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리를 다녀왔다. 호주 캠핑카 여행이 계기였다. 발리는 신혼여행지 혹은 휴양지로 유명하다. 하지만 나는 신혼도 아니고 자녀들이 다 커서 휴양지를 즐길 시기도 아니다. 성향도 쉬는 것보다 액티비티를 좋아한다. 그런 내가 발리에 2주간 머물게 된 건 서핑 때문이다.
지난해 호주 캠핑카 여행 중에 '서퍼스 파라다이스'라는 곳을 들리게 되었는데 그곳 바다에서 서핑에 반했다. 물을 먹고 허우적거리며 서핑을 배웠는데 서핑이 그렇게 해서 늘만한 만만한 스포츠가 아니었다. 귀국 후 시흥에 있는 '웨이브파크'에서 서핑을 배웠다. 바쁜 일정 중에 자투리 시간을 내서 몇 번 다녔는데 여전히 일어서는 것조차 힘들었다.
평생 서핑을 안 배우거나 아니면 아예 2주 정도 시간을 내서 서핑만 배워야겠다고 마음먹고 구글링을 했다. 서핑캠프 위주로 알아봤는데 최적의 장소가 '발리'였다. 혼자 가기 그래서 서핑을 같이 배웠던 지인을 꼬셨는데 그 친구 휴가 일정과 맞지 않았다. 아내에게 물어보니 서핑 1주일에 발리 여행 1주일이면 같이 가겠다고 그래서 OK! 발리는 서핑 외에도 볼거리, 체험거리가 많은 곳이니 서핑 1주일, 여행 1주일 나눠서 총 2주간 발리 여행을 다녀오기로 결정했다. 그게 7월 6일 일요일이었다.
다음날, 통장 여기저기 푼돈으로 쪼개져 있던 걸 샅샅이 끌어모아서 발리행 왕복 항공권 2장을 예매했다. 호텔까지 연달아 예매를 하려고 했는데, 회사 일도 바쁘고 돈도 여유가 없어서 일단 보류했다. 회사에 서너 개의 큰 이슈가 터져서 그걸 수습한다고 정신없이 바쁘게 뛰어다녔다. 게다가 회사 조경수 물 주는 것도 내 일이었는데, 2주 안에 이 문제도 해결해야 했다. 옥상에서 호스를 뽑아서 관수 장치를 설치하고 타이머까지 달아서 간신히 해결했다.
하루하루 미루다가 호텔은 출발 열흘 전에 우선 2군데만 예약했다. 날짜가 임박해서인지 적합한 호텔은 빈방이 없었고, 가능한 방은 가격이 너무 비쌌다. 그중에 고르고 골라 각각 4박, 3박 총 7박을 예약했다. 나머지는 현지에서 상황 보면서 예약하기로 마음먹었다. 마음먹었다기보다는 골치가 아파서 그냥 미룬 거였다. 비자와 통행세 등을 사전에 등록하면 편리하다고 그래서 그것까지는 블로그를 보며 처리했다.
순식간에 출발 날짜가 다가왔다. 전날까지 회사 일이 끝나지 않아서 새벽 2시까지 야근을 하고 귀가해서 새벽 3시쯤 잠자리에 들었다. 여행 짐도 못 챙겼다. 아침에 겨우 일어났는데 정신이 헤롱헤롱해서 비몽사몽간에 주섬주섬 옷이랑 전자제품, 세면도구 그리고 읽을 책들을 챙겨서 아내랑 같이 공항버스를 탔다. 혹시라도 빠진 물건이 있으면 발리 현지에서 구입하면 될 터이다.
출발 당일 오전까지 zoom 미팅이 하나 있어서 공항버스 안에서 목소리를 줄여가면서 미팅에 참여하다가 주변 승객에게 미안해서 결국 멤버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줌에서 나왔다. 어제 못 잔 잠을 버스에서 잠깐 채우려고 눈을 감자 마자 공항에 도착했다고 안내 방송이 나왔다. 휴가철이라서 인천공항은 북적거렸다. 그동안 있는 지도 몰랐던 대한항공 라운지 이용권을 우연히 발견해서 아내와 라운지에서 아침도 먹고 편히 쉴 수 있었다.
비행기에 탑승한 후 기내에서 영화를 2편 관람했다.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라는 발리가 배경인 영화. 그리고 예전에 타이밍을 놓쳐서 못 봤던 '설국열차'. 몸은 피곤한데 머리가 말똥말똥 잠이 안 와서 '오우아'라는 박수밀 작가의 책을 좀 읽다 보니 발리 덴파사르 공항에 도착했다.
사전에 도착비자, 검역&세관, 통행세를 모두 처리해 둔 덕분에 패스트트랙처럼 빠르게 나올 수 있었다. 공항 대기줄이 꽤 기니까 사전에 등록해서 룰루랄라 즉시 통과하는 즐거움을 누리길.
사전 도착비자(E-VOA)는 e-Visa 공식사이트(https://evisa.imigrasi.go.id/)를 이용했다. 500,000루피아.
검역 및 세관 신고(통합 신고)는 올 인도네시아 공식사이트(https://allindonesia.imigrasi.go.id)를 이용했다. 출국 3일 전부터 신고가 가능하다.
발리 관광세(통행세)는 러브발리 공식사이트(https://lovebali.baliprov.go.id/)를 이용했다. 150,000루피아.
공항에서 그랩으로 렌터카를 잡아서 짱구(캉구, 창구, canggu. 인도네시아어 발음이다 보니 3가지 표기를 혼용해서 쓰던데, 발음이 쉽고 재미있는 짱구로 표기하겠다)에 있는 ZIN이라는 호텔로 이동했다. 호텔 프런트 데스크에서 숙박 등록 시 왓츠앱으로 친구 등록을 해서 그걸로 소통한다고 그랬다. 당시 내 아이폰은 발리 오기 1달 전쯤 보드가 망가져서 완충 후 6시간 이내에 배터리가 방전되는 상태였다. 보드 교체에 90만 원가량 들어서 아이폰 신규 모델이 나올 때까지 버티며 쓰고 있던 중이었다. 정신없이 온다고 보조배터리를 깜빡해서 내 폰은 이미 꺼져 있었다. 아내의 폰에는 왓츠앱이 안 깔려 있었다.
호텔 콘센트에 폰을 충전하는 동안 아내가 왓츠앱에 가입해서 친구 추가를 했다. 그 사이 내 폰도 켜져서 내 폰으로도 친구 추가를 했다. 이렇게 두 사람 폰을 추가했더니 나중에 내가 문의한 내용이 아내의 폰으로 답신이 오는 등 사소한 해프닝이 몇 번 있었다. 호텔 룸 컨디션은 양호했다. 샤워하고 일과 정리 좀 하다 보니 새벽 1시 반. 한국 시간으로 2시 반이 되었다.
진 호텔은 바로 옆에 단독 건물로 ZIN Cafe를 운영하고 있었다. 여기서 조식을 제공했다. 아침에 가보니 젊은 서양인들이 가득 앉아서 대화를 나누며 활기차게 아침을 즐기고 있었다. 잔잔한 음악과 커피 향, 빵 굽는 냄새에 휴양지에 온 기분이 느껴지며 기분이 고조되었다.
