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퇴사일기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W옹알이 Nov 17. 2021

직장 내 가스라이팅에 대하여

[퇴사일기#16] 조선시대 양반들은 21세기에도 존재했습니다

 여러분은 '가스라이팅'에 대해 알고 계신가요? 요즘 사회문제로 종종 화두 되면서 뉴스에도 나오는 단어라 아마 한번쯤은 들어보셨으리라 생각합니다.

 가스라이팅이란 타인의 심리나 상황을 교묘하게 조작해 그 사람이 스스로를 의심하게 만듦으로써 타인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는 행위를 의미합니다. 우리 일상 속에 빈번하게 발생하고, 직장에서도 접할 수 있는 현상입니다.

 오늘은 직장에서 제 이름을 알리게 된 에피소드를 꺼내볼까 합니다. 참고로, 직장 내 소문은 대부분 좋지 않은 편입니다. 고로 제가 직장에서 이름을 알렸다는 것은 대차게 마음 고생했던 일이라고 해석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시작해보겠습니다.






 제가 입사하고 처음 연차를 받았을 때의 일입니다. 전(前) 직장은 연초에 1년치 연차를 제공하는 시스템이었습니다. 보통 연차는 회사에서 근속한 연수에 비례하는데, 저보다 늦게 입사한 분들의 연차 갯수가 제게 주어진 연차보다 많은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같은 해에 입사했지만 저보다 4~5개월 늦게 입사하신 분들이라 그들의 연차가 더 많은 것은 뭔가 잘못된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요즘은 대부분의 회사에서 연차비를 없애고 연차를 소진 시키려는 추세지만, 제가 속한 직장은 연차비를 제공했기 때문에 연차 갯수는 꽤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연차 1개당 10만원 꼴로 생각해도 몇 십만원을 손해볼 수 있는 상황입니다. 종종 시스템 상의 오류로 이런 문제가 있었기 때문에 저는 확인이 필요하다고 판단했습니다.

 우선 같은 팀의 선배와 상사에게 물어봤지만 그들은 저처럼 연차가 적지 않았고 남의 문제에 크게 관심이 없는 듯 했습니다. 수소문해봤지만 주변의 모두가 타당한 이유를 알지 못해서 고민하다가 관련 업무를 담당하는 팀에 문의를 남겼습니다.

 하지만 그 때는 몰랐습니다. 저의 작은 날개짓이 지구 반대편에서 커다란 폭풍을 일으킬 줄을.

 사유를 듣고보니 그 해의 5월부터 노동법이 개정되어, 5월 이전에 입사한 저는 연차를 적게 받고 5월 이후에 입사한 분들은 연차를 많이 받았던 것입니다.

 저와 같이 연차를 적게 받은 사람이 몇 명 있었는데 그들 중 아무도 그 부분에 대해 질문 하지 않았나 봅니다. 제 문의에 답변 해주시는 담당자 분의 목소리에는 짜증이 어려있었습니다.

 대답을 듣고는 혹시 회사 차원에서 배려해주거나 개선해줄 수 있는게 없냐고 물었습니다. 본인의 몫은 본인이 챙기는게 맞고, 혹시나 안내해주지 않았지만 어떤 방법이 있는지 확인 차 여쭸던 겁니다. 담당자는 있는 힘껏 짜증을 실어 '없다'고 대답 했습니다. 그 단호함에 저는 불이익을 수긍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 일이 있고 얼마 지나지 않아 팀장님의 전화기가 울렸습니다. 어마무시한 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들려왔습니다. 사무실이 좁은 편이라 전화 상대가 목소리를 크게 내면 전화 너머로 소리가 들리는데, 팀장님의 수화기로 전해진 그것은 다름 아닌 쌍욕이었습니다.






 사건의 전말은 이러했습니다. 제가 연차와 관련하여 확인을 요청한 그 담당자가 자신의 가장 상위 관리자에게 이 일을 보고했나 봅니다. 그 보고를 듣고 관리자가 저희 팀장님에게 전화해서 쌍욕을 투척한 겁니다.

