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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졸쪼 Nov 05. 2024

108호 할아버지 1

야, 세상에 귀신이 어딨냐. 무슨 오밤중에 폐가에 가재? 난 안 가. 아니, 멀잖아. 앉아. 그냥 앉자니까?


아! 야, 나 무서운 얘기 하나 있어. 여기 고구마깡 보니까 딱 생각나네. 귀신 얘기는 아니고. 그렇게까지는 안 무서울지도 모르는데, 나 어렸을 때 복도식 아파트 1층에서 살았거든. 초 3 때였나? 내가 그때는 진짜 지랄맞아서 만날 집에서 축구 하고, 블록 최대한 높이 쌓았다가 차서 무너뜨리고, 책장 타고 올라갔다가 점프하고…… 온종일 쿵쾅거리니까 아래층에서 하루에 두 번씩 올라왔거든. 그래서 엄마가 이렇게는 못 산다고, 얘 철들 때까지만이라도 1층에서 살자고 해서 다른 아파트로 이사를 갔어.


우리 집은 102호였는데 이사 가고 일주일도 안 돼서 아빠랑 엄마가 엄청 후회했어. 107호 사는 아저씨가 진짜 이상했거든. 병인지 뭔지 모르겠는데 남의 집 베란다 앞에 바짝 붙어 서서 집 안이랑 사람들 구경하고, 사람들 출근 시간 외워서 문 앞에서 기다리다가 문 열리면 안에 들어가려고 하고누가 쓰레기봉투 버리면 그 안에 있는 거 다 꺼내서 구경해. 그러면서 큰 소리로 웃어. 이런 일들이 수시로 일어나니까 엄마 아빠도 여기서는 못 살겠다 한 거야. 그래서 다시 이사를 가려고 했는데 그새 집값이 엄청 올랐네?


그나마 다행인 건 이 아저씨가 애는 안 건드려. 이제 생각하면 그냥 사람 취급을 안 한 것 같아. 나 그 아저씨 너무 무서워서 마주칠 때마다 진짜 열심히 인사했거든? 그거 알지? 알아서 기면 안 건드릴까 해서 공손하게 행동하는 거. 근데 애들이 인사해도 안 받아. 눈 마주쳐도 무시해. 아예 없는 사람인 것처럼 행동해. 그래서 엄마 아빠는 집 안에 커튼 다 치고, 출근할 때면 걸쇠 안 푼 상태에서 문 열었다가 아무도 없으면 나가고 그랬어. 괜찮은 집 나오면 바로 이사 갈 테니까 잠깐만 버티기로 하고 말이야.


1층 다른 집에는 누가 살았는지 기억이 안 나. 딱 한 집, 108호에 할아버지가 혼자 살았던 것만 기억해. 그 아파트에 살았던 사람들은 ‘108호 할아버지’ 하면 아직도 기억할 거야. 107호 아저씨가 난동을 부리면 항상 108호 할아버지가 나타나서 말렸거든. 이상하게 107호 아저씨는 경찰이든 누구든 중간에 누가 껴들면 더 난리를 쳤는데 108호 할아버지 말은 잘 듣는 것 같았어. 그러다 보니까 아파트 사람들도 무슨 일 생기면 경찰 안 부르고 108호 문부터 두드린 모양이야. 경찰들이 출동해도 ‘심각한’ 피해를 입은 게 없으니까 그냥 흐지부지되기도 했고. 우리 엄마 아빠도 108호 할아버지한테 의지를 많이 했어. 가끔 과일 같은 거 가져다 드리기도 하고, 저녁 먹을 때 할아버지를 칭찬하던 게 아직도 기억이 나. 진짜 대단하시다고, 107호 아저씨 안 무서워하고 저렇게 대쪽같이 행동하는 분 흔치 않다면서.


나도 그 할아버지 좋아했지. 학원에서 집에 오거나 친구들하고 놀다가 집에 돌아오면 107호 아저씨가 근처에 있을 때가 있었거든. 무서워서 집에 못 들어가고 있으면 산책하고 돌아오던 할아버지가 나를 문 앞까지 데려다주곤 했어. 놀이터 같은 데서 놀다가 107호 아저씨가 갑자기 나를 공격하면 어쩌나 겁날 때도 있었는데 그땐 108호가 코앞이고 할아버지는 항상 있으니까, 소리치면 나와주겠거니 생각도 했지.


