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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옹알이 Dec 07. 2021

퇴사 생각보다 별거 없지?

[퇴사일기#18] 끈질기게 살아나가는 것

 전(前)직장 동료를 만났습니다. 약속을 잡았는데 우연히 퇴사한 지 100일이 되는 날이었습니다.


 아이가 태어난 지 백일이 되는 날, 100일 동안 잘 자라준 것과 앞으로도 건강하게 잘 자라길 바라는 마음을 담아 백일잔치를 합니다. 게다가 예로부터 100이라는 숫자는 완전함과 성숙함을 상징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저도 '퇴사 백일잔치'를 즐기기로 했습니다. 마음 맞는 사람과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즐거운 대화를 나눌 생각입니다.


 100일이란 시간이 흘렀지만, 직장 동료로부터 들은 회사는 놀라우리만치 그대로였습니다. 강직하다고 해야 할까요, 고리타분하다고 해야 할까요. 그 한결같음이 무색하게 저는 직장을 떠난 후 많은 것이 바뀌었습니다.


 가장 큰 변화는 마음 가짐입니다. '무언가 하지 않는 두려움'을 극복하고 있습니다.


 직장을 나가면 세상이 무너질 줄 알았던 쫄보는 무사히 일상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100일 동안 무사했고, 앞으로도 무사하길 바라는 마음을 담아 기록을 남겨보겠습니다.





 저는 스스로가 대한민국 청년의 표본이라 생각했습니다. 초중고 12년, 대학교 진학 후 휴학 없이 4년을 다니고 스트레이트로 졸업, 그 후 곧바로 취업, 한 번의 이직 경험도 있습니다.


 이직할 때 대부분 2주~한달 가량 쉬는데 저는 3일만 쉬고(쉬는 동안 이사하고) 곧바로 새로운 직장으로 출근했습니다.


 해야 할 것이 계속 있는 인생이었지만, 직장 생활에 정착하면서 그 목표가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찾아온 공허함은 제게 물었습니다. 이런 직장을 얻어 하루하루 버티는 삶을 살기 위해 그동안 배우고 노력해온 거냐고.


 불행과 행복 사이에서 굳이 따지자면 불행한 결말이었습니다.


 사실 시간을 허투루 써본 적이 없었기에 더욱 이 결말을 받아들이기 힘들었습니다. 노력했지만 행복하지 않은 결말. 그렇게 살면 잘 사는 거라고들 하는데 저는 왜 황망했을까요. 우리 모두는 왜 그렇게 애써온 걸까요.  


 주위에서 보기엔 아무 문제가 없었지만, 제 내면은 매우 소란스러웠습니다. 타당한 이유가 없는 불행이라 더욱 힘들었습니다.


 어쩌면 저는 허황된 믿음으로 삶을 이끌어왔을지 모릅니다.


 무언가 계속하다 보면 행복해지리라는 맹목적인 믿음. 쉬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컸습니다. 그러니 멈추지 못하고 계속 달렸겠지요. 하지만 언젠가부터 제 마음 한 구석에 '제대로 가고 있는가'하는 의문의 싹이 돋았습니다.


 꾸준히 가지만 방향성을 잃은 채, 마냥 가기만 하는 것이 맞는지 의심하다가 문득 이대로 너무 멀리 가게 될까 봐 두려웠습니다.


 그런 두려움 속에서도 저 같은 겁쟁이는 미래의 대한민국 표준 청년이 살아가야 할 삶을 대차게 포기하지 못할 겁니다. 평범한 사람으로 살기 위해 짝을 찾고 가정을 이루고 2세를 계획하고 키워내고. 표준이 편한 사람은 앞으로도 표준에 머물기 위해 기를 쓸 것입니다.


 그래서 더더욱 지금이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대한민국 표준 청년의 삶을 잠시 던져두고 쉼표를 그릴 때였습니다.


