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첫째와 둘째 사이_아빠
이기주 작가의 <언어의 온도>라는 에세이집을 휘적휘적 읽던 중, 눈에 띄는 꼭지가 보였다. ‘딸에게 보내는 굿나잇 키스.’ 시대의 문인인 이어령 교수의 에세이를 읽은 작가가 그 소회를 적은 글이다. 음, 아직 읽지 않은 책을 다른 작가의 글을 통해 보니까 좀 이상한 기분이 든다. 아니, 이상한 기분이라는 게, 실은 이어령 교수가 딸을 일찍 떠나보냈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기에, 그 제목만으로 순간 사무치는 그리움의 감정이 느껴진다. 나도 딸 가진 아빠이니까 제목에도 감정 이입이 되나보다.
그간 그의 글에서 느낀 이어령 교수는 훌륭한 저술가지만, 한편으론 지독한 완벽주의자다. 스스로 고백하는 젊은 시절의 그는, 젖먹이와 아내에게 사랑을 내비칠 틈도 없이 연구와 저술에 몰두했다고 한다. 그가 독서와 연구를 할 때면, 아내는 아이를 업고 행여나 서재에 있는 남편에게 방해가 될까 어두운 골목길을 서성이곤 했다. 아이가 새 잠옷을 입고 아빠에게 자랑하려 방 앞을 서성이다, 글의 흐름이 끊길까 골몰하는 그의 등만 보고는 다시 돌아갔다는 이야기도 있다. 지독한 노력과, 완벽주의적인 열정은 그에게 많은 영광과 명예를 안겨 주었지만, 그만큼 그의 길은 가족과 함께할 수는 없는 좁고도 외로운 길이었다.
늘 아버지의 사랑에 목말랐던 딸은 이른 나이에 아버지의 사랑을 대신할 누군가를 찾았고(딸인 故 이민아 변호사의 편지에서 밝힌 내용이기도 하다.), 결혼을 위하여 도미(渡美)한다. 그러나 누군가를 대신해 사랑하는 일은 이루어질 수 없는 허상임을 채 알기도 전에, 급하게 삼켜버린 관계는 결국 파국을 맞는다. 이혼, 투병 생활 등 우여곡절 끝에 피나는 노력으로 국제변호사가 되지만, 그녀는 결국 암에 걸려 세상을 떠난다. 더 안타까웠던 사실은, 그녀가 사망할 때의 이어령 교수는 예전의 완벽주의적인, 성공 지향적인 냉정한 아버지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딸을 따라 종교를 믿고, 삶과 영성에 대한 기쁨, 그리고 성공과 명예를 좇느라 가족을 잃어버렸던 과거에 대한 참회를 뼈저리게 느끼고 있던 때였으니, 그때 들려온 딸의 사망 소식은 얼마나 가슴이 아팠을까.
<딸에게 보내는 굿나잇 키스>. 이어령 교수의 이러한 삶의 배경을 알고 있다면, 아니 딸을 가진 아버지라면, 제목만 봐도 가슴 속에서 울컥하고 새어 나오는 무언가가 느껴지리라. 졸린 눈을 비비며 먼발치서 연구에 몰두하는 아버지를 바라보는 어린 시절 딸의 모습이, 그는 보지 않았어도 얼마나 사무칠까. 상상 속에서, 어린 딸을 부여안고 볼을 부비며 잘 자라고, 좋은 꿈 꾸고, 내일 또 보자고 굿나잇 키스를 하는 자신을 모습을 수백 번이고 되돌려보지 않았을까.
첫째가 잘 시간이 되어, 책을 잠시 덮고는 아기 띠를 하고 다시 아이를 안았다. 졸린 눈을 부비다가 어느새 고개를 아빠의 가슴팍에 묻고 깊은 숨소리를 내는 첫 아이를 바라본다. 맨들하고 예쁜 이마에 지긋이 입을 맞추니, 입술 끝에서는 잠투정을 잠시 했던 아이의 이마에서 배어 나온 땀이 축축하고 따뜻하게 느껴진다. 잘 자렴, 우리 딸. 내일 또 만나자. 마음속으로 새삼 안 하던 굿나잇 인사를 건넨다.
티베트의 속담에는 ‘내일과 다음 생 중에, 어느 것이 먼저 찾아올지 우리는 결코 알 수가 없다’라는 말이 있다고 한다.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것이 인간의 서글픈 삶이다. 이어령 교수가 아이에게 사랑을 줄 수 있는 때를 놓치고, 이제는 돌아오지 않을 곳으로 가버린 딸을 사무치게 그리워하는 것을 보며, 모든 일에는 적당한 때가 있음을, 그리고 어린 딸을 안고 굿나잇 키스를 할 수 있을 때가 이 시기가 지나면 없을 수도 있음을, 다시 한번 깨닫는다. 쉬 안을 수도 없게 훌쩍 커버리고는, 이내 아빠의 입맞춤을 부끄러워할 때도 금방 올 것이기에.
여담이지만 아내는 책을 보다 너무 슬퍼, 결국 다 읽지 못하고 덮었다고 한다. 채 몇 페이지 되지 않아, 페이지가 접힌 상태로 서재에 꽂혀 있다고 했다. 나도, 아직은 책을 보기가 조심스러운 것 같다. 제목만 읽어도 내심 울컥할 정도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