 제 팀장님은 그 관리자보다 직급이 낮았고, 한낱 말단 사원이 연차와 관련된 문의를 직접 하는 바람에 팀장님이 욕을 먹은 것입니다. 쌍욕과 더불어 팀장님은 '직원 관리를 어떻게 하길래 사원 따위가 전화를 해서 싸가지 없게 따지고 드냐'는 욕을 먹었습니다

 팀장님께서는 곧장 저를 불러 면담에 들어갔습니다. 상황을 설명했습니다. 팀장님은, 궁금한 게 잘못된 건 아니지만 회사는 조용히 다니는 것이 좋다고 조언해주셨습니다.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는 제 머리는 멍해지는 것을 선택했고, 곧 엄청난 괴리감이 몰려왔습니다.

 순간 조선시대로 타임워프한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천것들이 글을 배우면 기어올라서 안 된다는 양반 세력과 같은 그들의 태도. 제 권리를 제가 챙기는 게 잘못된 일인가요.

 아무도 설명해주지 않는 문제를 담당 팀에 문의해서 확실한 답을 얻은 게 무슨 잘못이지? 회사를 조용히 다니는 것이 좋다는 말은 아예 질문을 하지 말았어야 했다는 건가? 그런 문의도 해결해주지 않으면 그 팀은 왜 존재하는거지? 내가 사원이라서 일이 더 커진 것 같은데 사원은 질문을 할 수 있는 자격도 없는건가?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지만 저 때문에 쌍욕을 먹은 팀장님이 바로 맞은 편에 앉아 있어서 조용히 상황을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 아니, 쌍욕을 할거면 저한테 하지 왜 저희 팀장님한테 전화를 했을까요.

 저는 이 '연차 사건'으로 공장에 이름을 날렸습니다. 근로자가 자신에게 주어지는 연차에 대해 알 권리 조차 무시하는 이 회사 시스템과 '쌍욕'이 허용되는 직급 체계에 분노가 차올랐습니다. 하지만 혼자 삭히는 수 밖에 없었습니다. 저는 '한낱 사원'이었으니까요.

 웃긴 것은, 제가 문의한 부분에 대해 궁금했던 사람들이 우르르 저한테 몰려들었다는 것입니다. 즉, 다들 궁금은 한데 아무도 질문 하지 않았던 겁니다.

 생각해보면 저는 이곳이 첫 직장이 아니어서 그런 행동을 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첫 직장에서는 연차나 복지 관련 질문에 대하여 성심성의껏 답변을 해주는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제게는 당연한 일이, 이곳에서는 당연하지 않은 일이 되어 저 혼자 동떨어진 것이지요.

 그 때까지만 해도 저는 근로자로서 제가 한 행동이 타당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일이 몇년 후 제 진급 문제에까지 영향을 미치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한 채로 말입니다.





 그 날개짓은 약 3년 후 거대한 폭풍이 되어 저를 덮쳤습니다. 진급자 대상 명단에 제가 있었는데, 그 때 그 관리자가 3년 전 그 '연차 사건'을 들먹이며 저를 진급 시키지 않으려고 했다는 겁니다.

 그 관리자는 인사권에서 파워가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저는 3년 전의 일로 상사, 상사의 상사, 상사의 상사의 상사에게까지 가서 그 일에 대해 설명해야 했습니다. 더 높은 직위의 사람을 만날 때마다 점점 주눅이 들었습니다. 그리고는 결국 '내가 잘못한 거였나?'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스스로를 의심하는 결말에 도달한 겁니다.

 상사의 상사의 상사에게까지 제 상황을 열심히 설명하면서 결국 진급을 하긴 했습니다. 다만 그 과정에서 자존감에 굉장한 타격을 입었습니다. 3년 전 그 일에 대해 제가 잘못했다고 빌어야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저 때문에 욕먹은 팀장님을 생각해서 조용히 수긍했던 것과는 달랐습니다. '하고 싶은 말 다 할거면 회사에 나오면 안 되지'라고 말하는 윗분에게, 저는 한 마디 반발도 할 수 없었습니다. 결국 그들의 입놀림으로 제가 진급을 한 것은 사실이었으니까요.