그해 여름이었어. 근처 공원에서 친구들이랑 축구를 하는데 갑자기 비가 쏟아지더라고. 소나기인 줄 알고 나무 밑에서 비가 그치기를 기다리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비가 안 멎는 거야. 그래서 오늘은 그만 놀자 하고 각자 집으로 뛰어갔지. 축구공 내 거여서 품에 딱 안고.


집 앞에 도착해서 비번을 누르려고 하는데 초 3이면 팔이 별로 안 길잖아. 옆구리에 축구공을 딱 끼고 도어락 뚜껑을 여는데 빗물 때문에 미끄러워서 축구공을 떨군 거야. 중앙 현관까지 가서야 공을 주웠는데 일어나 보니까 현관 밖에 그 아저씨, 107호 아저씨가 서 있더라? 한참 서 있었나 봐. 베이지색 바지를 입고 있었는데 그 바지가 완전히 젖어 있었어. 비가 엄청 쏟아져서 내가 달려오는 소리는 못 들었겠지.


나 그때 진짜 무서웠거든. 생각을 해봐. 평소에도 오락가락 하는 사람이 밖에서 억수같이 쏟아지는 비를 맞고 있어. 밖에 오가는 사람도 거의 없고. 저 아저씨가 애는 안 건드린다는 걸 알고 있어도 오늘은 무슨 일을 당할 것 같은 거야. 빨리 집에 들어가야겠다 해서 뒤돌아 살금살금 걸었는데 갑자기 현관 밖에서 “악!” 소리가 들리더라. 현관 밖을 빼꼼 봤더니 107호 아저씨가 어떤 남자랑 화단에서 뒹굴고 있었어. 20대 초반쯤? 그 남자가 계속 소리를 지르니까 아저씨가 화단에 있는 흙을 입에 막 넣는 거야. 그리고 자세히 보니까 그 아저씨, 그 남자의 눈을 주먹으로 짓이기고 있었어. 같은 곳을 몇 번이나. 마치 눈을 완전히 으깨려는 것처럼. 남자가 그 아저씨를 밀어내려고 주먹이랑 발을 막 휘둘렀는데 그 아저씨, 남자를 깔고 앉아서 절대 안 놔주더라.


막상 그런 사건을 눈앞에서 보잖아? 머릿속에서는 ‘빨리 집에 가서 112에 신고해야지’ 뭐 이런 생각이 든다? 그런데 그 와중에 또 무슨 생각이 드는지 알아? ‘내가 어른을 부르러 간 사이에 저 사람이 죽으면 어떡하지?’, ‘112에 신고하는 중에 아저씨가 저 사람을 어디로 데려가면 어떡하지?’ 뭐 이러면서 내가 여기에 있어야 할 것 같다는 생각도 들더라니까? 진짜 이상하지? 그리고 어차피 몸이 아예 안 움직여. 단순히 다리가 후들거리는 정도가 아니라 혼이 완전히 나갔다고 해야 하나? 껍데기만 남아서 팔다리를 움직일 생각을 아예 못 해. 몇 걸음만 가면 우리 집이었는데 말이야.


근데 그때 108호 할아버지가 나타났어. 아마 산책을 나갔다가 비가 와서 돌아왔나 보지? 비 때문에 할아버지가 종종걸음으로 달려오고 있었는데 마음이 확 놓이더라. 아, 이제 저 사람은 살았다. 저 할아버지가 107호 아저씨도 말리고 경찰에 신고도 하겠구나. 그리고 그때까지는 108호 할아버지 무용담만 들었지 싸움을 말리는 걸 본 적은 없거든. 그래서 저 할아버지가 어떻게 하는지도 좀 궁금했는데, 할아버지가 어떻게 했는지 알아? 왜, 비 올 때 우산 없으면 비 덜 맞으려고 두 손을 머리 위에 얹잖아. 그 자세로 뛰어오다가 107호 아저씨를 발견하더니 갑자기 속도를 늦춰서 어슬렁어슬렁 걸어오는 거야. 여유롭게, 주위를 두리번거리면서, 두 손을 여전히 머리에 얹은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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