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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리 Sep 13. 2022

2022년, 한 발 늦은 상반기 회고.

에이전시 맛보기, 번아웃, 일을 하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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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날이 선선해지고 있는 9월 중순이다. 오랜만에 적는 글이기도 하다. 일기 형식으로 조금씩 중간에 끄적이기도 했지만, 압축된 시간을 보냈던 올해 상반기를 진지하게 돌아보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짧은 근황을 이야기하자면 며칠 전에 퇴사를 했고, 한 차례 번아웃이 와서(!) 주변 지인분들께 해결 방법을 여쭤보고 많은 도움을 얻었다. 이는 객관적으로 내 상태를 점검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는데, 아웃풋과 별개로 개인적으로는 뭐 하나 제대로 되는 것 없이 엉망진창으로 흘러온 상반기였다고 생각한다. 꽤 고통스러운 상반기였다. 최근 눈앞에 놓인 선택지와 가능성을 고민하고 있던 찰나, ‘key맨은 언제나 본인임을 잊지 말라’는 지인분의 조언 덕분에 어지러웠던 마음을 잘 가라앉힐 수 있었다.




에이전시에서의 5개월.

누구나 그럴싸한 계획을 갖고있다. 쳐맞기 전까지는 ..


4월 중순 즈음, 광고 크리에이티브 기반 에이전시에 입사했다. 개인적으로 멋지다고 생각하는 최고의 동료가 그곳에 있었고, 다시 함께 일할 수 있어서 진심으로 기뻤다. 이곳에서 다양한 카테고리와 더불어 기획의 앞단 과정을 간접적으로나마 경험하고 싶었는데(디자인적으로는 크게 기대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퀄리티에 타협하지 않는 사람들이 모여있다는 사실이 합류의 가장 큰 계기가 되었다.


여태까지 인하우스만 다니다가 에이전시는 처음 맛봤는데(?) 확실히 여러 면에서 다른 점을 느낄 수 있었다. 1) 클라이언트 비즈니스이기 때문에 업무량은 기본이고 불가피한 일정이 급박하게 돌아가는 점, 2) 구성원 개개인이 프로젝트의 소중한 리소스이자 맨파워가 중요하고 3) 결정적으로 브랜드의 owner가 아닌 파트너로서 일한다는 점이 크게 달랐다. 사실 어떤 도메인과 회사를 막론하고 조직문화가 전부라고 생각하는 편인데, 특히 에이전시에서는 환경이 빡센 만큼 인터널 브랜딩이 중요하게 다가왔다. 체감상 시간의 밀도가 2배 이상 되는 것 같다. 내가 맡은 업무는 에이전시 구조와 비교했을 때 약간 결이 달랐지만, 브랜드 디자이너로서 회사 리브랜딩을 우선으로 담당하고 클라이언트 프로젝트를 2순위로 가져가는 역할이었다. 막상 둘 다 경험해보니 내부 프로젝트가 성향상 훨씬 잘 맞았다.


경험이 쌓이면 쌓일수록 내가 잘하는 것과 좋아하는 것이 점차 명확해진다.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개인의 성향과 호불호를 좀 더 파악하게 되었는데, 크게 잘했던 점과 아쉬웠던 점을 행동 기반으로 적었다.



잘했던 점 :

퀄리티를 쉽게 타협하지 않았던 점

→ 구현할 수 있는 방향 내에서 결정하기보단, 프로젝트에 어울리는 최적의 방향을 우선으로 고려하기

→ 기획 의도에 부합하는 컨셉과 디자인 에셋을 내부 피드백을 거쳐 꾸준히 업데이트 하기 (좋은 디자인과 경험, 차별화는 모두 압축된 디테일에서 온다)


(작은) 주인의식을 갖고 임했던 점

→ 프로젝트에 속한 전문가임을 상기하기(책임)

→ 앞단 배경과 맥락을 먼저 이해한 뒤, 작업 이전의 방향성을 문서로 정리하기

→ 작업 범위에 속하지 않은 영역을 개발해서 추가로 제안하기(실제로 수용되었다!)


'무언가'를 탓하지 않았던 점

→ 결과물이 불가피한 환경과 제약으로 인해 되었다는 건 '멋없는 태도'라는 동료의 말에 공감했다. 무엇보다 탓한다고 해서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 매번 100% 최선을 다하진 못했지만, 적어도 스스로에게 떳떳하기 위해 주어진 재료로 당장 할 수 있는 결과물을 만들었다.

