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첫째와 둘째 사이_엄마
“우리 아이를 왜 업고 계세요?” 퇴근길에 엄마는 생면부지의 사람에게 맡겨진 나를 목격하곤 했다. 때때로 할머니가 이모할머니에게 나를 맡기시고, 이모할머니가 잠깐 옆집 아주머니께 나를 맡기는 식이었다. 그야말로 한 아이를 온 동네가 키우던 시절이었다.
눈 오는 아침, 엄마의 스타킹을 끌어내리며 출근을 만류하던 기억이 내게는 있다. 외조모의 등에 업혀 잠이 덜 깬 채 나는 아침마다 엄마와 작별했다. 나는 워킹맘의 딸이었다. 출산휴가도 제대로 없던 무렵, 엄마는 나를 낳고서 1개월의 몸조리 후 곧장 출근했다고 한다. 외할머니는 나를 정성껏 보살펴 주셨다. 그럼에도 나는 늘 엄마와의 시간이 모자랐다. 형제 없이 혼자 자란 내게 엄마는 더욱 특별한 친구였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퇴근 후에 엄마와 보낼 수 있는 시간은 한계가 있었다. 퇴근 후 집안일로 분주하신 엄마의 등에 대고, 나는 그날 일어난 일들을 끝없이 늘어놓았다. “엄마, 제 이야기 듣고 있어요?” 엄마가 문맥을 놓치고 있는 건 아닌 지 나는 자주 물었다. “도대체 등장인물이 몇이야?” 엄마는 스토리를 놓친 것에 대한 미안함을 그렇게 피해 가시곤 했다.
초등학교 4학년 때까지 나는 외조모의 조력으로 자랐다. 그리고 다른 지역으로 이사한 다음부터는 엄마의 퇴근시간까지 학원 뺑뺑이를 돌았다. 어쩌다 일찍 집에 도착한 날은 아파트 경비 아저씨와 말동무가 되어 놀며 엄마를 기다리기도 했다. 이른 사춘기 무렵이었을 것이다. 어두운 집에 스스로 불을 켜고 들어가는 게 싫다며, 엄마가 귀가할 때까지 거실 불을 끈 채 어둠속에 앉아있었던 날도 있었다고 한다. 엄마에게는 가슴 아픈 일이었을 것이다.
엄마는 빈틈없는 분이셨다. 5시에 기상해 나의 도시락과 하교 후 먹을 간식들을 가지런히 마련해 두셨다. 엄마는 퇴근 후에도 바쁘셨다. 끓는 물에 행주를 삶아 바짝 말리고, 바닥에는 먼지 한 톨 보이지 않게 닦고 또 닦으셨다. 음식물이나 쓰레기가 냄새를 풍기며 집안에 쌓여있는 일은 결코 없었다. 갑작스런 비에도 우산을 가져다주지 못할 처지였던 엄마는 여러 개의 우산을 미리 내 사물함에 넣어주셨다. 그땐 나의 필요를 전 방위로 챙겨주는 엄마에 대한 감사 보다 평소에 허술할지라도 내 앞에 언제든 나타나 줄 수 있는 엄마가 좋았을 것이다.
일하는 엄마에 대한 나의 감정은 복합적이었다. 엄마가 다니시는 회사가 자랑스러웠고, 항상 단정한 차림의 엄마가 멋져보였다. 부모님의 맞벌이 덕에 경제적으로 어려움 없이 성장할 수 있었던 것도 감사했다. 하지만 마음 한 구석에는 가사일, 직장일로 바쁘셨던 엄마에게서 후순위로 밀려난 것 같은 나 자신에 대한 가엾음도 있었다.
그 복합적 감정은 지금 엄마로서의 내 삶에 이런저런 모양으로 나타난다. 나는 설거지는 나중에 하더라도, 아이와 함께 뒹굴고, 안아주고 놀아주는 데 많은 시간을 쓰고 있다. 친정에서 보고자란대로 깨끗하게 정돈된 집에 대한 기준은 높지만, 아이가 칭얼대고 나를 찾으면 대부분 하던 일을 중단하고 아이 곁으로 가 시간을 보낸다. 지금이 아니면 할 수 없을 것 같은 육아에 좀 더 가치를 두고, ‘나의 삶’은 좀 더 연기하고 있다. 도중에 마음이 바뀌어, 나의 일을 찾아 육아로부터 조금 거리를 둬야할 때가 오더라도, 아이가 자신의 일상을 나눌 상대가 있어야할 것 같아, 기왕에 시작한 육아이니, 둘째도 재빨리 임신해 첫째와 함께 키우기로 했다.
