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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r Zorba Apr 20. 2018

둘째가 생겼다. 생겨버렸다?

(12) 첫째와 둘째 사이_아빠

인간에게 낯섦이란 ?


 인간낯선 것을 처음 접하게 될 때어떤 반응을 보일까? 물론 정답은 ‘사람마다 다르다’. 사람은 저마다 타고난 성격 요소에 매일의 경험을 덧씌우며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을 만들어나간다. 다른 성격의 수 만큼 낯선 사람, 낯선 환경을 대하는 태도도 저마다 다양하다.


 하지만, 보편적인 반응도 물론 존재한다. 인류의 조상은 들판 너머 저 멀리 보이는 낯선 물체가 나를 잡아먹을 사자인지, 나에게 일용할 양식이 될 초식동물일지 최대한 빠르게 판단해야 했다.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거리에서만 판단한다면, 자칫 사자에게 잡아먹히기 십상이니까. 이성적으로 낯섦을 판단하려는 이들은 맹수들이 자주 출몰하는 들판에서 살아남기 힘들었다. 결국, 낯선 그림자만 봐도 본능적으로 일단 줄행랑을 치거나 바위 뒤에 숨어 동태를 살피는 ‘겁쟁이’들 만이 살아남았다는 이야기. 그러니 우리는 이러한 겁쟁이들의 후손일지도 모른다. 초원의 그림자를 보자마자 일단 경계하고 도망칠 준비를 하는 습관이 일부 유전자 정보에 담겨 내려왔다는 것이 바로 진화심리학자의 주장이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맞닥뜨린 낯섦이 위기인지 아닌지를 이성적으로 판단하기 전에 몸의 반응이 먼저 나타난다. 긴장하게 되고, 어딘가 불편하고, 가슴이 답답해지는 자동적인 생리 반응이 몸을 지배한다. 낯섦에서 이어지는 몸의 반응은 자연스럽게 회피를 부른다. 갑작스러운 변화나 큰 이벤트를 맞이하면 이성적으로 대처하기보다 일단 ‘현실도피’를 하고 싶은 것도 우리 유전자에 새겨진 본능이 아닐까?


아빠도 아빠가 처음이라서



 나에게 첫째와의 만남은 굉장히 낯설었다. 아내가 만삭이 되어 곧 아이를 낳게 될 시기가 다가와도, 그저 비현실적인 느낌이었다. 불러오는 아내의 배를 보며, 학생 때 배웠던 산부인과 교과서 내용이나 잠깐씩 떠올랐다 사그라질 뿐이었다. 점차 늘어나는 육아용품으로 좁아지는 집도 큰 감흥은 주지 못했다. 육아 선배들이 해주는 진심 어린 충고도 한 귀로 들어왔다 금세 다른 귀를 통해 허공으로 날아가 버렸다. (지금은 후회할 따름이다.)


 그렇게 첫째가 태어났다. 어라, 이게 아닌데? 책이나 드라마처럼, 나도 갓 태어난 아이를 안고 행복에 가득 찬 눈물을 글썽이게 될 줄 알았다. 울컥하긴 했다. 하지만 모포를 두른 아이가 품에 안겨 울기 시작하자, 가장 처음 느낀 감정은 ‘불안’ 이었다. 이 상황이 나에게는 너무 어색했다. 나에게 전적으로 의존하는 약하디 약한 생명이 지금 내 품에 있다? 처음엔 아이가 눈을 한쪽만 뜨고 있어 어딘가 문제가 있는건지 고심하다, 이내 두 쪽을 다 뜨고 아빠를 바라보는 모습에 잠시 안도의 한숨을 내쉬기도 했다. 분명 아내의 배 안에서 10개월간 천천히 자랐을 텐데, 마치 아무 예고도 없이 하늘에 뚝 떨어진 것 같은 이질감마저 들었다.