→ 그 외 개인으로서 기여할 수 있는 작은 행동들(리소스 공유, 프로젝트 도움, 칭찬, 업무 툴 제안 등)



카페인으로 쭉 이어가다 엔진 사망트리

갑작스레 맞이한 번아웃


대략 7 ~ 부터였던  같다. 스스로의 기준이 높았기 때문인지, 동시다발적으로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는 상황에서 알게 모르게 조금씩 지쳐가고 있었다. 사람의 체력과 에너지는 한정적인데 여러모로 오만했다고 생각한다. 주말과 평일, 집과 회사의 경계가 흐려지던 와중에 문득 우선순위가 무너지고 강한 무기력함을 느꼈다. 작업을 하고 있는 순간이 전혀 행복하지 않았고, (이런 느낌이   상상도 하지 못했다) 새벽에 모니터 앞에서 멍하니 있는 시간이 점점 길어졌다. 지나가는 차에 치여서 그냥 누워있고 싶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모든  흐릿해진 상태에서는 일단 강제로 환경을 벗어나서 스스로를 돌아보는  차라리 좋겠다는 판단을 내렸다. 건강관리도 기본 의무인데 '체력이 태도가 되지 않게 하자' 매일의 다짐이 무색하게 아쉬움으로 남아버렸다. 흑흑.



아쉬웠던 점 :

팀원들과 대화를 많이 못했던 점

→ 번아웃이 온 이후로 점점 말이 없어지고, 프로젝트 이외에 사소하게 먼저 말을 거는 상황이 줄었다.

→ 갖고 있던 비전과 방향성을 수시로 주변 동료들과 토로하고 교류하지 못했다. (제일 아쉽다)


도움을 요청하지 못했던 점

→ 정확히는 용기가 없었다. 다른 동료들도 힘든 상황에서 괜히 짐을 보태는 느낌이 들었다.

→ 내 상태를 솔직하게 인정하고, 현재를 점검하면서 시스템을 보완하고 개인의 지구력을 기르는 계기로 만들었다면 어땠을지.


감각적인 요소를 말로 풀어내기 어려웠던 점

→ 취향의 영역을 넘어 '공감할 수 있는 디자인'을 빚어내는 과정의 어려움(모티프, 단어, 기획 의도)

→ 퇴사 한 달 전 디렉터님이 합류해서 잠시나마 합을 맞출 수 있었는데, 커뮤니케이션 방식을 직간접적으로 참고할 수 있었다.



그 외 함께했던 경험들

일의 고됨은 다른 일로 치유하기(?)

회사 업무와 병행하는 과정에서 꽤 고되기도 했었지만, 동시에 좋은 동력이 되어줬던 몇몇 프로젝트(내지 경험)들이 있다. 중간에 드롭되거나 현재 진행 중인 몇몇은 일부 제외하고, 개인적으로 의미가 있었거나 외부에 공개된 프로젝트에 한해서 기재했다.


무디타(Mudita)

올해 초, 제주도 수산리에 위치한 독채 펜션 '무디타'의 브랜딩을 베어핸즈(barehands)크루 팀원들과 함께했다. 호스트인 지은님의 진심이 담긴 공간에 직접 머무르며, 공간이 추구하는 유형적/무형적 가치와 실제로 보이는 영역에서 구체화하는 과정까지- 브랜드 기획자가 사고하는 흐름을 옆에서 지켜본 것만으로도 정말 많이 배웠다. 이 프로젝트를 통해 위로받고, 작업자로서의 스타일을 한층 분리해낼 수 있었다.


멋쟁이 사자처럼(Likelion)

4월 초, '리액트(React)로 점심메뉴 뽑기 개발하기' 클래스의 그래픽을 작업했다. 기존 멋사의 그래픽 스타일을 유지하되 컨셉을 표현하는 방향을 내부에서 제시해주셨다. 협업 기간은 짧았지만 멋사의 커뮤니케이션 방식과 내부 가이드&시스템이 잘 구축되어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구체적인 피드백을 통해 디벨롭했던 과정이 좋았고, hand-off 이후 갖는 리뷰 세션까지 산뜻하게 마무리된 기억으로 남았다.


