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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석철 Jan 24. 2020

오래된 미래 라다크로부터 배우다

우리는 너무 멀리 와버린 걸까?

  학생들 입시 지도를 하다 보면 학생부를 종종 보게 된다. 그중에서 유독 관심이 가는 곳은 '독서 활동 기록란'이다. 30년 이상 서점 아들로서 살아서 그런지 무슨 책을 읽었는지에 관한 원초적인 호기심이 남들보다 더 강한 편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아이들이 읽은 책이 신기하리만치 비슷하다. 그나마도 실제로 읽었는지는 미지수이지만. 우스갯소리로 '선 기록 후 독서'라는 말도 떠돈다. 그래서일까? 교육부는 추후에 독서기록에 관한 부분을 축소하겠다고 발표했다. 사실 독서가 모든 배움의 시작이자 끝인데, 입시의 공정성 때문에 이런 결정을 내리게 되어 유감이다.


  학생들마다 관심분야가 다를 텐데 어떻게 다들 비슷한 책을 읽은 것일까? 찾아보면 학생들이 읽은 책의 출처는 대학 추천 도서로 거슬러 올라간다. 아이들 입장에서는 수많은 책 중에서 어떤 것을 읽을지 선택하기 쉽지 않을뿐더러, 읽은 책이 입시에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크다. 그래서 대학교 추천 도서는 일종의 고등학교 독서의 가이드라인 역할을 한다.


  어쨌든 아이들이 많이 읽는 책을 읽어보지 못했다면 개인적으로 조금 창피함을 느낀다. 선생님이란 소리를 들으면서 학생들보다 지식수준이 떨어진다면 부끄러운 일 아닌가! 총균쇠, 이기적 유전자, 에밀 등도 그렇게 해서 읽게 된 것이다. 

  

  이번에 선택한 책 <오래된 미래>도 그러한 이유로 고른 것이다. 고백하자면 거실 서재에 꽂혀 있었는데, (몇 년 동안 거실에 있었는지조차 알지 못했다) 얼마 전 우연히 눈에 들어와서 알아보니 청소년 추천 도서, 대학 필독서 등에 이름을 올리고 있는 책이었다. 


이 책은 헬레나라는 한 여성이 라다크에서 살면서 느낀 점을 쓴 책이다.


  이 책을 한 마디로 설명하자면 전통 사회가 가지고 있는 장점들을 설명한 것이다. 어찌 보면 '협동' '배려' '나눔' 등을 설명한 뻔한 책일 수도 있다. 하지만 더 나은 삶을 찾아 무한 경쟁을 하는 우리들이 놓치고 있는 것은 없는지 다시 한번 생각해볼 기회를 제공해준다. 


  '라다크'는 '라 다그스라'는 티베트어에서 파생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그 뜻은 '산길의 땅' 이란 의미이다. 라다크에는 100가구가 넘는 마을이 거의 없다. 그러다 보니 모든 주민들의 상호의존도가 아주 높다. 이런 소규모 사회에서는 도시에서 상상하기 힘든 일이 벌어진다.


  예컨대 이런 식이다. 책의 저자 헬레나는 살고 있는 집이 조금 시끄러워 다른 곳을 알아보고 있었다. 하지만 새 집주인은 지금 살고 있는 집주인과 먼저 합의를 보고 오라고 한다. 그 이유를 그는 이렇게 설명한다. 


"현재 살고 있는 집주인이 언짢아하실 거예요. 그분한테 먼저 이야기하세요. 우리는 함께 살아야 하잖아요."


  새롭게 이사를 옮길 집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먼저 지금 살고 있는 집주인과 마무리를 짓고 오라는 말이다. 이는 도시에서 사는 사람들이 이해하기 힘든 사고방식이다. 도시에서는 철저하게 수요자와 공급자의 관계로 유지된다. 돈을 주고 물건이나 서비스를 구매하는 것이지, 그 외에 인간적인 관계는 부차적인 것이다. 