현재 나는 지방의 한 소도시에서 육아전업맘으로 살고 있다. 서울에서 학교를 졸업해 직장생활을 하다가, 지방에서 일하는 남편을 만나 결혼해 따라 내려왔다. 그리고 남편의 군복무와 취업으로 네 번의 지역이동과 출산/육아를 하면서 한 직장에 더 정착하기 어려운 형편이 됐다. 나를 끔찍이 아끼는 선배며, 친구들은 "인재낭비다” , “니가 졸업한 학교가 꽤 좋은 학교란 걸 잊지마”하며 나에 대한 무한애정을 탄식으로 대신하고 있다. 그 말을 애써 외면하듯, 나는 “내가 뭐 잘 난 게 있다구, 괜찮아.” 해왔지만 속사정은 복잡하다. 출산 전에는 파트타임으로 소일거리는 해왔지만, 한 분야에서 꾸준히 경력을 쌓을 수는 없었다.
처음 결혼해 내려와서는 취업전선에 적극 뛰어들기도 했었다. 서울은 생활비에 비례해 월급이 높은 것이라 생각해, 월급에 대한 기대수준을 낮췄다. 하지만 결혼을 이유로 서울에서 직장을 그만 둔 나에게, 출산하면 또 그만 둘 것이 아니냐는 날선 질문은 따라올 수밖에 없었으리라. ‘성별, 결혼유무 등은 무관하게 채용한다’는 회사의 채용 방침은 무색했다. 같이 일하자고 했다가도, 결혼사실을 알게 되면 “입사하자마자 애 낳으러 갈수도 있겠네요?”하며 채용 사실을 취소하기도 했다. 기왕이면 미혼인 사람을 선호하는 회사측의 마음도 이해는 된다. 무슨 큰 흠이라도 있어 지방으로 내려온 게 아닌가 하고 의문을 갖기도 하더라. 지역대학 출신을 우대하는 경우도 많았다. 역차별이라면 역차별이 아닐까. 내가 모든 조건을 막론할 만큼의 인재가 아니라 일자리를 못 얻었을까. 운이 없어서였을까. 어찌되었건 나는 지역이 원하는 인재로서 여러모로 자격미달인 셈이었다.
이런저런 이유로 딱 맞는 직장을 만나지 못하고 경력이 단절된 채 나는 현재 육아에 전념하고 있다. 이렇다할 기술 자격증도, 대학원 학위도 없는 문과 출신이 기존에 일하던 곳에서 훌쩍 떠나와 갑작스레 할 수 있는 일은 드물었다. 어쩔 수 없이 육아에 전념하는 처지가 됐다. 하지만, 자기분야에서 꾸준히 일하는 또래 워킹맘들을 보면 마음이 흔들리곤 했다. 피해의식도 생겼다. 필요이상의 자기방어를 하는 내 모습에 스스로 놀라기도 했다. 일하고 싶은 욕망과 나는 자주 마주했다. 워킹맘들이 당장은 고단하겠지만, 경력을 이어가는 것을 보면 ‘나는 지금 여기서 무얼 하고 있는 걸까?’ 하는 자괴감이 밀려왔다. “저들은 양가 어머니 중 누군가를 전적으로 육아에 희생시키는 중일거야.” 이렇게 내 마음이 편한대로 생각하면서. 하지만 일하고 싶은 마음을 갖는 것 자체가 아이에게 미안하기도 했다. 내가 그 입장을 겪어봤기 때문이다.
친정엄마는 늘 아쉬움이 많은 눈치시다. “나가서 일을 해야 네 삶이 있지, 언제까지 육아만 할 거야?” 그렇다고 “엄마는 외할머니가 육아를 전담해주셨지만, 나는 엄마가 일하고 있어서 그럴 처지가 못 되잖아요.” 라는 말로 되받지 않는다.
이참에 ‘엄마는 누구를 위해 일하셨던 걸까?’ 생각해 봤다. 어느 때는 나를 위해서라고 생각했다. 딸이 원하는 것은 대부분 해주셨던 워킹맘 엄마를 가진 덕에 나는 부족함 없이 자랐다. 올해 환갑을 맞이하는 엄마는 여전히 일하고 계신다. 아침마다 출근하는 게 얼마나 기쁜 일인지에 대해 지금도 자주 말씀하신다. 그러니 엄마 스스로를 위해서 일한 게 더 컸지 않았겠는가, 생각해 본다. 그래서 나는 불행했나? 그렇지 않다. 엄마의 즐거운 모습, 자부심과 긍지를 갖고 살아가는 모습이 지금 생각해보면 나는 참 좋았던 것 같다.
