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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계 Aug 08. 2020

이름에 대한 이야기.

: 황정은, 『계속해보겠습니다』


 언젠가 나를 알지만 알지 못하는 사람들과 함께 밥을 먹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서로의 얼굴과 어느 소속이 되어 있는지 알지만 정확하게 저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요. 누구나 하루의 한 번쯤은 그런 사람들과 말을 하잖아요. 딱 그 날이었습니다. 어떤 음식인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저는 열심히 먹었습니다. 그러던 중 탁자의 진동이 울렸습니다. 제 핸드폰엔 000 씨라는 글자가 떴습니다. 다들 웃으며 질문을 했습니다.


“누구야? 남친이야?”

저는 대답했습니다.

“아빤데.”


 열중하던 젓가락과 숟가락이 아주 잠시 멈췄습니다. 물어본 사람은 겸연쩍어졌고 어떤 이는 호탕하게 웃으며 누가 아빠를 이름으로 저장해 놓냐고 했습니다. 


그러게요. 


 하지만 아빠가 아니라 이름 석 자가 아빠인걸요. 나의 엄마는 엄마가 아니라 이름 석 자가 엄마인걸요. 

마치 애자는 애자지라는 이 소설처럼요. 어쩌면 소라와 나나가 애자를 애자라고 부르는 이유와 나의 부모를 이름 석 자로 저장해놓은 이유가 같을지도 모릅니다.      


 사랑하는 금주 씨가 떠난 애자와 그 둘의 아이인 소라와 나나. 그리고 옆집에 살던 나기와 순자 씨. 자신의 이야기를 관조적으로 말을 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저 또한 제 삶을 한번 그렇게 바라보니 참으로도 단순하면서도 잔인하더군요. 소라와 나나 그리고 나기가 그랬을까요. 가끔은 책을 보면서 저도 알지 못하던 이유를 찾곤 합니다.      

 

 계속해보겠습니다. 무엇을. 도대체 무엇을 계속해보겠다는 것일까. 의문은 소라와 나나 그리고 나기로 향하는 순간. 파란 종이를 덮는 순간 깨달았습니다. 주어가 없는 이 문장을 채우는 것은 당신만이 할 수 있겠지요. 저는 정의하고 싶지 않습니다. 다만, 저 또한 계속해보겠습니다.      


 저는 소라가 참 많이도 공감이 갔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글에 밑줄도 많이 쳐져 있었습니다. 나나의 임신이 확실하진 않지만 그런 낌새를 느낀 소라는 애자에 대해 생각을 합니다. 금주가 없어진 애자는 수백 번 이미 죽은 사람처럼 공허한 삶을 산 것으로 추측합니다. 자식도 돌보지 않고 최소한의 숨만 쉬며 살아가는 그런 사람이죠. 애자 밑에서 자란 소라는 엄마가 된다는 나나의 상황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엄마가 된다는 것은 애자가 된다는 것이고 가엽지만 없는 편이 좋은 존재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나는 엄마가 되기로 하죠. 저 또한 이해가 가지 않았습니다. 저는 애자가 되기 싫습니다. 저는 엄마가 되기 싫습니다. 애자는 없는 편이 좋으니까요. 

 

 자식을 돌보지 못하고 죄책감을 자식에게 넘겨주는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 너희는 행복하냐고 물으며 왜 너희만 행복하냐는 그 말 말입니다. 역시 애자는 없는 편이 좋습니다.      


 사실 하고 싶은 말이 많은데 생각이 정리되지 않습니다. 아마 이 책은 제가 평생 안고 가야 할 책인 것 같습니다. 모세 씨네 가정은 TV가 없으면 대화를 할 수 없고 아버지의 요강을 어머니가 치우는 평범한 대한민국 가정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과연 평범할까요. ‘가족이니까’라는 폭력을 작가는 완벽하게 꼬집어줍니다. 오히려 소라와 나나, 나기가 만든 가정은 모세 씨의 가정보다 더 돈독하고 완벽합니다. 서로를 지키고 생각하고 부족하지만 만두를 만드는 과정처럼 서로를 보듬어줍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가정이란 것이 무엇이고 각자의 역할이 무엇인지 다시 생각하게 해줍니다.      


소라와 나나, 나기가 함께 밥 먹는 장면이 생각납니다. 


“이 정도로 자랐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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