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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율리아나 Mar 30. 2022

너로 인해 내가 완벽해진다.

영화 ‘더하우스’의 마지막 에피소드

영화 더하우스의 마지막 에피소드

* 이 글은 애니메이션 영화 더 하우스의 세 번째 에피소드에 대한 스포일러를 담고 있습니다.


영화 ‘더하우스 블랙 코미디 장르의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이다. 하나의 집에서 벌어지는 개의 에피소드로 이루어져 있다. 그중 마지막 이야기가 마음에 와닿았다.


‘로사’는 홍수로 인해서 생긴 망망대해 가운데 우뚝 서있는, 낡은 건물의 주인이다.

직접 잡은 생선을 월세로 내는 ‘일라이어스’나 원석을 내는 ‘젠’이 아닌, ‘진짜 돈을 내는 정상적인 세입자’를 들여서 집을 멋지게 고친 뒤에 아름다운 추억으로 가득 채우고 싶은 꿈이 있다.

그러던 어느 날, 자신의 손 기술을 거주비용으로 내겠다는 ‘코스모스’가 등장한다. 흙탕물이 나오는 배관과 들뜬 마룻바닥을 해결할 도리가 없던 중에 로사는 코스모스가 그 모두를 해결해 줄 것이라는 기대에 들떠 그를 받아준다.

그러나 다음날, 망치소리에 잠이 깬 로사는 망치로 머리를 맞은듯한 충격에 휩싸인다. 코스모스가 집의 마룻바닥을 뜯어내어 일라이어스를 위한 배를 만들어주었기 때문이다.

화를 내는 로사에게 일라이어스는, 내일이면 집이 물에 잠길 거라며 떠나야 한다고 말하지만 로사는 듣지 않는다. 일라이어스가 떠나지 않고 머물 것이라고 믿었던 로사는 배를 만들어준 코스모스와 젠을 원망한다. 코스모스가 로사를 위해 준비했다는 ‘해방을 위한 레버’를 거들떠도 보지 않는다.

그리고 젠은 로사에게 “과거도 중요하지만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변화를 두려워하지 말라"라는 말을 남기고 코스모스와 떠난다.

로사는 그나마도 곁에 있었던 세입자들과 행복한 추억을 남기지 못했음을 후회하는 동시에 혼자 남았다는 사실로 공포감에 휩싸인다. 뒤늦게 마음이 바뀌어서 그들을 따라가려 했던 로사는 절망에 빠지고 레버에 우연히 부딪히면서, 코스모스가 로사를 위해 집을 선박으로 만들었음을 알게 된다. 이윽고 로사 또한 미지의 세계로 항해를 시작하고 일라이어스와 코스모스, 젠이 등장해 축하하며 함께 떠난다.


영화를 보면서 ‘물이 집에 잠기게 되면 저 집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기에 말도 안 듣고 저렇게 혼자 남아 답답하게 지키고 있으려고 할까.’ 이 생각이 들었을 때 아차, 싶었다. 내 이야기가 아닌가.


이 영화는 면직물로 만든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이다. 세 가지 에피소드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중에 로사의 이야기는 스스로 고립되려 했던 과거의 내 모습과 매우 닮아있었다.


태안 바닷가


미지의 세계를 항해하려면 그곳에서 마주할 신비롭고 진귀한 경험뿐만 아니라 대처할 엄두도 나지 않을 사건까지도 각오해야 한다. 그것들을 헤쳐나갈 용기가 없었다. 내게 처음 찾아온 무기력함은 사회에 나가는 것이 망망대해로 나아가는 것과 똑같이, 두렵게 만들었다.

무력함은 영화 속 홍수처럼 점점 나를 침수시켰다. 가라앉는 동안에도 알고 있었지만 변화할 필요를 알지 못했고, 용기도 없어서 스스로 고립되려고 했다. 방법을 몰랐던 것이 아니라 노력하고 싶지 않았다. 혹시나 노력하고도 이겨낼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그로 인해 찾아올 절망감이 고립되는 것보다 두려웠다. 더 이상 그 어느 것도 해내고 싶지 않았다. 새로운 세상으로 나아 가느니 그대로 잠겨버리고 싶었다.


가까운 주변 사람들마저 나를 떠나길 바랐다. 고통은 나누면 배가되고 행복은 나누면 반이 된다며 나의 어두움이 주변 사람들에게 옮기를 원하지 않았다. 내 생에서 그때만큼 부정적이었던 시절은 앞으로도 없길 바랄 지경이다.

로사는 사실, 떠나고 싶지 않았던 것이 아니라 자신이 모르는 세계가 두려웠던 것 같다. 겁쟁이인 자신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내가 그 우울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던 방법은 ‘내가 틀렸음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내가 부족하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은 생각보다 매우 큰 자존감이 필요했다.


인사동 거리


나는 어릴 때부터 ‘내가 할래’ 무새였다.
이제 막 두 다리에 자유를 얻었으면서 혼자 양말을 신겠다고 떼를 쓰고 잘되지 않으면 될 때까지 오기를 부렸다.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던가, 나는 지금도 도움을 청하는 것을 어려워한다. 그것이 얼마나 자존감을 필요로 하는 일인지 몰랐다. 도움을 청하는 것은 곧 나의 부족함을 인정하는 것이므로 부끄럽다고 생각했고 받은 도움을 두 배로 돌려줄 자신도 없었다. 이 생각은 혼자서 어떤 것도 온전히 할 수 없는 존재임을 인정하지 않음으로 온 자존감이 부재한 자만이었다.


지금은 혼자서 어떤 것도 온전히 할 수 없는 존재임을 비로소 인정하게 되었다. 내가 도움이 필요한 사람임을 인정하면 삶이 조금은 편해진다. 우리가 성격이 다 다르고 가진 능력도 다 다른 이유, 우리가 사회적 동물인 이유가 무엇인가. ‘서로 돕고 사는 것’ 이 인간이 이토록 진화할 수 있었던 이유였다. 완벽하다면 그것은 신이지, 사람은 원래 불완전한 존재이다.

몇 해 못 살아봐서 건방진 말 일 수도 있지만, 인생은 ‘나에게 완전함이 도대체 무엇인가’를 찾아가는 과정이 아닐까. 인생에서의 결론은 죽음이 아닌 죽기 전까지 무엇을 남기느냐에 있는 것 아닐까. 죽기 전, “내 인생은 나에게 완벽했어.”라는 생각을 하며 잘 죽기 위한 준비하는 과정이 아닐까. 

나는 부족하고 앞으로도 계속 부족할 것이다. 부족해도 된다. 나에게는 그 부족함을 채워줄 가족과 연인, 친구들과 동료들이 있다. 그들로 인해 나는 비로소 완벽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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