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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퇴사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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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옹알이 Nov 09. 2021

만원 어치의 인격 모독

[퇴사일기#15] 어느 회사의 면접 후기

"다음부턴 거기 서있지 말고 저기서 타세요"

단말기에 카드를 찍는데 버스 기사 아저씨가 퉁명스럽게 말을 내뱉었습니다. 기분이 상했습니다.


 버스 정류장 표지판 바로 아래 서있었는데, 이 동네에는 그 버스가 정차하는 곳이 표지판으로부터 약 10미터 떨어진 곳이라는 무언의 약속이 있었나 봅니다. 처음 그 동네를 방문한 이방인은 그런 룰을 몰랐습니다.


 다신 이 버스를 안 탈 것 같아서 그냥 참고 넘어갔습니다. 2차 면접을 보러 오라고 해도 이 동네는 다시 오지 않을 생각입니다.





 면접을 봤습니다. 20분 일찍 도착하게 와달라더니, 대기실에서 면접관에게 갑자기 사정이 생겨 늦을 거라는 안내를 받았습니다. 결국 약속된 3시를 넘어 면접을 시작 했습니다.


 양해를 부탁한다는데 제게 양해를 거절할 선택권이 있었나 싶습니다. 제가 10분 늦게 왔더라도 이 회사는 저를 양해해줬을까요? 갑과 을의 관계에서 갑은 잘못을 해도 보상하지 않습니다. 다만 을에게 회사 이미지가 썩 좋지 않아 졌을 뿐입니다.


 저는 약속 시간을 지키기 위해 택시를 탔습니다. 이 동네는 버스 배차 간격이 한 시간에 한 대여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습니다. 택시비는 10600원 나왔습니다.


 백수 신분이라 돈을 아껴 쓰는 요즘, 저는 1500원짜리 아메리카노만 마십니다. 7배에 해당하는 비용을 지불하고 면접을 보러 간 것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인원으로 회사가 돌아가요?"

"경력직인데 이 정도도 모르시나요?"

"전 직장에서 4년 넘게 계신 동안 뭘 하셨다는 건가요?"

"주요 업무는 AA, BB, CC인데 하나도 해보신 적이 없나 봐요."

"그럼 이 업무는 해봤다고 지원서에 쓰시면 안 되죠."


 그동안 꽤 여러 번 면접을 봤지만 이렇게 기분이 상했던 면접은 처음이었습니다. 준비가 부족하여 면접을 망친 후 드는 아쉬움과는 명백히 달랐습니다.


 압박 면접이라기보다 인격 모독에 가까운 무시였습니다. 본인이 원하는 인재가 있었나 본데 제가 그 수준에 미치지 못해서 화풀이하는 느낌이었습니다. 심지어 제가 1순위로 지원한 업무 말고 2순위의 지원 업무에 대해서만 질문을 늘어놓는 것도 기분이 나빴습니다.


 제가 지원한 직무는 업무 특성상 회사마다 업무의 경계가 다를 수 있습니다. 또한 회사마다 진급 체계가 다르기 때문에 여기선 사원에 해당하는 일을 하는 경력이지만, 다른 곳에서는 대리급의 업무를 해야 하는 경력일 수도 있습니다.


 저기요, 면접관님. 전(前) 직장을 무시하는 건 상관없지만 저를 무시하는 건 못 참겠습니다만···.


 면접 막바지에는 거의 싸웠던 것 같습니다. 할 말은 해야 하는 타입이라 면접관이 하는 베베 꼬인 질문에 최대한 불편한 티를 드려냈습니다. 저는 면접을 보면서 확신했습니다. '이 회사는 2차 면접을 보러 오라고 해도 오지 않을 것이다'라고요.






 면접을 보고 나오는데 인사팀 직원이 제게 문자로 설문조사를 보냈으니 응해달라고 했습니다. 면접 후 너무 지쳐서 "집에 가면서 천천히 보고 하겠습니다."라고 대답했는데, 직원이 죄송해하며 그 자리에서 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을은 지쳤지만 갑의 요구에 응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직원, 당신도 을이죠. 당신이 무슨 죄가 있어서 저한테 죄송하겠습니까.


 설문 조사지에는 '면접관의 태도는 적절했습니까?'라는 질문이 있었고 저는 '아니오'에 체크한 다음 사유를 썼습니다.


[전(前) 직장의 진급 체계를 설명했음에도 불구하고 당사의 운영 체계로 평가하여 수준을 무시하는 듯한 어조와 태도를 취함.]


 힘든 와중에 설문 조사지에 분노를 싸지르다가 어차피 2차 면접의 제안이 와도 거절할 회사인데 뭐하러 피드백을 주나 싶었습니다. 길게 쓴 사유를 주르륵 지우면서 '예'에 체크하고 제출했습니다.


 인사팀 직원은 면접비로 만원을 주었습니다. 택시비 10600원도 안 되는 돈. 면접비가 든 봉투를 보며, 과연 내가 당한 것이 만원 어치의 인격 모독이 맞았나 곰곰이 생각했습니다.


 어느 앱에서 이 회사를 검색했을 때 5점 만점에 1.8점이 나온 것을 보고 면접을 보러 갈지 말지 고민하다가 보러 가겠다고 선택한 스스로에게 화가 났습니다. 그 통계가 그냥 나온 게 아닐 텐데. 아무리 봐도 오늘 면접은 수확이 없는 듯합니다.






 면접관이 착각하는 것 중에 하나가 면접관과 지원자가 상하 관계에 있다고 생각하는 부분인 것 같습니다.

지원자는 면접을 보러 온 것이지 면접관에게 무시 당하려고 그 자리에 간 것이 아닙니다. 면접관은 아직 제 상사가 아니고, 처음 보는 사람을 업신여기는 것은 분명 무례한 일입니다. 면접 자리는 지원자도 회사를 평가하는 자리입니다. 일방적인 평가가 아니라는 겁니다.


 아마 본인이 회사에서 가진 지위와 권력을 면접 자리에까지 적용했나 본데, 막말로 회사 밖에서 제가 이 분을 만났다면 그저 '지나가는 행인 1'에 불과합니다. 제게 적용되지 않는 지위와 권력에 취해 던지는 질문이 하나같이 신중하지 않았다는 것이 굉장히 불쾌했습니다.


 그리고 지위와 권력이 있더라도 질문에 개인의 감정을 담는 것은 프로답지 못한 행동입니다. 그분의 인성적 문제로 제가 면접 자리에서 불편함을 느꼈을 수 있지만 그건 회사의 책임이기도 합니다. 그런 사람을 회사의 간판으로 지원자 앞에 내보낸 책임 말입니다.  


 제가 오늘 느낀 실망과 불편함은 만원을 훨씬 뛰어넘었고, 제가 들인 노력(면접 준비, 면접 보러 가는 것)과 시간(왕복만 5시간)은 아침 이슬처럼 흔적도 없이 증발했습니다. 홈페이지를 보고 가졌던 회사에 대한 기대감 또한 함께 사라졌습니다.


 원래 면접을 보고 후기를 잘 남기지 않는 편인데 이번 면접을 보고는 반드시 후기를 남겨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저처럼 헛걸음 하는 지원자가 생기지 않았으면 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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