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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퇴사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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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옹알이 Nov 04. 2021

너 잘 되라고 해주는 얘긴데

[퇴사일기#14] 사회생활에서의 소문과 하얀 거짓말

 엄마와 연락할 일이 있었습니다. 엄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으셨는데 제 발을 저려 '저는 자소서 쓰고 있어요'라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백수는 괜히 주눅이 드는 편입니다.

 사실 공모전에 내보낼 글을 쓰고 있었습니다. 주제가 오래 전 가족과의 추억에 대한 것이라 몇 가지 여쭈어볼 것이 있어 연락하게 된 것입니다. 자소서 쓰다가 너무 지루해서 공모전에 글이나 한번 내보려고요. 어설픈 딸의 거짓말을 엄마는 눈치채셨을까요?

 어렸을 때 거짓말을 나쁜 것이라고 배웠습니다. 특히 부모님이 그 부분에서 굉장히 엄격하셨기 때문에 지금도 거짓말에 서툰 편입니다.

 그런 제가 사회생활을 이유로 회사에서 이런저런 거짓말을 꽤 했던 것 같습니다. 하얀 거짓말이었다고 스스로를 다독였지만 가슴이 따꼼따꼼한 것은 어쩔 수 없었습니다. 오늘은 회사에서 했던 하얀 거짓말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볼까 합니다.





1. '연차'라는 이름의 간섭

 회사에서 했던 거짓말 중 가장 많은 부분이 '연차'와 관련됐습니다. 사유 없이 연차를 쓸 때면 이것저것 캐물어서 정말 괴로웠습니다.

 가끔은 그냥 쉬려고 연차를 쓰는 경우도 있었는데 거기서 솔직했다가 이런저런 추문에 시달리곤 했습니다. 그래서 '병원 방문'이라던가 '은행 업무'라는 사유로 대충 거짓말을 하고 연차를 썼습니다.

 가장 가관이었던 것은 윗사람들의 얼토당토 않는 의심이었습니다. 화요일~목요일에 연차를 쓰면 다른 회사에 면접 보러 가는 것이 아니냐고 의심했습니다.

 그런 얘기를 들을 때마다 저는 그들의 넘치는 에너지에 놀라곤 했습니다. 어떻게 다른 사람이 연차 쓰는 것까지 신경을 쓸 에너지가 있지···? 분명 업무 쳐내는 것만으로도 벅찬데 말입니다.

 더욱 최악은 연차와 관련된 내용을 팀장님들끼리 얘기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언젠가 다른 팀에 결재를 받으러 갔었는데 그 팀 팀장님이 제가 대출받은 것까지 알고 있었습니다. 기분이 썩 좋지는 않더라고요.

 연차는 자유롭게 쓰는 거라고 배웠는데 실제 회사생활에서는 간섭의 종류 중 하나일 뿐이었습니다.

2. 집에서 쉬었습니다. ​

 또 다른 거짓말로는 주말에 뭐했냐는 질문에 대부분 '집에서 쉬었습니다'라고 대답했던 것입니다.

 아무것도 모르던 사회초년생 때는 그런 질문을 들었을 때 미주알고주알 정성껏 대답했습니다. 남자친구랑 어딜 가봤는데 좋더라고요, 대리님도 꼭 가보세요!라고.

 아마 많은 분들이 공감할 텐데, 사실 회사 사람들과 나눌만한 이야깃거리를 찾는 일이 꽤나 번거롭습니다. 게다가 그들과는 보이지 않는 선을 긋고 지내야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데, 그런 연장선으로 서로 표면적인 이야기만 하는 경우가 많았던 겁니다.

 그 주제 중 하나가 '주말에 뭐했니?'였고, 순진한 저는 쓸데없이 진심으로 대답한 겁니다. 하지만 사회생활 짬밥을 먹을수록 그게 독이 된다는 걸 경험하고 서서히 입을 닫았습니다.

 제가 피곤한 내색을 보이면 주말에 그렇게 돌아다니니까 피곤한 거 아니냐며, 컨디션 조절까지 하는 게 사회생활이라 하시더군요.

 대답했다가 흠만 잡히느니 그냥 집에서 쉬었다고 하는 게 편합니다. 거짓말로 부릴 수 있는 처세술인 것 같습니다.

3. 친분을 숨겨라!​

 회사가 보수적인 편이었는데 유독 성별을 두고 말이 많았습니다. 즉, 동성끼리 친한 건 당연하고(안 친하면 이상한 거) 이성과 친하게 지내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친하게 지내려고 한 행동이 스캔들로 바뀌는 마법!

 그러면서 또 동성끼리 너무 친하게 지내면 뒷말이 나왔습니다. 진짜 이상한 분위기가 있었습니다.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할지 모르겠더라고요.

