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모든 알쓰들을 위하여
"에잇, 이번에 들어온 신입들은 술을 잘 못하는 구만!!"
담당님의 따가운 눈초리가 그의 얼굴을 애써 외면한 나의 뒤통수에 와서 박힌다.
난 어느 포워딩 회사의 해외 영업팀에서 근무했었다. 영업 직무답게 술자리가 종종 있었고, 고객과의 술자리보다는 팀원들과의 회식이 잦았다.
처음 부서에 배치받았을 때, 팀원 중 누군가가 나의 주량을 제일 먼저 여쭤보셨고, 나의 주량을 들은 팀원들의 안색이 어두워지는 것을 느꼈다. 익숙한 일이다.
우리 팀의 담당님은 특히 술을 좋아하셔서 회식에 종종 들르시곤 하셨다. 귀가 본능이 투철하셨기 때문에 일찍 일어나셨지만 그 사이 기본으로 3~4병을 거뜬히 비우시는 분이셨다.
한 번은 담당님이 한 명씩 소주를 따라주셨는데, 나의 순서가 왔을 때 내가 술을 못 마신다는 것을 아시고 구박 아닌 구박을 하셨던 적이 있었다. 익숙한 일이다.
단체로 워크숍을 갔을 때 역시 저녁 식사와 함께 거한 술자리가 벌어졌는데, 짠을 할 때마다 담당님과 나의 눈이 마주치면 '술도 못 마시는 애가 워크숍에 왔냐'와 같은 소리를 들어야 했다. 익숙한 일이다.
하지만 괜히 씁쓸하기도 하고 억울하기도 했다. 못 마시고 싶어서 못 마시는 게 아닌데...
선배들은 승진을 하기 위해서는 담당님과 친해져야 하고 그러기 위해선 술을 잘 마셔야 한다고 했다. 괜히 거부감이 들었다. 시작부터 뭔가가 어긋나고 있는 기분이었다.
관세사 합격 후에 면접을 보러 갔던 어느 법인에서는 면접 질문 중 하나로 나의 주량을 물어봤고, 솔직한 답변을 들은 면접관들은 나의 답변을 되물으며 고개를 기웃거렸다. 왠지 잘못된 답변을 한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도대체 알쓰들은 어떻게 사회생활을 해야 할까.
난 흔히들 말하는 '알콜쓰레기', 알쓰다.
주량은 소주잔 기준 2잔이며, 맥주는 유리잔으로 한 잔이다. 이 마저도 마시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졸리기 시작한다. 알콜이 조금만 들어가도 얼굴부터 몸 전체가 빨개지며 몸이 가려운 알레르기 증상이 나타나기 때문에 난 웬만해선 술을 마시지 않는다. 굳이 마셔야 한다면 맥주 한 잔으로 자리가 파할 때까지 버티거나 무알콜 주류를 마신다 (무알콜 칵테일은 사랑한다.).
대학을 다닐 땐 이런 나의 주량이 꽤나 골칫거리였다. 고등학교를 막 벗어난 어리바리 사회인이었던 나는 주량이 정확히 얼마나 되는지 전혀 알지 못했고, 자기 객관화가 되지 않은 상태로 입학한 첫 번째 대학의 과는 하필이면 술을 많이 마시기로 악명이 높았다. 그리고 나는 그곳에서 토마토(토하고 마시고 토하고)를 생애 처음으로 경험해 봤다. 강압적인 분위기에 차라리 맥주를 마시겠다는 말은 감히 하지도 못했고, 소주는 무조건 원샷이어야만 했다. 그렇게 일주일에 몇 번을 억지로 선배들의 손에 끌려다니며 동기들에게 부축당해 집으로 돌아오는 날이 반복됐고, 이전부터 해독기능이 좋지 않았던 나의 간은 주인을 욕하며 장렬히 전사했다. 이후 난 초록색 소주병만 봐도 몸서리가 났다.
