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트레스받을 땐 테트리스
나는 게임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승부욕이 그다지 없는 데다, 게임에서의 보상이 현실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사실이 불편하고, 게임을 할 때면 빨리 지나가는 시간이 아깝기 때문이다.
그런 내가 테트리스에 푹 빠졌다.
우연히 테트리스를 시작한 지는 2년 정도 되었는데, 다른 게임과 달리 이건 참 희한하게 승부욕이 생겼다. COM1의 승부에서 승리를 거머쥐면 '오늘 저녁은 치킨이닭'하는 기분이 뭔지 제대로 알겠더라. 아직도 레벨3의 COM1은 초집중해야 간신히 승리할 수 있지만, 조금씩 늘어가는 듯한 나의 컨트롤 실력을 느끼자면 뿌듯함도 느껴진다.
스트레스를 받을 때 테트리스를 하는 것이 유의미하게 도움 된다는 연구결과*가 있다. 실제로 나는 그걸 경험했다.
* 영국 옥스퍼드 대학과 스웨덴 카롤린스카 연구소 공동연구팀은 테트리스 게임이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트라우마)를 줄이는 데 효과가 있다는 연구결과를 발표했다.
한참 회사 일로 스트레스를 많이 받을 때, 집에 오면 테트리스를 켰다. 내려오는 조각들을 잘 정리해 짜 맞추다 보면, 머릿속 잡생각과 불편한 감정들이 명상을 하듯 자연스럽게 빠져나갔다.
업무 스트레스가 극심했던 시기에는 몇 시간을 조이스틱을 붙들고 테트리스를 해댔는지, 양손의 엄지근육이 고장 나 통증이 생기는 바람에 한참을 지지대를 해야 했다.
이 모양새를 보고 회사에서 '아이고 고대리, 일을 얼마나 열심히 했으면!' 하는 반응을 보인 것이 개그. 굳이 부정하지 않고 '하하.. 그러게요.'한 나는 레전드. 뭐 회사에서 받은 스트레스로 테트리스를 한 거니까... 틀린 말은 아니지?
그간 나는 어딜 가서 '취미가 무엇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어려웠다. 꽤 오랜 시간 나는 취향 없고 줏대 없는 편이었다. 이렇다 할 가치관도 없고, 뭐든 우유부단한.
노래 부르는 걸 좋아하지만, 취미로 즐길 수 있는 일이라고 말하기엔 애매했다. 취미란 건 언제라도 하고 싶을 만큼 좋은, 그만큼 스트레스가 풀리는 일이어야 하는데, 스트레스를 많이 받은 날은 딱히 노래를 부르고 싶지가 않았기 때문이다. 독서나 악기연주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한동안 내 취미는 '스마트폰'이라고 해야 하나 진지하게 고민한 적도 있다. 물론, 어디 가서 그렇게 말하긴 참 볼품없다 여겨 입 밖으로 꺼낸 적은 없다. 휴.)
그런 내가 '전 테트리스가 취미예요'라고 말할 수 있게 됐다.
테트리스는 그야말로 내가 이상적으로 생각한 취미 그 자체인 것 같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푹 빠지게 되고, 스트레스가 풀리는 것. 남들이 뭐라건 즐기게 되는 것. 엄지손가락이 망가지도록 집중할 수 있는 것.
생각할수록 취미로 테트리스를 하는 내가 마음에 들었다. 그렇게 나는 '취미가 테트리스입니다'라고 말하는 게 썩 만족스러워서 테트리스를 더 좋아하게 되었다.
자기소개서나 이력서에 들어가는 고작 그만큼도 확실하지 않은 내 모습이 불편한 적이 많았는데, 아직도 크고 있는 중이었나 보다. 모호한 모양의 내가 30대가 되어 취미라던지, 취향이라던지 스스로의 생김새를 가꾸어 가는 것을 느끼자니, 인생이 테트리스만큼 재미가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저랑 테트리스 한 판 뜨실 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