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첫째와 둘째 사이_엄마
어렵게 아이를 가진 환희와 축하 인사를 나눈 지 얼마 안 된, 임신 16주 무렵이었다. 늘 세심하게 산모의 상태를 챙겨주시는 의사 선생님은 아기의 성별을 내가 묻기도 전에 알려주었다. “엄마 닮았네요. 요즘은 딸을 선호 하시더라구요, 엄마도 딸 기다리셨죠? 축하드려요” 안개꽃같이 화사한 선생님의 축하 멘트를 들으면서도, 내 머릿속으로는 계산기가 바쁘게 두드려졌다. 부부는 병원을 나서자마자, 조금은 아쉬운 시험 성적 결과를 알리듯 조심스레 시부모님께 전화를 걸어 “딸이에요” 했다. 전화기 저편에서도 “첫 딸은 살림꾼이야. 좋구나” 하는 목소리가 전해졌다. 평소 같으면 며느리 바꿔봐, 하셨을 것 같은데, 거기서 대화가 끝난 것 같다. 괜한 생각일 것이다.
남편은 아이의 성별을 알게 되어 기쁜지, “우리 딸이 탈 유모차 구경하러 갈까? 이제 육아용품 고를 때, 핑크 할까, 블루 할까 고민 안 해도 되겠어.” 했다. 우리는 백화점으로 향했다. 육아용품을 구경하던 중, 형님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딸이라며? 축하해.” 정말 축하 전화였는데, 나도 모르게 목이 메어 있었다. 당황한 형님이 “올케 울어? 딸이라 실망한 거야? 괜찮아. 둘째도 낳고, 또 셋째도 낳으면 되지. 또 셋째까지 딸이어도 어때? 다 너무 이쁠 거야.” 아침에 일어나 자연스레 눈이 마주치자 잘 잤니, 하는 으레 인사 정도였는데, 나도 모르게 눈물이 쏟아졌고 소리내어 울고 말았다.
아버님이 아들을 원하실 거라는 말을 가족들에게 누누이 들어와서 여서일까. 노력하면, 목표하던 것을 어느 정도는 이루며 살아왔던 나는 어른들의 기대를 저버리는 일을 마주하는 게 얼마간은 고통스러웠던 것 같다. 딸이면 어때? 하는 의연한 마음은 온데간데 없어지고 내 마음 나도 모르는 상태가 돼버린 것이다.
주변 사람들의 아이의 성별에 대한 생각과 기대는 모두 달랐다. 남자 형제들이 사회적으로 성공해 효도하는 것을 봐오신 시어머니에게는 아들이 좋아 보였을 것이다. 딸 다섯을 기르셔서 평생 아들에 대해 아쉬움이 많으셨던 외조모는 노후에 딸들이 든든한 지원군이 되자 흐뭇해하셨다. 그런 가정에서 자란 나는 '엄마의 행복지수에 기여도가 클 것 같은' 딸을 선호하는 경향이 컸다. 이처럼 성별에 대한 기호와 그 배경도 다양했다. 하지만, 둘째를 임신한 지금도 어떤 성별을 원하느냐는 질문을 자주 받는다. 하지만 그 질문은 어폐가 있다고 생각한다. 원한다고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영부영하다 보니, 정작 우리 부부가 아이에 대해 진심으로 축하하고 이야기 나눌 시간은 건너뛰게 됐다. 배 속의 아이에게 미안해졌다.
첫째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비슷한 일은 또 있었다. “기왕이면 둘째는 아들 낳을 수 있도록, 큰 애 이름을 지어보자.” 나는 기나긴 유도분만 끝에 수술로 출산을 하고, 겨우 회복 중이었던 터라, 시어머니의 늘 하시던 말씀도 더 섭섭하게만 들렸다. 첫째 아이를 축복하기에도 바쁠 때인데, 서운한 마음이 가득해졌다. “다 너희 좋으라고 하는 말이야. 아들도 있고, 딸도 있으면 더 좋잖아.” 사랑해서, 관심으로 하는 말이라는 데도 우리는 이따금 상처를 받는다. 출산은 부부에게 ‘인생경험’이라 할 만큼, 큰 이벤트였기 때문이다. 외할아버지를 여읜 지, 한 달도 안 되어 태어난 딸은 어느새 온 가족의 기쁨이 되었다. 사람이 나고 죽는 일이 가장 큰 이벤트라는 걸 실감하던 중이었다. 충분히 축하받고 축복해주고 싶었다. 딸은 너무나 예뻤다. 손가락, 발가락은 물론 손톱, 발톱 하나하나가 빠짐없이 있는 것이 얼마나 신기했는지 모른다. 그리하여 부부는 한글 자모음의 어울림, 아이의 태명, 아이의 인생 등을 생각하며 한자의 뜻까지 고려해, 아이의 이름을 직접 지었다. 낳을 지 안 낳을 지 모르는 둘째 아이를 고려해 첫째 아이 이름을 지을 순 없었다.