  하지만 라다크에서는 이웃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돈을 버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 상대의 마음을 상하게 하거나 화를 내서는 안 된다는 배려가 라다크 사회에 깊게 뿌리내리고 있다. 아마도 소규모 사회라서 가능한 것일까?


왼쪽 위에 흰머리 여성이 책의 저자이다. 그는 책의 말미에 라다크의 변화가 두렵다고 책에 기술하고 있다.


  책에서는 라다크가 현재 변화하고 있는 모습도 솔직하게 보여주고 있다. 저자는 변화의 원인을 문화, 교육, 개발 등의 이유로 설명한다.


  문화라는 것은 삶의 모든 방식을 아우르는 말이다. 학계에는 문화에 대한 정의만 600개가 넘는다고 한다. 사실 문화라는 것은 삶 그 자체이다. 요즈음 교통, 정보통신의 발달로 다른 문화권에서 자란 사람들이 만나는 일이 점점 빈번해지고 있다.


  그런데 다른 문화가 만났을 때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지기도 한다. 예컨대 외국의 영화를 보는 라다크 젊은이들은 영화의 장면들과 대비되는 자신들의 삶은 미개하고 시시하다고 인식하기 시작했다. 그전까지는 행복하고 평화롭게 살아오던 사람들이 자신들의 전통문화에 대해 열등의식을 갖게 되는 것이다.


  사실 사람들이 청바지를 입는 이유가 그것이 매력적이거나 편안한 옷이어서가 아니라 현대화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누군가에게 존경을 받고 사랑을 받기 위해 물건을 구매하는 모습을 지켜본다는 것은 정말 가슴 아픈 일이다. 실제로는 그것이 정반대의 결과를 낳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멋진 멋진 승용차를 새로 구입했다면 그 사람은 그런 것을 갖지 못한 사람들로부터 멀어지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 사람은 사람들의 무리에 속하고 싶다는 욕구가 더 강해지는 악순환의 고리에 빠지게 된다.


  하지만 그들은 서구사회의 내부에 존재하는 사회적이고 정서적 측면들, 무한경쟁, 과잉 스트레스, 고독감, 외로움, 지나친 개인주의 등을 모른다. 더욱이 이런 현대화의 상징물들이 라다크에 들어오면서 사람들의 공격적 성향이 짙어지기 시작했다고 저자는 기술하고 있다. 그리고 이는 비단 라다크에서만 적용되는 현상은 아닌 것 같다.


라다크의 때 묻지 않은 순수한 아이들. 그러면 도시에 사는 우리들은 때 묻고 순수하지 않은 것일까?


  전통적으로 라다크에는 노래하고 춤추고 연기하는 문화가 활발했다. 남녀노소의 구분 없이 모든 사람들이 그랬다. 사람들은 화로나 모닥불 주위에 둘러앉아 춤을 추고 노래를 했고 걸음마를 못 뗀 갓난아이까지도 어른들의 도움을 받으며 그런 자리에 함께 했다. 모든 사람들은 노래하고 연기하고 연주하는 법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라다크에서 라디오 방송이 나오는 요즘 사람들은 노래를 부르거나 이야기를 직접 할 필요가 없어졌다. 그냥 앉아서 최고의 가수와 최고의 재담가들의 노래나 이야기를 들을 수 있게 된 것이다. 그 결과 사람들은 소극적이고 내성적으로 변해갔다. 


  중요한 건 사람들이 라디오에 나오는 스타들을 절대 앞서지 못한다는 것이다. 함께 모여 노래하고 춤을 추는 대신 사람들은 그냥 수동적으로 자리에 앉아 라디오에서 들려주는 최고의 것들을 듣는다. 그러는 사이 공동체의 연대관계는 약해질 수밖에 없다.


라다크보다 더 '개발'된 국가에 사는 우리들은 더 이상 천진난만한 아이들의 표정을 볼 수 없다. 과연 진정한 개발이란 무엇일까?


  믿기 힘들지만, 라다크 사람들은 스트레스나 지루함, 좌절감 같은 것을 경험한 적이 없다고 한다. 한 번은 저자가 마을 사람들에게 스트레스의 개념을 설명하려고 한 적이 있었는데. 그들은 이해를 하지 못했다. 그리고 되물었아.


