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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위 Aug 02. 2023

여름의 기억1

여름의 시작- 같이 걸어왔고, 따로 또 함께 걸어야 할 길

여름이 시작되기 전, 햇살이 몹시 뜨거워지려고 이제 막 예열을 시작했을 때 나무와 함께 한 하루의 기억이다. 




균형을 잡기 위해서는 공을 굴리지 않는 팔을 수평으로 올려야 한다. 나무야, 옆에 아저씨

처럼 팔을 들어봐. 속절없이 레인을 벗어나 고랑으로 빠지는 공을 어쩌지 못한 우리 모자가

찾은 방법은 연속 스트라이크를 만들어 내는 옆 레인 청년들을 따라해 보는 것이다. 나무는

공을 들지 않은 왼팔을 뻗었으나 팔은 수평을 넘어서 거의 수직에 가깝게, 어딘지 알 수 없는

곳을 향하고 있었고 팔을 뻗고 야심차게 던진 공은 볼링공의 본분을 잊은 채 통통 튀더니 옆

레인으로 거칠게 튕겨 나갔다. 뒤를 돌아보지 않았지만 옆 레인의 볼링 청년들은 웃고 있겠

지. 나무는 머쓱한 표정으로 나를 향해 걸어왔고, 괜찮다고 말했지만 나 역시 머쓱함을 숨길

수가 없었다.

탁 트인 볼링장! 우리의 공은 늘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향했다!



오늘의 볼링 내기 종목은 볼링을 치고 나서 팥빙수를 먹을 것인가, 망고빙수를 먹을 것인가

이다. 팥을 절대 먹지 않는 나무와 망고를 좋아하지 않는 나는 언제나 빙수를 먹을 때마다 어

려움에 봉착한다. 남편과 둘째까지 함께 먹을 때는 망설이지 않고 팥빙수 하나와 망고빙수 하

나를 시킨다. 그런데 둘이 먹게 될 때는 언제나 문제다. 1인 1빙수는 좀 과하지 않은가.

우리는 총 세 경기를 쳤다. 우리의 총점은 남들이 한 경기에 얻는 점수보다 조금 모자랐다. 

절반 이상의 공이 고랑으로 빠졌지만 무엇 때문인지 손목은 너무 아팠고 어쩐 일인지 다리도

땡기는 것 같다. 어정쩡한 자세로 공을 레인으로 던져버리는 나무의 뒷모습을 보면서, 내가

남자 정진영을 낳았구나 생각한다.


개교기념일 기념으로 오랜만에 나무랑 단 둘이 데이트를 했다.

2년 전 코로나가 극심하고, 우리의 관계도 어쩐지 악화일로를 치닫았을 때 

남편의 배려로 나무와 경복궁 근처를 둘러보고 같이 저녁도 먹고 1박하고 돌아온 적이 있다. 

그것도 이맘때였던 것 같은데 하필이면 그 날엔 비가 왔다. 

비도 오고, 경복궁 다과방은 이미 문을 닫았고, 들어간 곳마다 에어컨은 너무 쎄고. 


나무는 연신 투덜거렸다. 나무가 잘 하는 말. 괜히 왔어. 


나무의 투덜거림을 잠재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맛있는 음식이라는 사실이 

그 날의 짧은 여행에서 내가 얻은 큰 교훈이다.

그래서 이번 데이트는 급식을 먹고 온 나무와 다시 밥을 먹는 것으로 시작하기로 했다. 스콘의 돼지국밥은, 아주 탁월한 선택이었다. 나무가 좋아하는 사골국물과 고기와 김치가 다 모여 있는 곳. 

배부르고 기분좋게 식사를 마친 후라 우리의 출발은 아주 순탄했다. 비록 볼링

세 경기에 지쳐버린 우리 모자는 빙수를 다음으로 미루기로 했지만 (볼링은 내가 이겼다) 

집에 와서 배를 두들기며, 오늘 참 좋았어. 그치? 라는 훈훈한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나무는 나의 첫 아이이고, 그러다보니 (둘째라고 육아에 더 능숙해진 것은 결코 아니지만)

모든 것에서 서툴렀다. 육아는 자주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렀기 때문에 나무와의 갈등도 종종 발생했던 것 같다. 그런 나무가 6학년이 되고, 나보다 손도, 발도, 덩치도 더 커지면서 이상하게 나는 나무가 아기처럼 사랑스럽다. 12년을 함께하면서 둘이 시행착오도 많이 겪었고, 힘든 순간도 많았지만 나는 이제야 조금씩 나무를 있는 그대로 보려고 하는 것 같다.


우리 부부는 결혼하고 아이 없이 살 계획이었다. 

학생 때 결혼한 나는 졸업 후 시나리오를 쓰면서 연출부 자리를 알아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감기기운이 있어서 약국에 약을 사러 갔는데, 무엇 때문인지 약을 먹으면 안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신기하게도 임신테스트기를 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날 나무가 우리에게 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무가 오고 내 삶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게 되었는데, 

나는 나무가 준 이 삶이 어쩐지 선물이라는 생각이 든다. 하얀 얼굴에 울긋불긋 솟기 시작한 여드름과 거뭇거뭇해진 코 아래를 보고 있노라면 이 아이와 함께한 시간들이 참 좋구나 싶다.


이 아이와 함께할 앞으로의 시간동안, 우리는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치열하게 싸울 것이고, 또 때로는 서로를 엄청 애틋해할 것이다. 지나간 모든 순간들과 앞으로 올 모든 순간들에, 더 마음을 다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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