그렇게 발리에서 맞이하는 첫 번째 아침을 느긋하게 즐기려고 했는데 한국에서 사업하는 지인한테서 전화가 왔다. 카톡으로 바꿔서 통화해 보니, 고객 컴플레인 건이 언론에 이슈화되면서 문제 해결을 위해 몇 가지 방안을 모색하고 있었다. 나와 통화하면서 스스로의 생각을 정리하고 있는 거 같은데 전화를 끊기 곤란했다. 아내에게 양해를 구하고 1시간 넘게 통화했다. 아내는 카페로 내려오는 길에 아끼던 선글라스를 잃어버렸다고 호텔과 카페 전역을 돌아다니며 잃어버린 선글라스를 찾는다고 소동을 피우고 있었다. 사건 사고가 생기기 시작하면 여행이 시작된 거다. 어둡던 아내의 표정은 누군가 아내의 선글라스를 주워 호텔 데스크에 맡긴 덕분에 다시 환하게 밝아졌다.
아침 소동이 마무리된 후 이제 이번 여행의 가장 중요한 목적인 서핑 레슨 받을 곳을 알아보러 나섰다. 한국에서 구글맵으로 찾아 놓았던 곳을 맵을 보고 찾아갔는데 막상 그 주소에는 아무것도 아무것도 없었다. 샵이 망했나? 어쩔 수 없이 바닷가에 있는 다른 서핑샵들을 살펴봤는데 환경이 너무 열악해 보였다. 1~2시간 배우기는 괜찮아 보였지만 체계적인 서핑 스쿨과는 거리가 멀었다. 도대체 어디에서 서핑을 배워야 할지 감을 잡기 힘들었다. 영어 배우러 미국에 갔는데, 어학원이 없는 꼴이었다.
호텔로 돌아와서 다시 검색을 했다. 호텔 바로 앞에 있는 'Suko'라는 발리 현지인이 하는 곳이랑 '인디안썸머'라는 한국인이 운영하는 곳이 괜찮아 보였다. 챗으로 상담을 했는데 Suko한테서 먼저 답변이 왔다. 인디안썸머에서 답변이 좀 늦게 오는 바람에 Suko로 결정했는데, 지나고 보니 한국인에게 배우는 게 의사소통이 잘 되어서 더 낫지 않았을까 싶다. 영어도 못 하는데, 현지인과 영어로 소통하다 보니 조금 어려움이 있었다.
어쨌든 서핑은 Suko에서 배우기로 결정하고 레슨은 내일 오전에 시작하기로 했다. 하루가 아까워서 바로 배우고 싶었지만 지금부터 오후 내내 파도가 세서 초보가 배우기 어렵다고 그랬다. 이른 시간에 파도가 좋아서 레슨은 아침 시간대만 한다고 그랬다.
아내는 호텔 수영장에서 물놀이도 하고 아이패드로 드라마도 보고, 책도 읽고 혼자서 잘 놀았다. 구글에 한식 맛집으로 리뷰가 좋은 곳이 있어서 저녁은 그곳에서 먹기로 했다. 호텔을 나서서 그랩을 부르려고 했는데, 호텔 바로 앞에 그랩 옷을 입은 젊은 친구 2명이 오토바이를 세워 두고 손님을 찾고 있었다. 가까운 거리이고 그 돈이 그 돈이겠지 싶어서 그 친구들 오토바이를 탔는데, 식당에 도착해서 얼마냐고 물어보니까 1인당 10만 루피아(한화 약 9천 원)를 달라고 그랬다. 어이가 없어서 안 되는 영어로 화를 좀 내다가 결국 둘이 합해서 10만 루피아를 줬다. 나중에 돌아갈 때는 그랩으로 요금을 체크해 보니 오토바이 한대당 1만 5천 루피아 정도였다. 3배 넘게 바가지를 쓴 셈이다. 이동은 반드시 공식 그랩을 이용할 것!
'Seoul Soul Project'라는 한식당에서 돼지고기 한상을 먹었는데 한국 맛집에 비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빈땅 맥주까지 한잔하고 나니 몸이 노곤하니 피로가 풀렸다. 호텔에 돌아와서 옷을 갈아입고 달리기를 했다. 올해 초 히말라야 안나푸르나를 다녀온 후 저질 체력의 한계를 깨닫고 2월 말부터 시작한 달리기였다. 짱구 시내를 한 바퀴 돌아서 해변로를 따라 돌아오면 딱이겠다 싶었다. 막상 달려보니 시내는 오토바이가 너무 많아서 복잡했고 인적이 드문 곳은 가로등조차 없어 달리기 불편했다. 해변가는 모래밭에 발이 푹푹 빠져서 2배로 힘들었다. 어쨌든 고생 끝에 5km가량을 달렸다.
아침을 먹고 호텔 앞 SUKO(수코)에 레슨을 받으러 갔다. 샵 사장한테 간단한 설명을 들은 후 서핑용 레시가드로 갈아입고 선크림을 발랐다. 얼굴이 유난히 까맣고 몸이 건장한 친구가 강사라고 인사를 했다. 이름은 '코코'. 풀네임은 너무 길어서 손님들이 못 외우기에 그냥 '코코'라는 닉네임을 쓴다고. 발리에서 태어나 5살 때부터 서핑을 배우고 즐겼다고 그랬다.
레슨은 먼바다에서 진행되었다. 꽤 오랜 시간 패들링(보드에 엎드려서 양팔을 교대로 저어서 앞으로 가는 행동. 손을 노처럼 젓는 것)을 해서 파도가 좋은 푸른 바다로 나갔다. 나는 수영을 할 줄 알고 물에 익숙한 편인데, 초보는 발이 땅바닥에 닿지 않아 좀 무서울 수도 있겠다 싶었다.
2시간 동안 코코가 타이밍을 알려주면서 보드를 밀어준 덕분에 여러 번 파도를 탔는데, 2번 정도는 '제대로 파도를 잡았구나'라는 감을 느꼈다. 2시간에 2번이면 1시간에 1번 제대로 파도를 탄 거다. 그래도 그 짜릿함은 서핑을 즐기는 사람만이 알 것이다. 파도를 헤쳐가며 2시간 동안 허우적거렸더니 탈진 상태가 되었다. 샵에 돌아오니까 언제 촬영했는지 내 영상이 재생되고 있었다. 수코샵 사장이 영어로 내가 고쳐야 할 자세를 알려주었다.
1. 너무 보드 앞쪽에 선다. 좀 더 뒤에 서야 중심 잡기 좋다.
2. 발이 보드 중심에 있지 않고 한쪽으로 삐뚤게 서 있다. 보드 중앙에 서야 균형이 잡힌다.
3. 자세가 구부러져 있는데 다리는 낮추고 허리는 펴서 안정감을 있는 자세를 취해야 한다.