  "그러니까 일을 해야 되기 때문에 화가 난다는 말인가요?"


  또 저자는 한 때 마을에 사는 어머니들에게 만약 아이가 걸음마를 늦게 한다면 걱정을 할 것 같은지 물어보았다. 어머니는 웃음을 터뜨렸다.


"왜 그런 것 때문에 걱정을 해야 하죠? 아이는 때가 되면 걸을 텐데요."


  흔히 더 개발된 나라에서는 어린아이의 나이에 맞는 키와 체중의 표준치를 정한다. 그리고 그 평균치에 해당되지 않는 아이들에 대해 부모가 뭔가를 해야 한다고 압박한다. 기업들은 어떻게 해서든 부모들의 지갑을 열어야 하는데 아이들에 대한 사랑만큼 확실한 동기도 없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는 그렇게 다들 불안하고 경쟁적으로 변해가는 것은 아닐까?


경쟁, 입시, 취업, 실업, 노후 스트레스가 없는 곳에서의 삶은 어떨까?


  사실 전통적 라다크 사회에는 실업이라는 것이 없었다. 그러나 요즘 도시 지역에서는 정부기관에서 내놓은 몇 안 되는 일자리를 놓고 치열한 경쟁이 펼쳐지고 있다.


  오늘날 세계의 곳곳에서 교육이란 이름으로 진행되고 있는 과정들은 유럽 중심의 모델에 기초하고 있는데, 교과서는 사실 '그들의' 관점으로 서술한 정보들을 전파한다. 


  은연중에 학교의 모든 교육 내용은 서양의 것들이 우월한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으며, 그 직접적인 결과로 어린 학생들은 자신들의 고유한 전통을 부끄러워하게 된다. 


  강요된 서구의 표준 이미지를  추구한다는 것은 자신의 고유문화와 뿌리를 부정하는 것이며 결과적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부인하는 것이다. 그에 따른 소외 현상은 적개심과 분노를 초래한다. 이것이 오늘날 세계 전역에서 나타나고 있는 폭력 사태와 근본주의의 원인이 되는 아닐까?


개발이 되어 전통가옥이 아파트로, 오토바이를 승용차로 변한다면 그들은 더 행복해지는 것일까?


  처음 라다크에 도착했을 때 나를 너무나 놀라게 했던 것은 사람들의 욕심 없는 모습이다. 물질적인 이익을 위해 자신들의 여가나 일상의 기쁨을 포기하려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당시 그곳을 찾은 관광객들은 돈을 아무리 많이 준다고 해도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물건을 절대 팔지 않았다.


  하지만 투자자들이 라다크를 개발하기 위해서는 그곳 사람들을 탐욕스럽게 만들 방법을 찾아야 했다. 그렇지 않고서는 그들을 움직일 수 없기 때문이다. 개발은 불만족과 탐욕을 부추기면서 1000년이 넘도록 안정감 있게 유지해 온 경제체제를 파괴하고 있다. 


  개발 계획이 추진되고 16년 정도가 흘렀을 무렵 라다크 사회의 빈부격차가 더 커졌다. 실업과 인플레이션과 범죄 발생률이 증가했다. 놋쇠 항아리가 분홍색 플라스틱 물통에 밀려나고, 야크 털로 만든 신발이 값싼 현대식 신발들 때문에 외면받는 현실을 처음 목격했을 때 저자는 공포심을 느꼈다고 한다.


  지금 라다크가 겪고 있는 변화의 과정은 결코 독특한 것이 아니다. 본질적으로 똑같은 과정이 세계 전역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경제 지표로 보면 부탄은 세계에서 제일 가난한 나라이다. 부탄의 GNP가 거의 0에 가깝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GNP라는 주요 지표로 활용하는 국가의 재무시스템에는 분명 문제가 있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경제적 관점으로 토마토를 팔거나 교통사고가 났거나에 상관없이 돈이 다른 사람의 손으로 넘어갈 때마다 GNP로 환산되어 더 큰 경제 규모의 나라, 즉 잘 사는 나라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몇몇 나라들은 환경이나 사회에 악영향을 끼치는데도 불구하고 GNP를 끌어올리기 위한 근시한적인 정책을 '개발'이란 이름으로 시행한다.


