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너를 사랑할 수 없는 10가지 이유>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1999년에 개봉된 하이틴 무비입니다. 장르는 로맨틱 코미디인데, 이 장르에선 꽤 유명한 작품입니다. 지금은 고인이 되어 불멸의 조커로 기억될 '히스 레저'가 남자주인공으로 나옵니다. 저는 이 영화를 개봉한 지 8, 9년쯤 흐른 뒤에 봤는데, 히스 레저를 영화 <브로크백 마운틴>으로 알고 있던 터라 참 반가웠지요.
이 영화의 원작은 셰익스피어 희곡입니다. <말괄량이 길들이기>는 셰익스피어의 희극 중에서도 인지도가 낮은 작품입니다. 제목에서 예상할 수 있듯이 "한 성격 하는 여자를 꼬셔보겠다고 내기를 걸었던 남자가 결국엔 진짜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입니다. 셰익스피어의 작품 중에서 유독 가볍게 흘러가는 작품인데, 사랑에 대한 셰익스피어의 가치관이 잘 들여다보이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셰익스피어의 사랑관(또는 연애관)은 그의 유명한 희곡 <한여름 밤의 꿈>에서 말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사랑이란 얼마나 우연성에 기초하는가'
그렇습니다. 사랑에 빠지는 것도, 그리고 사랑이 결실을 맺는 것도. 그 과정을 잘 들여다보면 필연성이 결여된 것처럼 보입니다.
그것을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렇게 자주 말합니다.
"연애는 타이밍이야"
우리의 경험을 돌이켜보면, 그 말엔 고개가 끄덕여지는 면이 있습니다. 그런데 말이죠.
한걸음 멈추어 생각해보면, 우연과 운명은 동전의 양면 아니던가요.
적어도 셰익스피어는 작품을 통해 그렇게 말하고 있는 듯합니다.
‘사랑이란 요정의 장난이나 친구와의 내기처럼 시덥지 않게 시작하기도 하지만, 우리가 사랑에서 가장 갈구하는 절대적인 운명론은 바로 그 시답지 않음, 그 하찮음 속에 있다’
ㅡ이것이 셰익스피어가 작품을 통해 말하는 연애관입니다.
셰익스피어는 설익은 사랑-예찬론자도 아니고, 사랑-회의주의자도 아닙니다. 그는 시답지 않음의 그 영원성을 긍정합니다. 인간의 사랑은 찰나의 백일몽과 같을지니, 그 사랑이라는 영원한 축제를, 삶이 계속되는 한, 즐기라고 말합니다.
영원성이란 단어가 어쩐지 거창한가요?
우리가 사랑에 빠지면, 그 감정에 거창한 운명론적 결론과 필연적 원인을 덧붙이기를 좋아합니다.
마치 그런 설명들이 자신의 감정을 가치 있게 만드는 것처럼 말이죠.
다시 영화 얘기로 돌아와서, <내가 너를 사랑할 수 없는 10가지 이유>에서 '말괄량이' 역할을 맡은 캣 스트랫포드는 성격이 까칠하다는 평을 듣는 고등학생으로 나옵니다. 이런 캐릭터성이 요즘 미디어의 여주인공으로는 특이해 보이지 않는데, 개봉 시기를 고려하면 그 당시의 로맨스 여주인공으로는 꽤 독보적이었습니다. 캣의 성격을 잘 알 수 있는 대사가 있는데요. 문학 시간에 미국의 대표적인 문학가로 잘 알려진 헤밍웨이에 대해 신랄하게 평가합니다. ‘난폭한 알콜중독자에 여성혐오자(abusive, alcoholic misogynist)’라고 말이지요. 유튜브에 이 장면이 해석과 함께 공유된 영상이 있어 덧붙입니다.