두 번째 대학에 들어갔을 때는 이미 나의 주량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조절을 하려고 노력했지만 그래도 사회 초년생들의 미성숙한 관계는 술로써 이어진다고, 어느 자리에 가나 술이 빠지지 않았다. 그래서 난 1학년 때 신입생 OT도 가지 않았고, 밤에 선배, 동기들이 모여 노는 자리에도 가지 않았다. 정상적인(?) 술자리를 알지 못했던 그 당시에는 현란한 술게임과 죽어라 마셔라 하는 술잔이 있어야만 새로운 사람들과 관계를 맺을 수 있다고 생각했기에 북적거리는 모임을 부러워하면서 술을 못 마시는 나의 체질을 원망했고, 새로운 관계를 맺는 것을 두려워했었다.
내가 술자리 포비아를 극복할 수 있었던 계기는 포르투갈에서의 생활 덕분이었다.
시시때때로 짠을 하며 빠르게 술잔을 돌리는 한국 술자리 문화와는 달리 포르투갈 친구들과 펍에 가면 맥주 한 잔, 또는 와인 한 병을 여러 사람들과 나눠 마시며 본인의 속도에 맞춰 그 한 병으로 몇 시간을 홀짝였고, 나는 그 속에서 당당히 콜라를 주문했다. 한국이었으면 하남자스럽다고 핀잔을 들었을 테지만 그곳에선 아무도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때 처음으로 긴장을 풀고 펍만의 시끌벅적한 분위기와 흥이 나는 음악을 즐길 수 있었고, 분위기에 취해 사람들과 재밌게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 타인의 눈을 신경 쓰지 않게 되니 더 이상 술자리가 예전만큼 두렵지 않았다.
그렇게 한국에 돌아왔고, 이제는 애써 피하던 술자리에도 나가 자리를 지켰다. 여전히 소주는 마시지 않았지만 분위기상 맥주는 한 잔 받아놓았고, 한 모금씩 홀짝거리며 입담을 풀어놓았다. 그것이 나의 술자리 생존전략이었다.
재미있게도 사람들은 맥주 한 모금에 벌게진 내 얼굴과 신나서 리액션을 하고 있는 내 모습을 보며 어느새 내가 취한 줄 알고 알아서 술을 권하지 않았다. 술 마신 게 티가 나는 점은 이런 부분이 좋다.
난 이제 더 이상 술자리가 두렵지 않다. 아니,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술자리에서 남들의 시선이 두렵지 않다. 필요한 술자리는 나가는 편이며, 술을 마시지 않더라도 그 분위기에 취해 사람들과 어울리는 방법을 터득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도 사람인지라 아직까진 술을 마시지 못한다고 했을 때 상대방(특히 나이가 많으신 직장 상사)의 부정적인 태도와 발언은 꽤나 불편하게 다가온다.
아무리 편하게 있으라지만 신입의 입장에서는 선배나 상사가 주는 술을 거절하기 쉽지 않고, 짠을 한 뒤 술잔을 비우지 않는 것에 대해 눈치가 보이기 마련이다.
이제는 직장에서 강압적인 회식도 줄어들고 있는 추세이고, 시대가 변함에 따라 술을 억지로 강권하는 사회가 아니라고는 하지만 나의 짧은 경험상 아직은 좀 더 많은 시간과 이해가 필요할 것으로 생각된다.
사회생활에서 술이 필요하다는 것은 전적으로 동의한다. 초면의 어색한 관계를 풀어주는 역할을 하며, 어느 정도의 취기는 마음속에 숨겨 두었던 진심을 끌어올리는 수단이 됨은 나도 알고 있다.
다만, 술을 못 마시는 입장에서 술이 필수가 아닌 선택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주량은 마시면 늘어난다는 말로 술잔을 권하는 것이 아니라, 알쓰들을 위해 음료수를 따라주고 술 안마신다고 직장 상사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는, 그런 관대하고 여유로운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만약 나와 비슷한 체질의 독자분들이 계시다면 각자의 사회생활 팁 좀 공유해 주시길 부탁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