벌써 1년도 더 지난 일이다. 그리고 지금은 둘째 아이의 성별을 기다리는 중이다. 정녕 ‘아들 바라기’는 잘못된 것이고, 딸을 낳아도 좋다고 말해주는 사람들만 쿨한 것일까? 아들, 딸 상관없다는 내 마음은 진심일까? 생각해 보기로 했다. 육아와 경력단절을 몸소 체험 중인 나는, 첫 아이의 성별을 기다릴 때와는 완전히 다른 감정들이 겹쳐 일어난다.
최근 워킹맘, 육아맘들의 고충을 대변하며 우리 사회에 육아 환경을 둘러싼 토론의 장을 넓혀준 책 ‘82년생 김지영’을 읽으며 워킹맘인 대학 동기들과도 열띤 토론을 벌였다. “친정 엄마가 육아를 도와주셔서 일을 하고 있지만, 우리의 미래 역시 다르지 않을 거야” 어느새 한 아이의 부모가 된 우리는, 미래에도 육아의 주체이면서 워킹도 병행해야 하는 한 여성(딸이나 며느리)을 위해 할머니로서의 희생을 벌써 각오하고 있었다.
“똑같이 석/박사 했는데, 왜 구조조정 얘기만 나오면, 애 낳은 여자들만 가시방석이 돼야하느냔 말야” 또 다른 비명도 들려온다. 부모세대에서는 여성이라는 이유로 교육의 기회가 적었고, 육아 역시 여성의 전유물로 인식됐기에, 그 한이 오죽하겠나 싶어 앞선 세대들의 아들 바라기 마음도 이해가 됐다. 그리고 또 한 세대가 흘러 남녀가 비슷하게 교육받았지만, 워킹맘이라는 이유로 경력을 이어나가기 어렵다는 인식은 여전하다. 실제로 한 분야에서 전문성을 쌓으며, 경력을 이어가는 동성의 친구나 선배들은 대부분 비혼이거나, 출산을 미루거나 미뤄진 경우가 많은 것 같다. 나는 그 시각에서 보면, 진정 육아하다 끝난 인생이 되려나?
직장생활을 하면서 만난 한 (동성의) 선배는 “여성이 출산, 육아로 한 직장에 뼈를 묻지 못하는 형편인 건 맞다. 그럼에도 우리는 거꾸로 보면 가능성이 열려있지 않나? 꼭 스탠더드하게 살아야 하는 건 아니니까. 다양한 분야에 언제든 몸담아 볼 기회라고 생각해보면 어떨까?” 결국, 개인이 열린 태도로 살면 좀 낫지 않겠나 하는 이야기로 귀결됐다. 우리 개인의 그런 각오들과 사회에 대한 끊임없는 변화의 외침을 함께 할 때, 우리 딸들과 며느리들이 살 세상은 조금 더 육아하기 나아지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둘째 아이의 성별이 여자아이인지, 남자아이인지에 대한 기호 문제를 넘어, 이 아이가 어떤 사회에서 살아갈 것인가에 대해 더 많은 고민과 노력으로 준비되는 부모가 되면 좋겠다. 비단 여성의 직업환경만의 문제는 아니다. 워킹파 역시 육아에 참여할 기회가 더욱 확대돼야 함은 자명하다. 앞선 세대로서 원래 세상은, 대한민국은 여자로 태어나면 불리해, 라고 자조만 가르칠 게 아니니 말이다.
둘째가 양반다리를 하고, 탯줄을 붙잡고 허리 능선만 열심히 보여준 탓에, 우리 부부는 20주가 다 된 현재도 아이의 성별을 모른다. 덕분에 우리 부부는 이 문제를 놓고 많은 생각을 할 기회를 갖고 있다. 그런 둘째가 너무나 고맙고 사랑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