 제 상사도 그랬습니다. 니가 잘못한 건 아니지만 그냥 숙이라고. 그 일이 있고서 저는 회사 생활에서 뭐든 수긍하게 됐습니다. 결국 모두가 그렇게 됐습니다. 마음 속에 무언가 무너졌습니다.







"누나, 그거 가스라이팅이야."

 얼마 전 동생과 만나서 직장에 대한 얘기를 하다가 그 사건이 나왔는데 동생의 대답이 그랬습니다. 사실 회사에 있을 때만 해도 주위 사람들이 그 사건에 대해 '조심 좀 하지 그랬냐'는 반응을 가장 많이 보였습니다.

 제가 잘못한 줄 알았고 입을 닫았습니다. 심지어 제 이름이 조금 특이해서 사람들 입에 더 오르내리나 싶은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제 이름까지 잘못이라 생각했습니다.

 동생과의 대화를 되짚으며 이 글을 다시 쓰면서 그 때의 일을 떠올려보니 제가 당한게 '가스라이팅'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퇴사를 했다는 것은 그 집단에서 벗어났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안타깝게도 그 집단에서 벗어나고서야 알게 된 겁니다.






타인의 심리나 상황을 교묘하게 조작해 그 사람이 스스로를 의심하게 만듦으로써 타인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는 행위

 다시 한 번 가스라이팅의 개념을 곱씹어봅니다. 그 관리자는 제 상사에게 쌍욕을 먹이고 그 일로 공장 내 소문이 퍼지면서 제 위치가 불리해지는 것을 통해 제 스스로가 '잘못했나?'라는 의심을 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인사권과 관련된 문제에서 불이익을 주겠다는 위협으로 순응하게 만들었습니다. 결국 지배력을 강화한 겁니다.

 어떻게 보면 아예 차단하는 겁니다. 그런 궁금증이나 생각을 하는 사람들을 매장 시켜 질문이 불가능한 분위기를 만드는 겁니다. 글을 모르는 백성들이 글을 배워서 똑똑해질까봐 두려워하던 조선시대 양반들은 21세기에도 존재했습니다.

 이 회사에서는 일하는 근로자가 자신의 이권이나 권리에 대해 묻는 것 자체가 불경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니 한낱 사원 따위가 궁금한 것을 묻고 회사 차원에서 해줄 수 있는 일이 없냐고 문의한 것 자체가 대역죄였던 겁니다.

 마음에 들지 않았겠지요. 그러니 뚜렷한 증거는 없으면서 '태도'를 운운하며 소문을 와전 시켰습니다. 회사에서의 전화 내용을 모두 녹음하지 않아서 증명할 방법이 없지만 저는 단연코 대들거나 따지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 거슬렸던 것은 제가 '따진 것'이 아니라 '의문을 가진 것'일테지요.

 만약 제가 과장 정도의 직위였다면 그 담당자가 그렇게 행동했을까요?

 직급이나 나이, 또는 회사에 들어온 연차를 따져서라도 저를 아랫 사람 취급하는 것 또한 넓은 의미에서의 갑질입니다. 회사는 근로자에게 근로자가 가지는 이득이나 권리에 대해 대답할 의무가 있습니다. 단순히 '을'이니까 숙이고 무조건 수긍하라는 것은 엄연한 갑질에 불과합니다.

 그들(혹은 그들의 체계에 순응한 사람들)은 자신들의 성이 무너지지 않을 것이라 확신합니다. 하지만 낡고 망가진 부분을 계속해서 보수해 나가는 성이 오래도록 유지됩니다.

 현재의 흐름을 읽고, 세상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들에 대해 고민하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부서진 곳을 발견하고 고쳐야 한다는 외침을 막는 게 능사는 아닙니다. 결국 그런 성은 무너지게 됩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만원 어치의 인격 모독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