4. 시선이 아래쪽을 향하고 있다. 시선은 반드시 멀리 봐야 한다.
5. 턴을 할 때 시선을 먼저 옮긴 후 오른발을 낮춰서 자연스럽게 하라.
꽤 유익하고 도움이 많이 되었다. 2번에 불과하지만 제대로 파도를 타 보았다는 성취감이 느껴졌다.
저녁에 리젠시 호텔 비치 클럽에 갔다. 호텔이 화려하고 아름다웠다. 그만큼 밥값은 비쌌다. 해산물 요리를 시켰는데 양이 얼마 되지 않았다. 가격은 10만 원쯤. 분위기가 9만 원, 요리가 1만 원쯤 되는 셈. 아쉬운 마음에 zin cafe에 와서 무료 칵테일과 안주로 배를 마저 채웠다.
오늘은 일요일이라서 서핑 레슨이 없다. 나는 하루가 귀한데 레슨이 없어서 아쉬웠다. 뭐 어떡하겠는가. 아침에 해변가를 달리려고 가보니, 이미 여러 사람이 바다를 보며 백사장을 달리고 있었다. 해돋이를 보며 달리는 기분이 상쾌했다. 짱구 비치에서 출발해서 스미낙에 있는 '포테이토 헤드 비치 클럽'까지 바다를 따라서 달렸다. 오늘 저녁은 여기 클럽을 가 볼까 싶어서 사전 답사 차원도 있었다.
서핑 레슨이 없으니까 시간 여유가 많았다. 한국 회사도 쉬는 날이라서 노션 알림, 챗, 메일 어떤 것도 없어 심적으로도 평온했다. 본격적으로 이번 여행 일정을 예약했다. 우선 길리 일정을 잡았다. 길리는 배를 타고 가야 하는 작은 섬이었다. 배편과 리뷰가 좋은 단독룸 형태의 호텔을 예약했다. 우붓은 즐길만한 프로그램이 많았다. 리조트, 요가, 스파 등을 알아보고 호텔과 주요 프로그램을 모두 예약했다. 마지막으로 돌아오기 전날 머물 곳으로 누사누이의 호텔을 예약했다. 돈이 부족해서 갖고 있던 주식을 일부 팔아서 여행 자금을 충당했다.
매번 그랩을 타고 다니기 불편해서 호텔에 요청해서 스쿠터를 한 대 빌렸다. 번번이 아내와 둘이서 따로 오토바이를 잡아서 타야 하는 것도 번거로웠다. 귀엽게 생긴 스쿠터가 호텔 앞에 금방 왔다. 저녁이 되어 그 스쿠터를 타고 스미낙에 있는 대표적인 비치 클럽인 '포테이토 헤드 비치클럽'으로 탈탈거리며 달렸다. 짱구는 길이 안 좋다. 양방향에서 오토바이들이 좁은 길을 꽉 채우며 달리는데, 중간중간 택시가 끼여 있어서 길마다 아수라장이었다. 그 좁은 길을 요기조기 피해서 30분가량 달리니까 클럽에 도착했다. 아침에 달리기로 다녀올 때보다 더 오래 걸렸다.
'포테이토 헤드 비치클럽'은 인테리어가 화려하고 볼거리가 많았다. 손님들 중에 한국인이 유달리 많아 보였다. 음악 소리는 요란했고 사람들은 각자 자리에서 음악과 쇼를 즐겼다. 앞 테이블에 외국인 젊은 남자 네 명이 앉아 있는데 뭔가 분위기가 묘했다. 아니나 다를까 둘이서 서로 스킨십을 하더니 우리가 자리를 떠날 때쯤에 키스까지 했다. 동성애자 그룹 키스 장면을 여기서 볼 줄이야.
바다 전망이 보이는 비치 클럽이다 보니 전체적인 분위기는 흥겨우면서 운치가 있었다. 특히 클럽 바로 앞바다에서 파도가 마치 살아 움직이듯 좌우로 달리는 듯한 모습이 상당히 이색적이었다. 신기해서 폰으로 검색해 보았는데 이 내용은 안 나왔다. 오묘했다. 저녁 시간대에 포토이토 헤드를 방문한다면 꼭 오묘한 파도 구경은 해 보길.
서핑 레슨 둘째 날. 강사가 지각했다. 이 날은 준비 시간을 제외하고 1시간 정도 물속에 있었다. 1시간이라도 온몸의 힘이 다 빠지고 지칠 대로 지쳤다. 두 번째라 확실히 균형 감각이 좋아진 걸 느꼈다. 이틀 전 파도 속에서 허우적거린 보람이 있었다. 균형 감각은 생겼는데 좌우로 턴 하는 건 여전히 어려웠다. 내일 재도전해 봐야겠다.
파도 예보를 살펴보더니 내일은 짱구비치의 파도가 너무 크다고 꾸따비치로 이동해서 레슨을 받자고 그랬다. 한국에서 본 블로그 중에 꾸따 비치가 초보가 배우기 쉬운 파도라고 되어 있길래, 꾸따비치에 서핑샵을 하고 있는 광고글 중 하나이겠거니 여기고 무시했는데, 사실이었다. 짱구의 파도는 크고 프로가 즐기기에 좋으며, 꾸따의 파도는 초보가 배우기에 적당하다고 그랬다.
3일 동안 편안하게 묵었던 ZIN 호텔에 체크아웃을 하고 KOMU(코무) 호텔로 이동했다. 방은 크고 좋았는데 도로가라서 소음이 좀 있었다. 프런트에 조용한 방으로 옮길 수 있는지 문의했는데, 딱 하나 남아 있는 방은 너무 크고 비싸서 그냥 이 방에 묶기로 했다. 점심은 시내에 있는 태국 식당에서 먹었다. 돌아오는 길에 '퀵실버'라는 브랜드에 들려서 서핑팬츠와 조리, 반팔티를 샀다. 우리나라에는 많이 알려진 브랜드는 아닌데, 해양스포츠 브랜드로는 인지도가 꽤 있는 거 같았다.
저녁에 FINNS(핀스)라는 비치클럽을 구경하려고 출발했다. 어제 갔던 포테이토 헤드와 함께 대표적인 비치 클럽이라고 한다. 낮에 예약을 하려고 했는데 빈자리가 없었다. 호텔에서 핀스까지 650M. 걸어서 10분도 안 걸렸다. 가보니 이곳이야 말로 진정한 비치 클럽이었다. 모두가 흥겹게 파티를 즐기고 있었다.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저절로 흥이 날 정도로 유쾌하고 경쾌한 분위기였다. 젊은 사람들로 좌석과 풀장이 꽉 차 있었다. 무대 앞에서는 맥주병을 들고 춤을 추는 젊은이들로 가득했다. 열기가 느껴지고 에너지가 솟아났다. 왜 풀부킹인지 알만했다. 아내와 함께 풀장에도 들어가고 무대 구경도 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발리에서 비치클럽을 한 군데만 가야 한다면 '핀스 비치클럽' 추천.