 그렇게 만난 낯섦을 견딘 17개월이었다. 둘 위주였던 가정이, 셋이 되었다. 부부 위주의 삶이 아이를 중심으로 바뀌었다.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아내에게도 부단한 내적 투쟁이 있지 않았을까. 부부가 정신없이 아이와 시간을 보내는 동안 점차 아이가 있는 일상이 익숙해졌다. 불안과 낯섦은 가시고 감사함이 밀려왔다.


둘째가 생겼다. 생겨버렸다?



 이제 겨우 첫째와 함께하는 삶이 익숙해질 무렵, 둘째의 소식을 들었다. 첫째를 처음 만났던 낯섦과 그간의 날들이 떠올랐다. 부끄럽지만 100% 기쁠 수는 없었다. 아니, 첫 번째 감정은 황당함과 당황스러움이었음을 고백한다. 아마 본능적인 반응이었으리라. 아이와 함께하는 세 명의 삶이 행복했지만, 네 명의 삶은 언뜻 떠오르지 않았다. ‘아빠도 아빠가 처음’인지라 첫째와 함께하는 육아는 낯선 것투성이였다. 이제야 찾아온 익숙함에 한 사람의 가족이 더해진다는 상황이 또 ‘낯설었다’. 그렇게 10개월쯤 전 처음 둘째 소식을 들었을 때는 복잡미묘한 마음이었다. 책임의 무게가 어깨에 실린 양 양쪽 어깨가 자주 뻐근해지고 했다.


 첫 아이의 성장을 염두에 두고 짰던 삶의 과정을 다시 리셋해야 하는 것도 마음이 불편한 이유 중의 하나였다. 언제까지는 이 지역에 있다가, 더 빛나 보이는 것을 좇아 다른 지역으로 가서, 어떤 식으로 성공을 하겠다는 허무맹랑한 스토리였을 뿐인데, 둘째 소식과 겹치니 왜 그렇게 간절해지던지.


결국, 또 시간이 해결해주니까


 나를 비롯한 대개의 사람은 낯선 것을 만나면, 본능적인 회피를 도모한다. 나에게는 부모라는 이름이 그랬다. 아직 준비가 안된 것 같은데, 아낌없이 주어야 하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이 낯설고 두려웠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 되면 결국 이를 받아들여야 하는데, 이 또한 스트레스투성이다. 수용해야 하는 것들을 인정하는 데만도 꽤 시간이 걸린다.

 그렇다. 수용에는 그만큼의 시간이 든다. 그러니까 살짝 바꿔 말하면 시간이 답이 된다. 시간이 흐르면서는 낯섦이 익숙함으로 조금씩 대체된다. 집을 좁게 만드는 ‘주범’으로만 생각했던, 거실을 가득 채운 아이의 장난감이며 책들이 이제는 당연한 배경이 되었음을 나는 기억해야만 한다.



 인생이 어디 마음대로 흘러가던가. 거창한 인생 계획은 결국 둘째가 아니었어도 진작에 파투났을 지도 모른다. 또 어느 타이밍에 셋째가 ‘뿅’하고 인생에 나타나지 않는다는 보장이 있는가. 그리 생각하니 그간 낯섦을 피하고, 이유 없이 불편해했던 시간이 아까워지기 시작했다. 삶에 핑계가 늘어나는 것이 어리석은 일이라는 것을 왜 인제야 알았을까.

 

 그러니 낯섦에 대해 꼭 해야 할 것은 ‘열심히’ 견디는 다. 그리고 이를 위해 낯섦을 함께 나누어야 한다. 아직도 어린 첫째와 배 속에서 자라는 둘째 사이에서 자신도 황망했을 텐데 잘 견뎌준 아내가 큰 도움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육아로 지친 부부가 서로를 위로하고, 보듬어주며 인내하는 과정은 꼭 필요하다. 뭐, 어차피 우리가 마주치는 모든 것들은 항상 새롭고 낯선 것들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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