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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위 Jan 24. 2023

귀성길, 편두통의 그림자

결혼 이후엔 해매다 명절이 되면 시댁인 대전에 갔다가 친정인 부산에 가는 코스로 국토를 가볍게(?) 돌고 오곤 했다. 코로나로 2년 동안 명절에 찾아 뵙지 못하다가 올해 다시 명절 국토대장정을 재개했다. 


나의 편두통은, 잠을 잘 자지 못하면 굉장히 높은 확률로 나타난다. 대전에는 할아버님이 계신데, 연세가 아주 많으시고 귀가 잘 들리지 않으신다. 할아버님은 늘 TV를 켜놓고 생활하시는데 여기서 '늘'에는 밤도 포함되기 때문에 대전에 가면 밤에는 아주 큰 TV 소리 때문에 잠을 제대로 자기가 어렵다. 그래서 다음 날 편두통이 오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올해는 남편과 첫째 아이가 차로 먼저 대전으로 출발하고 나와 둘째는 설날 아침에 기차를 타고 대전으로 가기로 했다. 


둘째는 네 가족이 함께 있을 때는 아빠 바라기이지만 나와 둘이 있을 때는 또 나에게 찰싹 붙어 있는다. 남자들이 대전으로 출발한 후 우리는 여유 있는 저녁을 보냈다. 둘이 밥도 먹고 종이 블럭과 레고의 조합으로 인형놀이도 했다. 남자들이 없는 틈을 타서 오랜만에 집 정리도 좀 하고 아침 일찍 역으로 가야하니 이른 시간에 잠자리에 들 계획이었다. 그런데 열심히 청소기를 밀다가 갑자기 전조 증상이 왔다. 전조 증상은 아무런 예고 없이 갑자기 나타나기 때문에 언제나 한결같이 놀랍고 무섭다. 청소기를 내려놓고 조용히 약을 먹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약이 잘 듣지 않았다. 아이를 재우려면 목욕도 시켜야 하고 책도 읽어줘야 하는데 둘이 있을 때 편두통이 온 건 처음이었다. 아이의 작고 뽀얀 얼굴이 일그러져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아이가 좋아하는 애니메이션을 하나 틀어주고 방에 들어가서 누웠다. 아이 옆에 누워 있고 싶었지만 애니메이션의 밝은 화면과 소리를 견디기가 쉽지 않았다. 누워 있다가 아이가 부르면 거실로 나갔다가 들어오기를 몇 차례 반복했다. 그제야 약 기운이 조금씩 돌기 시작했고, 전조 증상이 사라지고 두통이 시작되었다. 


다행히 책을 읽어줄 수 있었고, 우리는 잠들었다. 이른 아침에 역으로 가야했기 때문에 일찍 잠들기로 계획했지만 이미 11시가 지나있었다. 아침에도 두통이 계속 되면 안된다는 생각에 밤새 뒤척였다. 옆에서 쌔근 쌔근 잠든 아이를 보고 있으니 둘이서 무사히 대전까지 도착할 수 있을지 걱정이 되었다. 


아이는 눈을 뜨면서 아빠에게 가겠다고 했다. 두통은 계속 되었지만 우리는 택시를 타고 무사히 역에 도착했고, 시간에 맞추어 기차를 탈 수 있었다. 역으로 가는 내내 아이는 내 손을 꼭 잡고 놓지 않았다. 둘째는 새로운 곳에 가면 탐색하는 시간이 길다. 기차역도 자주 가던 곳은 아니어서 그랬는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연신 주변을 두리번 거렸다. 내 손과 아이의 손 사이에 조금씩 땀이 났다. 아이가 손을 꼭 잡을 수록 내 불안도도 높아졌다.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역에서 편두통의 전조 증상이 또 나타날까봐 두려웠다. 


낯선 기차역에서 이 아이에게 나는 유일한 보호자였다. 일단 자리는 찾았으니 편두통이 오면 바로 약을 먹고 아이를 안고 있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아이는 창밖 풍경을 보면서 이것저것 물었다. 매일 보던 익숙한 풍경이 아니어서 그런지 아이의 눈에 호기심이 차올랐다. 


 

창 밖을 유심히 본다, 아이의 마음에는 무엇이 차오르고 있을까.



우리는 무사히 대전역에 도착했다. 한 시간 조금 넘는 시간이었지만, 그 시간동안 나는 긴장하고 또 긴장했다. 역 플랫폼에는 남편이 나와 있었고, 아이가 아빠를 부르며 달려가 안겼다. 그제야 안도의 숨을 길게 내쉴 수 있었다. 


편두통의 횟수가 잦아지면서 삶의 어떤 순간에는 크게 위기감이 들기도 한다. 

아이를 돌볼 수 없게 될 때. 

그리고 편찮으신 부모님을 돌볼 수 없을 때. 


부산에 도착하자 엄마는 손에 붕대를 감고 있었다. 

믹서기에 과일을 갈다가 손가락을 다쳤다고 했다. 

설날 다음 날은 둘째 아이의 생일이었다. 부산에서 미역국을 끓이고 밥을 하는데 또 전조증상이 왔다. 

조용히 약을 먹고 앞이 잘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상을 차리고 케익에 불을 붙이고, 생일 축하 노래를 함께 불렀다. 

가족과 함께 하는 이 짧은 시간을 내 편두통 때문에 망칠 수가 없었다.  

케익에 불을 끄고 식사를 하고 식사를 마친 후 설거지를 하는 사이 전조 증상은 사라졌고, 다행히 이번에는 약이 잘 들었다. 


편두통이 무서운 이유 중 하나는, 무력감이다. 

갑자기 들이닥치는 두통 때문에 중요한 순간에 아무 것도 할 수 없게 되어버릴 때. 

아이를 보호해주어야 하는 어떤 순간에 너무나 무력한 존재가 되어버릴 때.


 



이번 연휴에는 사진 속 어머님과 아빠, 엄마 얼굴 위에 세월의 흔적이 많이 느껴졌다. 

국토 대장정 귀성길 덕분에 너무 힘들었지만, 

그래서인지 우리가 얼굴을 마주할 수 있는 순간들이 얼마나 소중한지 자꾸 생각하게 된다. 


더 많이, 더 자주 보고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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