호텔에 돌아와서 내일 일정을 생각해서 스쿠터를 한대 빌렸다. 하루에 10만 루피아. 하루에 9천 원이 안 되었다. 3일 동안 타기로 했다. 밤에 해변가를 5km 정도 달렸다.
어제 빌린 스쿠터를 타려고 주차장에 갔는데 나의 스쿠터가 사라졌다. 당황했다. 놀라서 주차장 구석구석을 뛰어다니며 내 보물을 찾으러 다녔는데, 반층 아래에 스쿠터용 주차 자리로 옮겨져 있었다. 자동차 주차 공간 사이에 세워 두었는데, 주차장 관리 직원이 스쿠터 주차 공간으로 들어서 옮겨 놓았나 보다.
스쿠터를 타고 서핑 레슨을 받으러 수코로 이동했다. 약속한 7시에 샵에 도착했는데, 사장이 오늘은 파도가 너무 심해서 레슨이 힘들다고 그랬다. 짱구도 그렇고 꾸따도 오늘은 파도가 너무 심해서 위험하다고. 바다를 살펴보라고 그래서 가 보았더니 실제로 크고 시꺼먼 파도가 맹렬하게 치고 있었다. 그럼에도 귀한 시간을 쪼개서 발리까지 왔는데 이런저런 이유로 레슨이 캔슬되니까 영 아쉬웠다. 출발하기 전에 미리 알려 주지. 한국 샵 같으면 실내 레슨이라도 할 텐데. 그렇다고 지금 한국인이 운영하는 서핑캠프로 옮기기도 그랬다. 며칠 남지도 않았는데. 어쩔 수가 없었다. 호텔에 되돌아와서 달리기를 했다.
오후에 아내를 태우고 40분가량 북쪽으로 달려서 '타나롯'이라는 해중 사원에 갔다. 물 때가 맞아서 운 좋게 사원까지 건너갈 수 있었다. 이 사원은 밀물 때는 바다로 막혀 있고 썰물이 되면 사람들이 다닐 수 있었다. 우리나라 제부도 바닷길처럼. 사원에 올라갈 때 2만 루시아를 기부당했다. 입구에서 기부를 살짝 강요당한다. 좁쌀 같은 걸 이마에 붙여 준 후에 돈통을 내미어서 얼떨결에 기부를 하긴 했는데 굳이 안 해도 된다. 사원 오르는 길이 막혀 있어서 조금 오르다가 바로 내려와야 한다. 오히려 사원 쪽보다는 길 건너편 내륙 쪽 위에서 보는 경치가 장관이었다. 특히 절벽에 철썩철썩 부딪히는 파도가 경외감이 들 정도로 웅장했다.
스쿠터를 타고 짱구 시내로 돌아왔다. 발리의 데우스(DEUS)가 유명하다고 그래서 반바지를 하나 샀다. 건너편 러브앵커마켓(Love Ancher)이라는 상가는 바가지가 너무 심했다. 아내는 힘겹게 흥정을 해서 에코백을 하나 샀다고 자랑했다. 저녁으로 서울 BBQ에서 삼겹살을 먹었는데 아주 맛있었다. 노포집 느낌이 났다.
아침에 스쿠터를 타고 수코 서핑샵에 갔다. 다행히 오늘은 짱구 파도는 높아도 꾸따는 탈만 하다고 그랬다. 레슨 마치고 꾸따에서 일도 하고 주변 구경도 할 겸 호텔에 다시 들려서 노트북을 챙겨서 아내와 함께 꾸따 비치로 이동했다. 꾸따 비치의 파도는 이틀 동안 탔던 짱구처럼 좋진 않았다. 그래도 밸런스 연습하기에는 괜찮았다. 1시간 반 정도 턴을 연습했다. 느리지만 실력이 느는 게 느껴진다.
강사랑 포토그래퍼는 짱구로 돌아가고 나는 아내와 함께 꾸따 비치 쇼핑몰로 이동했다. 나는 밀린 회사 일을 보고 아내는 쇼핑을 즐겼다. 저녁이 되어 더위가 가시자 아내와 함께 다시 바닷가로 나왔다. 나는 서핑을 즐겼고, 아내는 엎드려서 타는 초보용 숏보드를 빌려서 파도를 타고 놀았다. 아름다운 바닷가에서 평화로운 시간을 보냈다. 발리의 매력이 느껴졌다. 검붉게 타 들어가는 석양을 해변가에 앉아서 구경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혼이 나간 듯 일몰을 바라보았다. 백사장에 개 두 마리가 그 사이를 신나게 달리고 있었다.
저녁에 호텔 근처에 마가렛 비스토(Margaret Bistro)라는 이탈리아 식당에서 피자를 먹었는데 정말 맛있었다. 그 맛에 반해 한판 더 시켰다. 과유불급. 두 번째 피자는 배가 불러서 제대로 먹지도 못했다. 역시 음식은 살짝 아쉬울 때 숟가락을 놓아야 좋은 기억으로 남나 보다. 음식도 그렇고 인생도 그렇다. 지나치기보다는 살짝 아쉬울 때 끝내는 용기가 필요하다.
소화도 시킬 겸 야간 달리기를 했는데, 폰을 두고 달리다가 길을 잃었다. 사람들에게 물어물어 겨우 호텔로 살아서 돌아올 수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마침내 호텔에 도착했는데 아내가 내 걱정에 호텔 로비에 나와 있었다. 잔소리를 좀 들었다. 해외에서 달릴 때는 반드시 폰을 챙길 것!
마지막 서핑 레슨을 받았다. 서핑샵 사장한테 피드백부터 받았다. 자세를 좀 더 낮추고 뒤에 중심을 줄 것. 그리고 뱀처럼 유연하게 턴을 해야 한다고. 뱀처럼 유연하게. 음.
짱구 파도는 오늘도 너무 높아서 꾸따로 이동해서 1시간가량 서핑 레슨을 받았다. 강사가 바뀌었는데 오늘 강사는 바다에 안 들어오고 해변가에서 이렇게 저렇게 손짓으로 알려줬다. 뒤에서 밀어주지 않아도 혼자서 파도 잡는 게 조금씩 감이 잡혔다. 턴이 될 듯 말 듯 아쉬움이 남는 채로 레슨을 마쳤다. 이렇게 해서 7일간 레슨 계획이, 첫날 샵 찾는다고 하루 날리고, 일요일 하루 쉬고, 파도가 심해서 하루 쉬는 바람에 총 4번 레슨 받는데 그쳤다. 그래도 서핑에 친숙해졌고 자신감은 붙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서핑을 맘껏 즐겼다.
스쿠터를 타고 코모 호텔로 이동해서 짐을 챙겨서 체크아웃을 했다. 3일간 내 발이 되어줬던 스쿠터도 반납했다. 이제 길리로 이동할 시간이다. 그랩을 불렀다. 길리로 가는 선착장인 빠당바이 항구까지 2시간 정도면 갈 줄 알았는데 길이 막혀서 2시간 30분이 걸렸다.
