 필요한 것, 원하는 것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마음 한켠에 고이 숨겨 놓아야 했으리라. 성장 과정의 경험은 아버지에게 무뚝뚝하고, 감정적으로 인색한 성격을 심어주었다. 이성적이지만, 감정 표현에 극도로 무딘 성격. 이른바, 좌뇌에 치우친 성격이다. 자식들을 끔찍이 아끼면서도 쉽게 표현하지 못하고, 에둘러 겨우 마음을 드러내는 성격은 나에게도 영향을 끼쳤다.


 돌이켜 보면, 성장기의 나는 감정에 둔감했다. 감정이 분출되어야 할 사춘기는 맨송맨송하게 지나갔고, 연애는 늘 서투르기만 했다. 인간관계에서 마음을 열어야 할 대목에서 초치기 일쑤였다. 나 또한 아버지를 닮은 좌뇌형 인간이었다. 돌이켜 보면 내 감정이 어떠한지, 그리고 감정을 어떤 식으로 표현하는 것이 자연스러운지에 대한 감각이 부족했다. 눌려있던 마음들이 제자리를 찾는 데는 꼬박 20대의 모든 시간이 필요했던 것 같다. 모든 것을 부모님 탓으로 돌리는 것은 아니지만, 분명 부모님의 양육은 나의 감정에 영향을 미쳤다. 

 내가 받은 양육은 내 아이를 키우는 데 영향을 미쳤다. 첫째가 태어났을 때, 아이를 향한 사랑은 자연스레 생기고, 저절로 표출되는 줄로만 알았다. 이것이 큰 착각이었다는 것을 깨닫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첫째가 태어난 지 1년 반이 지났지만, 아이에게 하는 ‘사랑하는 우리 딸’이라는 말이 아직은 낯설고 간지럽다. 꼭 안고 볼을 부비는 행동도 나 스스로 어설프게 느껴지는 때가 많다. 아이는 나의 모습을 반영하는 거울이기에, 꼭 안아주면 엉덩이를 뒤로 빼는 걸 보니 또한 스킨십을 조금은 어색하게(?) 받아들이는 것 같기도 하다. 아내는 이런 나의 고백에 꽤나 놀란 눈치다. 이 또한 감정 표현이 잘 반영되지 않았던 내 어린 시절 양육의 영향일 것이다. 


 내가 선대의 양육을 반복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난 뒤, 처음에는 억울한 느낌이 들었다. 나의 삶이 내가 의식하지 못했던 그 무엇에 의해 굴러가고 있다는 사실이 안타까웠다.  그리고 이내, 조심스러워졌다. 가족들, 친구들, 그리고 나의 아이에게 미쳤을 부정적인 것들을 경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이에게는 표현하기 위해 노력 중이다. 아직은 대화가 통하지 않는 아이를 꼭 안아주고, 무슨 말인지 모를 웅얼거림에 맞장구쳐 주는 정도가 다겠지만. 내가 무의식적으로 해 왔던 것을 의식적 노력으로 바꾸려 한다. 감정표현을 자주 하고 아이의 감정에 가까이 다가가려 노력하는 것이 우뇌를 활성화하고, 좌로 치우친 뇌의 균형을 잡아주지 않을까.  



 중요한 것은, 우리가 좋은 아버지가 되기 위한 노력을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남들은 자연스럽게 나오는 사랑이, 나에겐 꼭 의지를 갖고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 억울하게 느껴지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면 부모가 나에게 했던 대로, 그래서 내가 서러움을 느꼈던 그대로 아이를 대할 것이기에. 그리고, 시간이 지나 돌아보면 무분별한 양육의 대물림은 후회를 남길 수 있기에. 물론, 그 과정이 쉽지만은 않을 것이다. 인생에서 반복되는 생각, 감정, 행동의 패턴을 알아차리는 것은, 자신의 삶 전체를 관통하는 통찰일 수 있다. 기억하기 싫었던 유년기의 트라우마를 마주할지도 모른다. 삶을 살아온 만큼은 아니겠지만, 꽤 많은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러니 기억하자. 우리 모두에겐 좋은 아버지가 될 권리가 있으며, 우리는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을. 방향을 정한 순간부터 변화는 조금씩 일어나리라는 것을 말이다. 


 여담이지만, 아버지에게도 변화가 생겼다. 손녀가 태어났고, 사랑스러운 아이 앞에서 마음이 벽이 무장해제되기 시작했다. 이 연약하고 힘없는 아이는 부모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하며, 물리적인 접촉뿐만이 아닌 애정의 표현 또한 끊임없이 필요하다. 아이를 바라보는 이는 아이의 원초적인 감정 표현에 감정이 동조되고(synchronization), 자연스레 우뇌가 열리기 마련이다. 나에게, 아내에게 전화를 걸어 아이의 근황을 묻고 누구에게 들킬새라, 조심스럽게 사랑을 표현하는 아버지의 뇌도 지금쯤은 균형점을 찾아가고 있으려나. 아버지의 변화가 눈물겹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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