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트리사이드 다이어리
어제는 영업을 끝내고 이알과 썬님네로 놀러 갔다. 정확히 말하면 놀러 갔다기보다는 썬님네 집 뒤뜰에 잔뜩 난 머위를 뜯으러 갔다. 그걸로 쌉싸름하고 고소한 주먹밥을 만들 요량으로. 머위를 뜯는 우리의 일상은 제법 리틀포레스트 같았다. 그런데 이제 라면을 좋아하는 자연인들로 구성된.
새벽 5시 반에 일어나 마감까지 달린 이알과 나는 밥 한 끼 제대로 먹지 못한 상태였으니. 자연스레 썬님께 먹을 걸 찾았다. ㅎㅎㅎ 썬님이 꺼낸 자연드림 라면 앞에서 우린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 비도 오고, 거부할 수 없었다. 보글보글 계란을 3개나 풀고 파를 쫑쫑 썰어 넣은 맛난 라면을 사이좋게 나눠먹었다. 밀가루를 피해야 하는 썬님은 계란 푼 라면국물에 누룽지를 풀어 먹었다.
"설거지는 내가 할 테니, 너는 썬님한테 카드 해달라고 해."
이알은 전날 썬님네서 저녁을 먹으면서 아주 재미있는 카드를 했다고 했다. 질문할 거리를 갖고 카드를 뽑으면 카드를 뽑은 자가 스스로 통찰을 얻을 수 있다나. 난 가벼운 마음으로 오케이 고 했고. (마침 설거지도 해준다니 호호.)
썬님은 식탁 아래에서 크고 작은 카드를 머리끈으로 묶어 놓은 카드봉투를 꺼냈는데, 그 위용이 범상치 않았다. 지퍼백 안에 담겨있지만 카드는 색깔과 크기가 종류별로 다양해서 꽤나 구성져 보였다.
하지만 이 카드의 본질은 안내자에게 있었다. 이 카드과정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것은 질문을 뽑아내는 썬님의 방식이었다. 질문이 있냐는 썬님의 말에 나는 소심하게 답했다.
"음, 글을 쓰고 싶은데 글을 안 써. 그게 고민이야. 나는 왜 안 쓸까?"
"글을 왜 안 써? 그냥 쓰면 되지 않아?"
"그러니까 내가 글쓰기를 너무 잘하고 싶은 건지... 자꾸 미루게 돼. 그냥 쓰면 된다는 걸 아는데."
"어떤 장애가 있어?"
"아마 나는 비판받는 게 무서운 것 같기도 해.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할까 봐."
"왜 그럴까?"
"그건 내가 너무 잘하고 싶어서랄까?"
썬님은 더 본질적인 질문을 끌어올려야 한다고 했다. 그렇게 질문이 오가자 뭐랄까 이미 답이 나온 느낌이었다. 알잖아, 알잖아 나야. 알면서 왜 안 하니?
이알이 옆에서 설명했다. 스스로 구할 수 있는 답인지, 아니면 정말 절실한 질문인지를 판단해야 한다고. 그래. 사실 나는 답을 안다. 그냥 하면 되잖아. 그런데 왜 미룰까. 미룰 수 있으니까 미루겠지? 절실하지 않은 건가? 아니다, 잘 쓰고 싶은 마음은 있는데. 앞으로도 시간이 있다고 생각해서? 그러니까 시간이 유한하다는 느낌이 없어서? 그래 그런 걸 지도 모른다. 속으로 맴도는 말들 속에서 혼란스러워 보였는지 썬님은, "그래! 해보자"하면서 카드를 펼쳤다. 썬님은 카드를 뽑을 때 계속 질문을 떠올리라고 말했다.
내가 가장 먼저 고른 카드. 이 카드는 전체 주제를 아울러 통찰을 주는 카드였는데, 보통 이 카드엔 정확한 메시지가 있다. 하지만 내가 고른 카드는 텅 비어 있었다.
"어머. 블랭크네. 그래, 비어 있기도 해. 오디한테 오는 통찰이 있어?"
비어있는 카드를 보자마자 나는 깨달았다.
"이 질문에 가타부타할 말이 없다. 하던가 그냥 하지 않던가. 선택과 행동만이 있을 뿐. 할 거면 하고, 아니면 말아라, 더 이상 논할 말이 없다. 그런 것 아닐까?"
"그래, 그렇게 자기한테 오는 통찰이 있으면 된 거야."
그 뒤로도 카드를 몇 장 더 뽑았고, 나는 나름대로 해석해 가며 통찰을 만들어갔다. 그러고 나니 나는 내 질문에 대한 하나의 이야기를 스스로 만들어가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뭐랄까 하나의 서사로서 내 문제를 스스로 정리 한 느낌. 라면 먹고 가볍게 한 카드인데, 그날 나는 아주 대단한 비밀을 알게 된 기분이었다.
좋은 일상을 보낼 '결심'을 매일 새롭게 해야 한다. 맨날 결심만 하고 실천하지 못한다고 결심까지 피할 필요는 없다. 결심이 시작이었던 것이다. 마음을 먹는다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실천하지 못할까 봐 결심하는 것을 두려워했던 것 같은데 아니었다. 매일 새롭게 결심해야 한다. 그리고 결심에 못 미쳐도 조금씩 실천해야 한다. 그리고 중요한 것. 그 일상 안에 글쓰기를 조금 넣자. 쓰지 않으면 결국 아무것도 아니다. 쓰거나, 쓰지 않거나. 잘 쓰는 것은 애초에 없다. 왜냐면 잘 쓰지 못할 것이기 때문. 그냥 쓰면 쓰는 것이다.
"썬님. 내가 오늘 꼭 3 문장이라도 쓰고 잘게. 내 이건 약속할 수 있지."
그날 나는 정확히 5 문장을 쓰고 잤고, 미루고 미루던 냉장고 청소를 깨끗하게 끝냈다. 그 카드가 없었다면 나는 매일 새로이 결심하고 새로이 살 생각을 했을까? 고작 5 문장이지만 5 문장을 쓸 생각을 했을까?
기묘하다. 질문을 던진 사람도 나고, 답을 만들어간 사람도 나이거들. 나는 카드를 하기 전의 나와는 조금 달라져 있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