빠당바이 매표소에 도착했는데, 오늘 파도가 심해서 배가 뜨지 않는다고 그랬다. 잘 못 들은 줄 알았다. 짱구에서 파도 때문에 레슨이 캔슬되긴 했지만, 여기에서 또다시 파도 때문에 배 운항이 캔슬되다니. 게다가 내일도 배가 안 뜰 수 있다고 그랬다. 길리에 2박을 예약해 두었는데 배가 안 뜨면 어떡하나. 주변 손님들을 비롯해 매표소 직원과 손짓발짓해서 물어보니 오늘 배가 뜨지 않는 건 확실했다. 오늘 길리로 가는 건 포기.
캐리어를 끌고 매표소 앞 커피숍으로 이동했다. 2가지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첫째, 오늘 묵을 숙소를 구해야 하고 둘째, 내일 가는 배를 다시 예매해야 한다. 로밍용 이심 LTE 속도가 너무 느려서 카페 와이파이를 이용해서 정보 검색을 했다. 인근 호텔은 모두 예약이 만료되었다. 길리 가는 모든 배가 취소된 탓에 우리 보다 먼저 온 사람들이 호텔이라는 호텔은 모두 다 잡은 상태였다.
커피숍 점원한테 우리 사정을 얘기해서 배편과 호텔을 구할 수 있는 방법을 물어봤다. 점원이 주방장에서 일하는 여직원 남편이 여객선 직원이라 표를 구해 줄 수 있다고 그랬다. 원래 우리가 타려고 했던 배는 '에카자야'. 배가 커서 뱃멀미 걱정이 없었다. 커피숍에서 소개해 준 배는 '세미냐(Semiya)'. 이 배도 에카자야만큼 크다고 그랬다. 에카자야랑 동급이라고. 이것저것 가릴 상황이 아니라서 티켓을 예약했다. 종이에 뭘 쓱쓱 써주더니 얘기가 다 되었다고 내일 부두 매표소에 이 종이를 주면 배를 탈 수 있을 거라고 알려 주었다. 어쨌든 큰 불 하나는 껐다.
다음으로 호텔을 잡아야 하는데, 커피숍에서 소개해 준 곳은 모두 만실이었다. 아고다, 부킹닷컴, 호텔스, 트립닷컴, 구글맵 등 호텔 예약이 가능한 모든 사이트를 검색해 봤다. 제대로 된 호텔은 빈자리가 하나도 없었다. 아직 남아 있는 건 여인숙급으로 청결상태가 너무 좋지 않았다. 에어비앤비도 알아봤는데 마땅한 곳이 없었다. 몇 군데 호텔을 돌았는데 아내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도저히 못 자겠다고 그랬다. 그나마 바닷가 앞에 있는 여관 같은 곳이 깨끗해서 그곳에 자리를 잡았다. 파도 소리가 들릴 정도로 바로 바다 앞이었는데 방음이 아예 안 되어서 오토바이 다니는 소리며 너무 시끄러웠다. 그래도 노숙하지 않고 하룻밤 몸 뉘일 수 있다는 게 어디인가. 이것저것 따질 형편이 아니었다.
두 가지 큰 문제를 모두 풀고 아내와 함께 빠당바이에서 사태가 제일 맛있다는 꼬치집을 찾아갔다. 길거리 포차 같은 곳이었는데 사태가 정말 맛있었다. 이곳은 한국인에게 유명해져서 특히 한국인 리뷰가 많았다. 부부 사장님도 친절했다. 사태 덕분에 하루의 피로가 모두 풀리는 기분이었다. 다 먹고 숙소로 돌아온 후 운동화로 갈아 신고 항구 주변을 5km가량 달렸다. 밤공기가 상쾌했다.
아침 식사로 도시락을 주문했다. 숙소 사장님의 딸들로 보이는 어린 여자아이 2명이 주방에 있었는데 서툰 영어로 알겠다고 그랬다. 하지만 체크아웃 시간이 다 되어도 도시락이 안 나와서 확인해 보니, 접수가 안 되어 있었다. 다른 걸로 급히 주문했는데 맛이 너무 없었다.
세미야 승선 티켓을 미리 받아 놓으려고 내가 먼저 매표소로 갔다. 세미야라고 써 놓은 매표소 앞에서 사람들이 줄을 길게 서 있었다. 30분쯤 기다려서 거의 우리 차례가 다 되었을 때쯤 숙소에서 짐을 챙겨 나온 아내한테서 연락이 왔다. 서로 매표소 앞이라고 통화했는데 아내가 안 보였다. 알고 보니 세미야 매표소가 두 군데였다. 아내가 있는 매표소에 가서 다시 처음부터 줄을 서서 겨우 티켓을 발급받고 마침내 배에 탈 수 있었다.
아내는 멀미를 할까 봐 긴장하고 있었는데, 다행히 파도는 잔잔했고 배도 커서 평화롭게 길리섬에 도착했다. 길리섬에는 차와 오토바이가 보이지 않았다. 짱구랑 꾸따에서 오토바이 소음에 너무 시달렸는데 오토바이가 없는 고요한 섬에 도착하니까 천국에 온 듯 마음이 평온해졌다. 짐은 말이 끄는 마차를 이용하고 있었다. 마차를 잡아서 '벨루카' 호텔로 이동했다. 작은 섬이라서 10분 정도 마차로 달리니까 도착했다.
호텔에 도착해서 어제 파도로 인해 배가 취소되어서 못 온 거니까 천재지변인 만큼 하루치 방값을 환불해 달라고 요청했다. 젊은 발리 여직원이 여사장님을 불러왔다. 이탈리아인 같기도 하고 프랑스인 같기도 한 여사장님은 내가 어제 취소 메일을 너무 늦게 보내서 다른 손님을 받을 시간적 여유가 없었기에 취소가 불가능하다고 그랬다. 어제 배가 안 떴으니까 그 어떤 손님도 못 왔을 텐데, 내가 일찍 메일을 보냈다고 한들 취소가 되었을까 싶었다. 취소 대신에 1박을 더 할 경우 50% 할인을 해 주겠다고 그랬다. 내일 묵을 우붓에 있는 호텔에 연락해 보았는데 그곳도 일정 변경이 안 된다고 그랬다. 어쩔 수 없이 길리는 아쉽지만 1박만 하기로 했다. 여사장님은 친절하게 길리에서 즐길만한 프로그램을 소개해주었다.
호텔의 배려로 점심을 공짜로 먹었다. 1박을 날렸는데 이 정도는 해줘야지. 거북이 스노클링을 하려면 어디로 가야 하는지 물어보니까 종업원이 업체에 연락을 해줬다. 업체 가이드가 호텔까지 자전거를 타고 와서 우리를 인솔했다.
서양인이 대부분인 배에 타서 길리 메노섬에서 2군데, 길리 에어섬에서 1군데, 총 3군데에서 거북이 스노클링을 즐겼다. 그동안 세계 각국에서 스노클링을 해봤지만 이렇게 거북이를 보는 스노클링은 처음이었다. 나는 거북이를 가까이서 보고 싶어서 구명조끼를 벗고 바닷속 깊이까지 헤엄쳐 들어갔다. 바다 거북이를 직접 만져보고 같이 헤엄도 치는 놀라운 경험을 했다. 거북이 외에도 산호초 속에 살고 있는 각양각색의 니모들이 형형색색의 빛깔을 뽐내고 있었다. 스노클링은 맑은 날일 때 더욱 화려한데 운 좋게 날씨가 화창했다.