곧 퇴직을 앞둔 친정엄마에 대해서도 나의 기대는 바뀌지 않았다. 엄마는 엄마의 가치관으로 일궈온 엄마의 삶이 있었기에, 나 역시 내가 살고픈 대로 자유로이 살아올 수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한 존재가 한 존재에 메여있다는 것은 너무도 슬픈 일이다. 어차피 육아에 집중하기로 한 거라면, ‘자발적 육아맘’으로서의 긍지를 가져보기로 했다. 기왕이면 이 시간을 다시 없이 행복한 시간으로 만들어 보는 것 역시 ‘내 일’이라 생각해 보기로 한 것이다. 이 역시 내 인생의 한 경력으로서 의미있는 사건이 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지 않을까. 말처럼 쉽지 않을 수도 있다. 내가 치밀하게 인생을 계획하는 전략가 스타일이 아니어서 이렇게 우겨보고 있는 일일지도 모르겠다. 생각한대로 사는 게 아니라, 사는 대로 생각을 고쳐먹으며 제 마음 편하게 사는 것 아니냐고 묻는다면, 그렇다고 할지도 모르겠다.
태양계의 행성들이 일정한 궤도를 유지해 공존하는 것처럼 우리 삶 역시 그와 닮아있다. 밑으로 동생 넷, 제 아이 여섯, 손녀 둘, 도합 12명의 아이를 키우고도, “내가 10년만 젊었어도 네 애를 좀 돌봐 줄 텐데......” 하시는 87세의 육아전문가, 우리 외할머니. 육아와 워킹을 병행하며 삶이 고단했을 터임에도, 딸이 일하지 못하고 있는 처지가 늘 안타까운 엄마. 할머니와 엄마 사이에서 삶을 고민하는 나. 이런 각자의 삶은 어떤 가치가 우월하고, 어떤 인생이 열등하다고 할 수 없다. 외할머니와 엄마가 살아오신 시대와 삶은 나와 다르지만, 그들의 삶에 대한 긍정과 긍지에서 나는 또 이 시대를 살아갈 힘을 얻는다. Here and Now. 그것이 중요한 것 같다. ‘내가 지금 여기서 어떤 생각과 태도를 가지고 이 삶을 살아나갈 것인가.’ 그것에 대한 분명한 의식이 있다면, 나는 가을 바람의 코스모스처럼 주변의 말소리나 시선에 더 이상 오락가락 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육아하면서 반복해서 읽는 책이 있다. 가수 이적의 엄마이자, 아들 셋을 잘 키운 엄마로 유명한 여성학자 박혜란 선생님의 책이다. 바로 이 구절이 내 마음을 가장 세게 잡아끈다.
태어나서 가장 잘한 게 있다면 아이 셋을 낳은 것, 그리고 마흔 넘어 적성에 맞는 일을 찾은 것, 그 두 가지다.
<다시 아이를 키운다면> 중에서
마음에 갈등이 생길 때마다 나와 비슷한 상황에서 인생을 잘 살아나오신 분들의 삶을 들여다보며 용기를 얻는다. 어차피 육아전업맘과 워킹맘의 삶을 동시에 사는 것은 불가능하다. 다소 싱거운 결론일 수는 있겠으나, 엄마 자신이 선택한 삶에 대한 긍지로 아이를 키운다면, 아이도 언젠가 엄마의 마음을 이해할 날이 올 것이다. 엄마 스스로가 본인의 선택에 대해 분명한 이유를 가진다면, 시간이 지나서도 후회가 덜 할 것이니 말이다. 이렇게 자발적으로 일하지 않기로 결심한 나도 하루에 몇 번씩 갈등을 겪었는데, 이미 아침마다 직장으로 향하고 있는 워킹맘들 마음은 오죽하겠는가. 그 죄책감은 나와 비할 수 없이 클 것이다. 그러나 죄책감부터 갖지 말자. 완벽한 엄마는 없다. 그저 우리의 상황에서 최선으로 충분한 엄마상을 만들어 가는 게 우리 모두에게 좋지 않겠는가.
두 아이를 교육기관에 보내기 시작할 무렵 나는 세상으로 나가기 위해 작은 일부터 다시 시작하려 한다. 세상이 내게 주는 저항보다, 내가 스스로에게 주는 저항이 제일 견디기 어려운 것이었음을 이제는 어느 정도 안다.
친정엄마도, 외할머니도, 나도 주어진 그 순간 엄마로서 모두 최선을 다해왔다. 그걸로 된 것이다. "엄마 인생이 나 때문에 이러저러 했기에 나 역시 엄마가 원하는 삶을 살아야할 것 같다"는 덫 때문에 아이가 제 인생을 거꾸로 살지는 않았으면 한다. 내가 그랬듯, 내 아이 역시 그런 감정에 자유한 채로 살아가길 바란다. 아이들이 살아갈 세상은 내가 경험한 어떤 세상보다도 새롭고, 감히 상상할 수도 없는 다이나믹스가 존재할 것이다. 그러니 내가 아이의 올무가 되는 것이 가장 위험할 수 있다. ‘내가 나 스스로 자유함으로 인해 아이의 인생을 발목잡지 않을 수 있다’면 그 사실 만으로도 족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