  예컨대 삼림의 나무들을 모두 베어 민둥산을 만든다 해도 국가의 대차대조표는 더 나아 보인다. 벌목이라는 것이 돈을 만드는 것으로 계산되기 때문이다.


  범죄율이 증가하고 사람들이 오디오나 비디오 플레이어를 도난당해 새 것을 구입하는 경우에도, 또 노인이나 환자를 진료비가 비싼 의료시설에 입원시키는 경우에도, 정서장애나 스트레스 때문에 상담을 받는 경우에도, 물이 오염되어 병에 든 생수를 사서 마시는 경우에도 GNP 지수는 올라가게 되어 그만큼 경제가 성장한 것으로 측정된다.


  자기 집 정원에서 기른 감자보다는 다른 지역에서 재배한 다음 가루로 만들고 얼리고 말린 밝은 색깔의 감자과자를 사 먹는 게 경제성장을 위해서는 더 좋다는 말이다. 이쯤 되니 개발, 경제, 행복에 대해서 매우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우리는 지금도 하늘을 향해 가고 있지만 선진국 사람들은 다시 내려오고 있다. 그들은 그 위는 텅 비어 있다고 말한다.


  세계 인구 가운데 3분의 1에 해당하는 선진국 사람들은 전 세게 자원의 3분의 2를 소비하면서 나머지 사람들에게 자신들이 하라는 대로 따라 하라고 말하는 것은 기만이라고 저자는 분노한다. 


  농경에서의 개발은 지역마다의 환경에 잘 적응하고 있던 농작물의 다양한 종자들을 없애버리고 그것들의 유전정보를 이용하여 합성 종자를 만들어서 농부들에게 이를 사용하도록 한다. 


  그런 합성 종자들은 자체적인 재생 능력이 없는 경우가 많은데 그 때문에 농부들은 대기업들로부터 종자와 화학 물질들을 계속해서 구입해야 하는 순환적 종속구조에 갇혀버리게 된다. 또 화학 농약을 쓰도록 권유받은 라다크 농부들은 그 농약 때문에 해충들이 더 많아졌다고 입을 모은다.


  저자는 개발이란 사실 많은 경우 착취나 식민주의의 완곡한 표현으로 본다. 개발과 현대화의 영향력은 대부분의 사람들을 자급 경제로부터 끌어냈고 환상을 심어주지만 결국 쓰러지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 결과 사람들에게는 물질적으로는 빈곤을, 심리적인 상실감을 초래하게 된다.


  저자는 처음에 라다크 사람들이 보여주었던 기쁨이 넘치는 생활태도와 사람과 사람 그리고 자연 사이의 친밀한 유대관계의 상실을 안타까워하고 있다. 그리고 건강산 사회란 구성원 사이의 친밀한 연관관계와 서로 돕는 분위기를 더욱 북돋아주어야 하고 개개인에게 정서적인 지원을 제공할 수 있는 사회라는 말로 마무리하고 있다.


  책을 읽는 내내 우리나라의 현실과 비교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세계에서 유래를 찾기 힘들 정도로 빠르게 발전한 사회이다. 지금 많은 개발도상국가들의 롤모델이 대한민국이다. 


  물론 과거에 비해서 발전한 것은 맞지만 그 과정에서 대가도 치렀다. 사회가 분열되고, 계층 간 이동 사다리가 없어지고, 중산층이 얇아지고, 집단 이기주의가 만연하고, 서로를 믿지 못하는 사회가 되어가고 있다. 


  라다크 사람들은 자신들이 돈이 많아지고 자동차를 소유한다면 할머니나 할아버지와의 관계가 지금과 달라질 것이라는 사실을 알 길이 없다. 그들도 더 발전하면 직접 경험하게 될 것이다. 그들은 과연 어떤 사회가 더 좋았다고 생각할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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