호핑투어 중간에 길리 에어섬에서 잠시 쉬는 시간을 가졌다. 카페에 앉아서 아내와 맥주를 마시며 거북이 얘기를 나누고 있는데 옆 테이블 사람이 한국말로 인사를 했다. 우리와 같은 배에 동양인이 한 명 더 있었는데, 다른 나라 사람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그 사람도 한국인이었다. 얘기를 나눠보니 혼자 길리 여행 중이었다.
그도 어제 빠당바이에 도착한 후 배 운항 취소 소식을 접했다고 그랬다. 우리는 오후 배였는데 그는 오전 배였다. 그는 호객 행위를 하는 사람의 말을 듣고 작은 보트를 탔는데 경유에 대기 시간까지 총 14시간 만에 길리에 도착했다고 그랬다. 듣고 보니 빠당바이에서 하루 묵는 게 잘했구나 싶었다. 그리고 어제 배가 취소된 건 파도 탓이 아니라 며칠 전에 안전사고로 사람이 한 명 죽어서 정부에서 경고성으로 출항 허가를 안 내준 거라는 소식도 전해주었다. 사실 여부는 잘 모르겠다. 그는 7~8년 전에 우연히 길리에 잠시 들린 적이 있었는데, 그때 길리에 반해서 몇 년 동안 계획을 세워서 드디어 이번에 2주간 길리에만 머문다고 그랬다. 내 생각에도 길리를 제대로 느끼려면 2주에서 1달은 필요하지 않나 싶다. 섬은 작지만 수많은 매력을 품고 있다.
길리 본섬인 트라왕안으로 돌아와서 한국인에게 유명한 수미 사태(Sumi Sate)에서 사태와 더불어 나시고랭과 미고랭을 먹었다. 맥주도 한잔 마셨다. 밤에 아내와 함께 자전거를 타고 길리섬 전체를 한 바퀴 돌았다. 북쪽은 고급호텔과 바들이 많았고 서쪽으로 넘어가니까 대형 야외극장과 펍이 있었다. 남쪽은 해양스포츠 가게들이 많이 보였고 대체로 조용했다. 그리고 부두가 있는 동쪽으로 돌아오니까 다시 레스토랑과 주점들이 있고 활기가 넘쳤다. 둘레가 8km 남짓한 이 작은 섬에 고요, 여유, 열정, 쾌락 등 다양한 요소들이 조화롭게 구성되어 있구나 싶었다. 아기자기하면서 온갖 요소를 가지고 있는 매혹적인 섬이다.
그동안 여행을 다니면서 또 오고 싶다는 생각이 든 곳은 별로 없었다. 길리는 다시 한번 더 와보고 싶은 곳이다. 배편이 취소되어서 너무 짧게 묵어서 아쉬움이 남아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그보다는 아침에는 아름다운 해변가를 달리고, 오전에는 푸른 파도를 타며 서핑을 즐기고, 오후에는 카페에서 일도 하고 책도 읽고 글도 쓰며, 저녁에는 노을을 보는 평화로운 시간을 가지고 싶다는 동경이 더 클 것이다. 이런 곳이 바로 유토피아가 아닐까.
아침에 아내와 함께 길리 해변가를 한 바퀴 달렸다. 어젯밤 자전거를 타고 다닐 때와는 또 다른 분위기였다. 하늘은 맑고 바다는 투명했다. 햇살에 바다가 에메랄드 빛으로 반짝거렸다. 백사장에는 사람들이 바다를 보며 여유를 즐기고 있었다. 종을 딸랑거리며 말이 이끄는 마차가 옆으로 지나다녔다. 달리기 좋은 코스다. 7km가량 달리고 나니 윤식당 촬영지가 나왔다.
그 옆에 스노클링 대여점에서 바다에 들어가면 바로 거북이를 볼 수 있다고 그래서 아내와 같이 스노클링 물안경을 빌려서 바다에 들어갔다. 하지만 물고기는 많은데 거북이는 없었다. 바다에서 나와 윤식당 촬영지에서 신라면과 김밥, 떡볶이를 맛있게 먹은 후 위치를 조금 옮겨서 다시 바다에 들어가 보았다. 그곳에는 작은 새끼 거북이 한 마리가 헤엄치며 놀고 있는 걸 발견할 수 있었다.
호텔에 체크아웃을 하고 선착장으로 이동했다. 선착장 옆에 딸기말차 맛집이 있다고 그래서 한잔 시켜 먹었다. 에카자야 배를 타고 가면서 야외 전망대에서 맥주를 시켜서 아내와 함께 흥겹게 마셨다. 시원한 바닷바람과 신나는 노래, 그리고 맥주가 잘 어울렸다. '이런 게 행복이구나'라는 감정이 온몸에 느껴졌다.
빠당바이에 저녁에 도착했는데 그랩 호객군이 너무 많아서 정신이 없었다. 터미널 옆 카페에 가서 주스 한잔 시켜놓고 그랩을 불렀다. 우붓까지 2시간가량 걸렸다. 그렇게 먼 거리는 아니었는데 우붓 근처에서 차가 많이 막혔다. 택시 기사가 낡은 건물 앞에 내려줘서 잠시 놀랬는데 확인해 보니 그 옆에 있는 깨끗한 호텔이었다. '베스트 웨스턴 프리미엄 호텔'. 적당한 가격에 평이 좋았다. 마침 길 건너편에 소울키친(Soul Kitchen)이라는 괜찮은 레스토랑이 있어서 그곳에서 고기랑 야채, 만두를 시켜서 맛있게 먹었다. 밤공기가 선선해서 기분이 상쾌했다.
일찍 일어나서 몽키 포레스트까지 달렸다. 공원 입장은 안 하고 주변만 둘러봤는데 숲이 꽤 볼만했다. 우붓에 있는 동안에 한번 들려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호텔 뷔페로 아침을 먹고 아내와 함께 우붓 투어에 나섰다.
호텔에서 우붓 왕궁까지 걸어서 갔다. 챗지피티(chat gpt) 음성모드로 AI 가이드의 해박한 설명을 들으면서 왕궁을 구경했다. 짬뿌한 릿지워크를 걸었다. 길이 예뻤다. 시내의 시끄러움에서 벗어나 정글 속을 거닐 듯 고요하고 평화로웠다. 30분가량 아내와 함께 여유롭게 걸어서 야외 스파로 유명한 '카르사 스파'에 도착했다. 짱구에 있을 때 이메일로 예약한 곳이다. 이틀 후에 이곳에서 스파를 받는 걸로 예약해 두었다. 아기자기하면서 품격 있게 잘 꾸며진 공간이었다. 디테일 속에 품위가 녹아 있었다. 그랩이 잡히는 곳까지 조금 더 걸어간 후 그랩을 타고 '알라스 하룸'으로 이동했다.
