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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루 Jan 19. 2018

앞집 할망


동쪽 끝 마을 동쪽 끝 집으로 혼자 들떠 유배 오던 겨울날
빌린 집 앞집 댓돌에 볕 쬐러 나와 앉은 노파 하나가
눈초리로 뒷덜미를 자꾸 잡아채길래 마지못해 인사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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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선히 닿은 눈인사는 호구조사를 허락하는 전보(電報)
이국의 언어로 빚은 물음에 몸짓으로 답을 빚느라
내 몸에선 훈기가 피고 쪼글한 그 입매엔 아지랑이 피는 사이
단출한 이삿짐 구석구석 구순(九旬)의 역사가 흘러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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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몸이 마른 호박 줄기 같은 앞집 할망
아침이면 끓인 간장에 손마디를 지지고 와
빌린 집 문 너머 잠든 내 코 천장을 쿵쿵쿵 구릿하게 두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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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날은 바삐 말동무로 나섰는데 냄새에 한 며칠 귓구멍이 자욱했고
솜이불로 고치를 틀고 나서지 않은 여러 날은
할망이 빌린 집 문간이라도 쓰다듬을까 한참 조마조마하며 보냈다
뉘엿할 때 나가보면 노각 몇 개 고추 몇 개가 얼어 있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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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일(名日)에 붙여 스무날 남짓 떠돌다 온 이 육지 것을
할망은 보자마자 얼싸안고 턱 끝에 입 맞췄다
이 떠난 지 오래되어 옹그라진 계곡
그 틈에서 피어나는 스무날 남짓 된 달큼한 묵언의 냄새
방긋방긋 웃으며 큰 소리로 혼을 내는 데 혼내는 게 혼내는 게 아닌 줄 그때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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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런데 글쎄 할망은 왜 그새 쪼그라들었을까
몸에 붙은 할망을 떼려고 보니 육십갑자의 분홍 정수리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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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 먹언
영원한 물음과 함께 퍼 올린 갈치 호박국 한 대접
어둑한 국물에서 피어나는 문간 너머 간장 향내
써느런 방에 들어앉아 문을 걸고 찬밥 말아 얼른 퍼먹고 잤다
웃바람도 모르고 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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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날 앞집 문간에 대고 삼춘- 하고 불러보니 밭에 갔나 기척이 없었다
육지에서 가져온 크림빵 두 개 빈 대접에 담아 댓돌에 올려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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