 쉼표를 그렸다면 이제는 '무언가 하지 않는 두려움'은 마주해야 합니다. 정해진 경로대로 계속 무언가 해오던 삶의 루틴에서 벗어나는 겁니다.


 사실 '무언가 하지 않는 두려움'은 직면하는 것부터가 어려운 일입니다. 우리는 어려서부터 끊임없이 목표를 가지고 나아가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배워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스스로를 보면 잘못하고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생각보다 잘못한 게 아닌데도 말이죠.


 경험상 저는 그런 삶의 결말이 해피엔딩이 아니었습니다. 그 속에서 행복을 찾으셨다면 정말 축하드리지만, 그러지 못했다고 해서 실패는 아닐겁니다. 우리의 인생은 너무도 다양한 방향이 있기 때문에 누군가에게 해피엔딩이 누군가에겐 막다른 길일 수도 있습니다.






"퇴사 생각보다 별거 없지?"


 얼마 전 그런 얘기를 들었습니다. 잘 생각해보니 정말 별게 없었습니다.


 저는 퇴사를 하면 세상이 무너지는 줄 알았습니다. 인생의 패배자가 되어 모두가 저를 비난하고, 경제적으로 많이 버거워질까 두려웠습니다. 경력이 단절된 채 하루하루 시간을 보내며 무능하게 살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눈에 보이는 변화를 곰곰이 생각해보니 모든 것이 '나'를 위한 일이었을 뿐 위험한 일들이 아니었습니다. 마음의 여유가 생긴만큼 본인을 돌보는 데 에너지를 쓰는 것 같습니다.


 스스로 계획하고 행동하며 채운 하루가 주는 만족감이 좋습니다. 가끔 터무니없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 날이면 '그런 날도 있지'라며 쉬는 법을 배웁니다. 건강에 관심을 갖고 잘 사는 법을 모색합니다. 요즘은 진로 고민도 합니다. 나다운 삶을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간단하게 소개해보자면 이렇습니다.


- 매달 따박따박 찍히던 월급이 사라지고 용돈이 적어졌다.
- 하루 24시간 중에 운동으로 땀 흘리는 시간이 생겼다.
- 공모전에 내보낼 글에 조금 더 신경을 쓸 수 있다.
- 술을 줄였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이 좀 붙었다. (혈색이 좋아진 건 덤)
- 좋아하는 친구들을 조금 더 자주 만나고 조금 더 자주 편지를 쓴다.
- 집 앞에 택배가 쌓이지 않는다. (쓸데없는 쇼핑을 덜 한다.)
- 집안일에 더 적극적이고 짜증이 덜 난다.
- 동네에 단골 카페가 생겼고, 집 근처의 도서관을 이용한다.
- 계절의 변화를 빠르게 눈치챈다.
- 어떻게 늙어갈 것인지 고민한다.






 퇴사 전에 쓴 다이어리를 보니, 그때의 저는 굉장히 불안했나 봅니다. 수많은 고민의 흔적이 다이어리에 켜켜이 쌓여있었습니다.


 퇴사 후에 모든 일이 해결된 것은 아닙니다. 지금도 여전히 불안하고 고민하지만 그때만큼 불행하지 않습니다. 지난 100일을 돌아봤을 때 단연코 후회한 적은 없습니다.


 그걸 어떻게 확신 하나고요? 가끔 꿈에서 다시 회사에 입사하는데 저는 그때마다 매번 퇴사를 결심합니다. 한 번이 어려웠지 두 번은 쉬웠습니다. 퇴사가 생각보다 별거 없는 걸 알아서 오히려 더 쉽게 퇴사를 결심합니다.  


 그러니 현실에 치여 낭떠러지 끝에 간신히 서서 삶을 포기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시는 분들께, 조금만 용기를 내어 퇴사해보라고 감히 말씀드립니다. 결국 이 세상과 삶, 괴로운 감정까지도 내가 존재해야 생기는 거니까요.


 끊임없이 불안하고 고민하면서도 끈질기게 살아나가는 것, 그게 가장 중요한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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