알라스 하룸은 리조트에 입장하는 곳이고 그 안에 크레타야 우붓이라는 수영장 클럽이 있었다. 레스토랑에서 점심을 시켰는데, 직원들이 좀 지쳐 있는 듯 그다지 친절하지는 않았다. 식사 후 스윙(그네)을 예약했는데 꽤 비쌌다. 한번 타는데 한화로 2만 5천 원. 아내가 입을 옷도 빌리니까 스윙에만 7만 원가량 나왔다. 대기하는데도 50분가량 걸렸다. 직원이 오늘 단체 손님이 많아서 그렇다고 양해를 구했다. 기다리는 동안 알라스 하룸을 한 바퀴 돌았다. 그다지 볼거리는 없었고 사진 촬영용 스팟이 몇 군데 있었다. 기대보다 스케일이 작았고 볼거리가 적었다.
내가 먼저 스윙을 탔는데, 최대한 익사이팅하게 해 달랬더니 하늘까지 스윙을 밀어주었다. 세상에 이렇게 높고 짜릿한 그네는 태어나 처음이었다. 하늘 끝까지 올라갈 정도로 신나고 재미있었다. 아내는 황금색 롱드레스를 입고 탔는데 사진이 아주 예쁘게 나왔다. 스윙을 탄 후 둘 다 기분이 신나 맥주를 사들고 수영장에 들어갔다. 음악을 들으면서 계단식 논을 구경했다. 깊은 산속에서 즐기는 수영장이라서 이색적이었다.
크레타야 우붓을 실컷 즐기고 나왔다. 길을 따라 좀 더 위로 올라가니까 오리지널 트갈랄랑 계단식 논들이 나왔다. 그곳에서 루왁 커피를 한잔 마셨다. 맛이 괜찮았다. 시내로 돌아와서 한식을 파는 '사투망콕'에서 비빔국수, 짬뽕, 잡채와 떡볶이를 시켜서 맛있게 먹었다. 아내는 시내에서 쇼핑을 좀 하고 싶다고 그래서 구경을 다녔고 나는 먼저 호텔로 복귀해서 내일 갈 래프팅 코스 스케줄을 알아봤다.
호텔 뷔페를 맛있게 먹은 후 뜨라가와자 래프팅을 예약하려고 몇 군데 연락해 봤다. 그런데 당일 부킹은 안 된다고 그랬다. 이미 풀부킹이라고. 호텔에도 요청하고 근처 여행사에도 가 봤는데 모두 예약이 다 찼다고 그랬다. 길가에서도 래프팅 프로그램을 팔기에 대화를 나눠보니까, 래프팅은 언제라도 할 수 있는데 그곳까지 가는 차량 좌석이 다 찬 것처럼 얘기했다. 그래서 그랩을 타고 우리가 직접 그곳까지 가면 탈 수 있냐고 그랬더니 그러면 예약이 바로 가능하다고 그랬다. 래프팅 프로그램을 예약하고 차는 그랩을 불러서 출발했다. 기사가 빈차로 올 수 없으니까 기다렸다가 우리를 태우고 오겠다고 그랬다. 그게 서로한테 좋을 거 같았다.
뜨라가와자에 도착해서 요금을 계산한 후 집라인을 타고 편하게 강가까지 내려갔다. 재미있고 편했다. 아내랑 둘이서 보트를 탔다. 젊은 사공이 같이 탔다. 우리 뒤에 유럽 사람으로 보이는 가족이 타고 있었다. 원래 급류가 센 건지 비가 내려서 수량이 늘어서 그런 건지 물살이 아주 빨랐다. 40분가량 정신없이 즐기다가 폭포가 있는 쉼터에서 잠시 쉬었다. 맥주도 한잔하고 과자도 사 먹었다.
그리고 다시 2번째 래프팅이 시작되었는데, 중간에 절벽처럼 급강하하는 코스가 연달아 2번 나왔다. 보트가 뒤집히는 거 아닌가 걱정될 정도로 스릴 만점이었다. 한국에서는 동강 등 몇 군데 장소에서, 그리고 필리핀 등 해외에서도 몇 번 래프팅을 즐긴 적이 있었는데 이번 뜨라가와자 래프팅이 내 경험 중 최고였다. 원 없이 래프팅을 즐겼다. 프로그램에 식사까지 포함되어 있어서 하류에 도착해서 배도 든든하게 채운 후 우붓 시내로 돌아왔다.
저녁에 알캐미 요가를 가기 전에 자투리 시간이 남아 몽키 포레스트를 둘러보기로 했다. 차가 너무 막혔다. 중간에 렌터카에서 내려서 그랩 오토바이를 불러서 몽키 포스레스로 빠르게 이동했다. 이곳은 말 그대로 원숭이 숲이었다. 숲 전체에 원숭이가 살고 있었다. 귀여운 현지 원숭이를 마음껏 볼 수 있다. 다만 남부 투어를 할 때 울루와뚜 사원에도 원숭이가 정말 많이 살고 있었는데, 이곳을 갈 계획이 있다면 굳이 몽키 포레스트는 들릴 필요는 없을 거 같다.
오늘의 마지막 코스는 '알캐미 요가'. 'earth'라는 입문자용 프로그램을 예약했다. 요가 센터는 숲 속에 있는 반원형의 우아하고 아름다운 공간이었다. 음악이 신비롭고 강사의 목소리도 묘하게 빠져드는 매력이 있었다. 대부분 서양인이었는데 영어로 하는 설명을 알아들을 수가 없어서 앞사람을 흉내 내며 몸을 비틀었다. 초보 코스임에도 1시간 반 정도 따라 하고 나니까 온몸이 땀으로 젖었다. 알캐미 요가는 요가도 요가지만 분위기가 정말 신비롭다. 요가에 관심이 없더라도 인테리어와 공간 연출 감도가 높아서 우붓을 방문하면 꼭 들려보길 추천한다.
아침을 먹은 후 나는 달려서, 아내는 오토바이를 타고 카르사 스파로 갔다. 이미 걸어본 길이었는데 막상 뛰어서 가려니까 오르막길이 많아서 상당히 힘들었다. 도착하니 온몸이 땀투성이었다. 도착한 후 종이에 성별 고르는 문항이 있었는데 유심히 안 보고 본인의 성별을 체크하는 건 줄 알고 나는 남자, 아내는 여자를 골랐다. 나중에 알고 보니 마사지사 성별을 고르는 거였다. 우리처럼 성별 착각하는 일이 없도록.
마사지 장소는 숲 속 야외에 있는 베드였다. 새소리와 물소리가 들리고 향을 피워서 오묘한 분위기가 연출되었다. 자연의 소리와 바람의 숨결을 느끼며 받은 마사지는 최상의 경험이었다. 아내도 살아오면서 받아본 마사지 중 최고였다고 평가했다. 카르사 스파 역시 우붓에서는 꼭 경험해봐야 할 곳.