뉴웨이즈(Newways)

5월 말, 오프라인에서 열리는 'PLAY NEW SCENE' 팝업을 위한 디자인을 했다. 플뉴씬은 젊치인을 키우는 에이전시 '뉴웨이즈'가 후원자들과 그동안의 발자취를 돌아보고, 다음 모습을 그리기 위한 자리이자 공간이었다. 뉴웨이즈는 정치에 실망했거나 무관심한 개인에게 꼭 필요한 브랜드라고 생각한다.(본인 포함) 이번에도 기획을 보자마자 반해서(?) 무리하게 작업했다가 개인적으로 아쉬움이 남는 완성을 했지만, 민해님과 혜민님 덕분에 감사하고 좋은 추억을 만들었다.


해커톤(Junction Asia 2022)

8월 중순, 유진님의 제안으로 오랜만에 오프라인 해커톤에 참여하게 되었다. 팀빌딩 당시 몇몇 분들은 SNS를 통해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합을 맞춘 건 처음이었는데 약간 해커톤을 매개로 작은 스타트업(?)을 경험한 기분이었다. 참여 전날까지 밤을 새서 당일 컨디션이 별로였는데(모두가 그랬던 웃픈 사실 ..)현장의 운영과 몰입감에 압도돼서 되려 각성했던 것 같다. 운좋게도 트랙에서 2등을 했고, 함께한 팀원분들께 정말 많은 자극을 얻었다.

ZEP Track Winner(2nd) :
**ZEP Studio(Block Coding Editor) 보러가기



일을 하는 이유


사실 5월 초에 이미 한번 번아웃의 조짐이 왔었지만 가까스로 억눌렀던 기억이 난다. 숨 가쁜 기간을 보내고 베어핸즈(barehands) 크루 팀원들과 무디타에 머무르며 천천히 생각했다. 결국 공동체가 추구하는 비전이 아무리 멋지고 의미 있더라도, ‘개인의 행복보다 우선시될 수 없다’ 라는 현실적인 결론을 내렸던 것 같다. 그렇다면 나의 행복은 어디에서 비롯될까. 당시 사고 흐름의 연장 선상에서 앞으로도 잃지 말아야 할, 정신적으로 추구하는 ‘나 다움’이 무엇인지 고민하는 시간을 가졌다.


나의 행복은 관계에서 온다. 바운더리가 넓진 않더라도 좋아하는 사람들과 시간을 보낼 때, 또 서툴더라도 내 마음을 표현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손에 잡힐 것만 같은 행복감을 느낀다. 혼자 있을 때의 평온함과는 완전히 결이 다른 충족감이다. 일도 마찬가지다. 자아실현을 위한 업이자 노동으로서 선택한 디자인이 즐겁다. 힘들 때도 있지만 쉽게 포기하고 싶지 않을 정도로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좋은 결과는 (물론 기쁘지만) 매번 찾아오는 건 아니므로, 오히려 과정에서 함께 몰입하며 나아가는 동료의 존재가 곧 지속 가능한 행복에 가까운 것 같다.

기회는 사람을 통해 오고, 기회는 노력을 편애한다.

내가 추구하는 기준과 별개로 개인의 노력은 존중받아야 하고, 어떤 상황에서든 배울 점은 넘쳐난다. 그럼에도 성향에 부합하는(최대한의 시너지를 낼 수 있는)환경을 찾아내서 몰입하는 방향이 가장 효율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젊음과 자원은 한정되어 있고, 언젠가의 죽음을 막연하게나마 상상해보면 현재를 대충 살고 싶지 않다. 그러기 위해선 개인의 역량을 키우고 함께하고 싶은 동료가 되는게 우선이다. 기왕 일하는 거 재밌게, 탁월하게 일하고 싶다. 모든 선택이 최고는 아닐 수 있어도, 일단 선택했으면 후회하지 않도록 만드는 건 오롯이 내 몫에 가깝다.


일에서 얻는 기쁨은 해냈다는 성취감과 더불어 함께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과정 그 자체에서 온다. 때문에 열심히 하되, 언제나 친절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본다. 어렵지만 인간적인 마음을 유지하고, 일에 의미를 부여해서 과정에 최선을 다하자.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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