 회사에서 처음 생긴 후배는 저와 동갑인 남자애였습니다. 잘 지내다가 그 친구와 말을 놓았는데 상사의 눈초리를 받았습니다.

 저는 같은 사원끼리 무슨 존댓말이냐고 말을 편하게 하라고 했는데 오히려 후배님이 따가운 시선을 받게 된 일이었습니다.

 결국 윗분들 앞에서는 서로 존대하고 뒤에서는 반말을 했습니다. 사회생활의 위계질서가 제게는 맞지 않는 편이었고 차라리 거짓말을 하는 게 편했습니다.

 그리고 회사 사람을 회사 밖에서 만날 때면 꼭 비밀로 만나야 했습니다. 회사에 친한 언니가 있었는데 나이대와 상황이 비슷해서 대화가 잘 통하는 선배였습니다.

 종종 저녁도 먹고 술도 마시면서 지냈는데 둘이 만날 때면 꼭 회사 사람들을 피해서 만나야 했습니다. 만났던 사실도 비밀로 해야 했습니다.

 다른 상사가 알았다가는 질투할 수도 있고, 너무 친하게 지내는 모습을 윗분들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상사 빼고 톡방을 만드는 것과 비슷한 기분으로 지냈습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회사 분위기는 따르되 제 생각을 바꾸고 싶지 않을 때 선택한 것이 '거짓말'이었습니다. 회사생활뿐만 아니라 모든 집단생활에서 해당되는 얘기겠지만, 특히 사회생활에서 이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소문'의 이유가 컸습니다.

 회사에 다니면서 일하는 것보다 소문에 신경 쓰느라 피곤했던 적이 훨씬 많았습니다. 특히 '너 잘 되라고 해주는 얘긴데...'로 시작하는 소문을 전해 들은 날이면 멘탈이 와장창 부서져서 정말 힘들었습니다.

 발이 없는데 어쩜 그리 빠르게 퍼지는 걸까요. 제가 정말로 걱정됐다면 그 소문을 저한테 전해줄 게 아니라 전해 들은 그 자리에서 바로 반박해주는 것이 훨씬 도움이 되었을 텐데 말이죠.

 아마 그 소문이 빠르게 퍼지는 데는 저 잘되라고 제게 말을 전한 그 상사의 역할도 컸을 겁니다. 과연 저한테만 전했을까요? 결국 저를 위한 게 아닙니다. 소문을 그냥 재미로 퍼뜨리는 사람들은 그게 잘못인 줄도 모릅니다.

 그렇게 받은 스트레스를 사람들은 다양하게 해소할 겁니다. 저는 술을 마셨습니다. 그래서인지 퇴사하고부터는 술을 잘 안 마십니다.






 누군가는 끊어내야 하는 불필요한 일이 답습되는 것을 사회생활 내내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모두가 괴로워하면서 정작 고쳐나갈 생각은 안 하는 것 같습니다

 아마 이 체계에 적응한 사람들만 살아남았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리고 체계를 더욱 견고하게 만드는 것이 '직장의 직급 체계'와 '위계질서'라고 생각합니다. 언제나 아랫사람은 평가의 대상이 되는 체계.

 그런 사회생활을 경험하며 잘못이 잘못이란 것도 모른 채(혹은 알아도 모르는 척하며) 반복되어 악습이 생기는 것, 그게 잘못된 사회 분위기가 아닐까요.

 직장의 직급 체계와 위계질서가 과도한 영향력을 발휘하여 '소문'과 같은 불편한 사회 분위기를 형성하는 것이 잘못된 일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하지만 아무도 반발하지 못합니다.

 진흙탕 속에 있는 사람은 이 물이 진흙탕인지 맑은 물인지 모릅니다. 다른 물에 있다가 새로 유입된 자들만이 그게 진흙탕임을 알지만, 오랜 시간 견고하게 다져진 체계에 정면으로 불만을 토로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입니다.

 서서히 체계에 적응하거나 거짓말로 적당히 지내는 것이 살 길이죠.

 저는 소문에 관심이 없는 편이었으나 주위에 유독 관심이 많은 분이 계셔서 자주 휩쓸렸습니다. 듣기 싫은 얘기를 들으면서도 반발하지 못했던 것은 미움받았다가 회사 생활이 꼬일까 봐 걱정했기 때문입니다.

 비겁했던 것도 사실입니다. 방관도 잘못이니까요.

 사회 분위기와 같은 문제는 당장에 고칠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말단 직원에 가깝던 제가 선택할 수 있었던 것이 '하얀 거짓말'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혹시나 제가 계속 진급하여 상급자가 된다면, 이 답습의 악순환을 끊어낼 용기가 있는 상사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다 큰 성인들이 다니는 회사인 만큼 조금 성숙한 문화를 기대할 수 있는 회사가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오늘도 그런 꿈을 가져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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