호텔로 돌아갈 때도 올 때와 마찬가지로 나는 뛰어서, 아내는 그랩으로 오토바이를 타고 왔다. 내가 먼저 도착했다. 발리는 차보다 오토바이가 빠르고, 오토바이 보다 달리기가 빠를 수 있다는 걸 다시 한번 확인했다. 이렇게 우붓에서 3박 4일 일정을 마쳤다.
그랩을 타고 누사누아로 이동했다. 차가 막혀서 2시간 30분 정도 걸렸다. 바다의 절경을 한눈에 구경할 수 있는 발리 만다라 고속도로에 접어들자 딴 세상에 온 거 같았다. 시골에서 살다가 삐까번쩍한 대도시로 순간이동한 기분이었다.
누사두아에 있는 '메루사카 호텔'에 도착했다. 프런트 데스크에서 체크인을 하려고 하는데 뭔가 문제가 있는지 우리 예약 내역이 조회가 안 되었다. 이런 경험이 간혹 있어서 뭔가 싸한 느낌이 등골 뒤에 전해졌다. 예약 내역을 보여달라고 그래서 트립닷컴에 접속해 보니 오늘이 아니라 내일로 날짜를 잘 못 예약했다. 아내는 나의 이런 실수가 처음이 아니기에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 트립닷컴에는 오늘자 빈방이 없었다. 호텔에 사정하니 레이트 체크아웃을 한 손님방이 딱 하나 남아 있다고 그 방을 청소해서 드리겠다고 그랬다. 역시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 트립닷컴 예약을 취소하고, 호텔에 바로 방값을 지불해서 위기에서 간신히 벗어났다.
청소에 시간이 좀 걸린다고 그래서 바닷가로 가 보았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바닷가에 가득 모여 있길래 궁금해서 가 보았다. 아기 거북이를 바다로 풀어주는 이벤트를 하고 있었다. 새끼손톱처럼 작은 아기 거북이 수십 마리가 백사장에서 밀물을 타고 아장아장 바다로 헤엄쳐가는 모습이 장관이었다. 예상하지 못했던 곳에서 의외의 멋진 구경을 했다. 이 호텔에는 풀장이 3군데 있었다. 그중에 제일 넓어 보이는 수영장에서 아내와 함께 수영을 즐겼다.
방청소가 끝난 후 입실해 보니 최고급 호텔답게 컨디션이 아주 좋았다. 호텔 내에 한국인이 많이 보였는데 나중에 물어보니 한국 아이들 대상 영어캠프를 이곳에서 하고 있다고 그랬다. 내일이면 발리 여행의 마지막 날이다.
아침에 해변가 주변을 달렸다. 이곳이 천국인가 싶을 정도로 경치가 멋졌다. 왕복 6km 정도 달렸다. 캐리어를 챙겨서 호텔에 맡기고 오토바이를 빌렸다. 데스크에서 주변 관광 장소에 대해 안내를 받았다. 내가 찾은 곳과 대부분 비슷했고, GWK를 추천해 줘서 오늘 일정에 추가했다.
첫 번째 장소는 판다와 비치. 오토바이로 30분 정도 달려서 도착했는데 아찔한 절벽을 옆에 끼고 있는 바닷가 마을이 나왔다. 동화 속에 나올법한 작고 예쁜 마을이었다. 알록달록한 색깔의 보트들이 많아서 사진이 잡지 표지처럼 잘 나왔다. 두 번째 장소는 멜라스티비치. 화이트록에서 보는 전망대가 멋지다고 리뷰를 봤는데 막상 가보니 입구 쪽에 채석장이 있어서 트럭이 계속 다니고 먼지가 날리는 등 어수선했다. 바다가 보이는 비치 클럽에서 점심을 먹었는데 식사도 그냥 그랬다. 흰색 절벽 하나 보러 오는 건데 이곳은 기대에 못 미쳤다.
다음으로 호텔에서 소개해준 GWK. 가루다 위시누 켄카나라고 초대형 힌두교 조형물들이 있는 곳이었다. 오토바이를 주차하고 한참을 걸어 올라가서 입구를 통과하려고 하는데 유료라고 표를 끊어오라고 그랬다. 매표소가 어디 있는지 물어보니 우리가 오토바이를 주차한 곳에 있다고 그랬다. 아니 매표소와 입구를 이렇게 멀리 떨어뜨려 놓으면 어떻게 하자는 건지. 시간 여유가 많지 않아서 입구 바깥에서 주변 구경을 좀 하다가 나왔다.
다음으로 울루와뚜 사원으로 이동했다. 입장권과 함께 케착댄스도 같이 끊으려고 했는데 6시 케착댄스는 마감이 되었다. 7시 케착댄스를 관람하면 마지막 코스로 잡은 짐발란 일정이 타이트해질 수 있어서 어쩔 수 없이 케착댄스는 포기하고 입장권만 끊었다. 나중에 귀국한 후에 유튜브로 케착댄스를 찾아봤는데 볼 만했다. 사전에 예약해서 나처럼 아쉽게 놓치는 일이 없도록. 울루와뚜는 절벽에 지은 사원인데 사람보다 원숭이가 더 많았다. 원숭이들이 사람들의 선글라스나 모자를 뺐었다. 잠시 방심한 사이 원숭이 한 마리가 내 휴대폰을 훔치려다가 나에게 딱 걸렸다. 굳이 몽키 포레스트를 안 가도 이곳에서 원숭이는 원 없이 구경할 수 있었다.
이번 여행의 마지막은 짐발란에서 해산물 요리와 함께 축배를 들기로 했다. 구글 검색을 통해 리뷰가 좋은 메네가 카페(Menega cafe)라는 해변 식당을 찾아갔다. 해변가에 쫙 펼쳐진 야외 테이블에 손님들이 바글바글했다. 크랩과 기본 코스 요리를 시켜서 맥주를 실컷 마셨다. 분위기가 정말 좋았다. 바다에서는 철썩철썩 파도 소리가 들리고 해변에서는 아마추어 가수들이 라이브로 노래를 불렀다. 삼삼오오 앉은 사람들이 흥겹게 웃고 떠들면서 여름밤을 즐겼다. 낭만적이었다. 아내와 나도 이번 여행에 대해 좋았던 점을 서로 나누며 축배를 들었다. 14박 15일 동안 잘 즐겼다. 이렇게 충전한 에너지로 내일부터 다시 최선을 다해 일상에 복귀해야 할 것이다. 발리의 마지막 밤이 깊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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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이 좀 더 흐른 후 일상에 지쳐 길을 헤매다가 어느 날 문득 어머니 같은 아늑한 쉼터가 절실하다면, 다른 곳은 몰라도 길리는 꼭 한번 다시 들리고 싶다. 바다를 여유롭게 헤엄치는 거북이를 만나 함께 헤엄치며 이렇게 숨 가쁘게 사는 게 맞는지 스스로 되돌아보는 시간을 갖는 것도 좋을 거 같다. 거북이야 동그란 눈을 껌뻑거리며 무심한 듯 아무 말도 하지 않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