유튜브 영상을 보면, 수업 중에 불쑥 늦게 등장했다가, 단걸음에 뒤돌아 나가는 남학생이 있습니다. 그 역시 범상치 않은 성격의 패트릭입니다. 그 성격 탓에 패트릭은 까칠한 캣을 꼬시는 만만찮은 일에 적임자로 발탁됩니다. 로맨틱 코미디 영화의 결말은 누구나 알고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안심하고 우여곡절의 과정을 편안하게 즐길 수 있죠. 현실의 연애와는 다르게 말입니다.
현실의 연애는 어떠한가요?
누구는 말괄량이를 길들이고, 누구는 난봉꾼을 길들이는 데 성공할지 몰라도, 사랑은 길들일 수가 없죠.
사랑 그 자체를 길들이는 일에 그 누구도 성공해낸 적이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또다시 사랑에 걸려 넘어지고 마는 이유일 겁니다.
경험이 늘수록 사랑에 능숙해진다고 착각하기 쉬워요.
그런데 우리가 정말로 능숙해지는 건 사랑이 아니라 사랑아님입니다.
우리는 정말로 한없이 그리고 원없이 사랑할 때, 그 사랑이 얼마나 무참히 내 세계를 무너뜨릴 수 있는지 뼈아프게 배웠기 때문에, 이번엔 덜 아프고자 최선을 다해 사랑을 억누르고 컨트롤하려고 합니다. 그렇게 그것은 '사랑아님'에 가까워집니다.
사랑의 본성은 길들이지 않음입니다.
나는 그 본성에 고마워합니다. 나를 겸손하게 만들어주거든요.
나는 나를 겸손하게 만들어주는 것들을 사랑합니다. 그 고마운 사람들과 경험들….
그중에서도 사랑은 가장 훌륭한 선생님입니다.
사랑이 아니라면, 그것이 아니었다면,
나는 또 한 번 착각하고 말았을 테니까요.
내가 휘두를 수 있다고, 내가 컨트롤할 수 있다고,
내가 이렇게 똑똑하고 성숙해서, 내게서 넘쳐흐르는 사랑을 좌지우지할 수 있다고.
그것을 감히 억누를 수 있다고.
나는 자신했을 겁니다.
그런데 사랑은 말괄량이입니다.
절대 길들여지지 않는.
사랑은 돌부리입니다. 나는 걸려 넘어지는데, 돌부리가 거기 있는 데는 아무런 이유가 없습니다.
내가 너를 사랑하는 이유, 그게 꼭 필요하다면 한 권의 논문으로 완성할 수도 있겠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정말 솔직히는, 그 이유들은 모두 지어낸 겁니다. 모두 만들어낸 이야기에요. 왜냐하면 어떤 설명을 붙여도 그 이유로 합당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너를 사랑하는 이유는 바람이 동쪽에서 불기 때문이고,
내가 너를 사랑하는 이유는 겨울이 가고 봄이 오기 때문이고,
내가 너를 사랑하는 이유는 전날 친절했던 네가 이튿날 퉁명스럽기 때문인데,
사실은 그 모든 이유에 아무런 의미도 없습니다.
밀란 쿤데라의 멋진 책 제목 <무의미의 축제>처럼 사랑은, 정말이지 무의미한 빛의 향연입니다.
셰익스피어가 얘기하는 것처럼 우연성이 빚어내는 도깨비 장난일지 몰라도
나는 그 사랑을 환영하고, 그것이 가져다줄 아픔까지 환영합니다.
오직 의미가 없을 때만 그것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잖아요.
우리는 사랑 뒤에 숨겨진 의미나 이유를 찾으려고 머리를 싸매거나 책을 뒤적거릴 필요가 없습니다.
숨겨진 건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우리가 의미와 이유를 만 가지라도 창조할 수 있으니까요.
내가 널 사랑하는 1만 가지 이유는 그렇게 탄생합니다.
오늘 나는 그 이유를 설명하는 해설자입니다. 겸손한 마음은 미소를 짓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