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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를 시민으로 대하라

우리집 주방이 시민교육의 장이 되는 방법

몇 년 전 미국의 유대인 가정교육에 관한 영상*을 보았다. 가족이 주방에 모여 아마존 화재와 관련해 진지한 토론을 하고 있다. 엄마는 양손에 긴 스푼을 들고 능숙하게 샐러드를 믹싱하며 눈으로는 열두 살 아들을 바라보며 대화를 이어간다. 드레싱이 골고루 입혀졌을 즈음 아이는 아마존 문제의 심각성을 대통령에게 알려야 한다고 한다. 그러자 엄마는 돌연 자신을 대통령이라 생각하고 이야기해 보란다. 아이는 멋쩍어 했지만 이내 자신이 백악관 자문위원이라도 된 듯 문제의 심각성을 알리며 엄마 대통령을 설득해 나간다.

https://youtu.be/3d5aYzLoISw?t=80


아니, 식사를 준비하면서도 아이에게 등 한번 돌리지 않고 주방을 교육의 현장으로 만들어버리는 이 엄마는 도대체 나와 뭐가 다른 거지? 유대인의 토론 문화에 관심이 높기에 영상을 수차례 반복해 보면서, 나도 몇 년 후엔 양극화 문제나 환경오염과 같은 지구적 이슈에 대해 딸과 진지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까 생각해봤지만 잘 안 그려졌다. 내가 식탁에서 아이들에게 했던 말이라면, 채소 반찬 무한 찬양, 천천히 먹기의 중요성, 먹은 자리 정리의 타당성으로 대화라기보다는 잔소리(sound)에 불과했다. 나는 심지어 대학에서 교육학을 가르친다.


나는 이 엄마의 표정과 말에 초점을 두고 영상을 여러 번 반복해 보고 나서야 나와의 차이를 눈치 챌 수 있었다. 우리는 자녀를 부모-자녀의 수직적 관계에서 인식한다. 집안에서는 부모가 아이 위에 있다. 아이가 부모의 지시를 따라주길 바라며 집에서 해결하는 의식주 생활에 자잘한 소리를 늘어놓게 된다. 그런데 집밖의 일에 대해서는 아이가 부모 위에 있다. 부모가 아이의 말에 전적으로 따른다. 아이가 담임을 좋아하면 그분은 좋은 선생님이 된다. 아이가 친구에 대해 불평을 하면 그 친구는 빌런이 된다. 한 연구**에서 자녀에 대한 한국 부모의 주도성을 조사하였는데, 70.1%가 '부모는 자녀가 원하는 것을 할 수 있도록 뒤에서 도와주는 사람이다.'에 응답했다. 나머지 29.9%만 ‘자녀가 성공할 수 있도록 앞에서 이끌어주는 사람이다.’에 응답했다. 이것이 우리가 자녀와 식탁에서 지구환경 문제를 이야기할 수 없는 이유다.

반면에 유대인 엄마는 주방에서도 아이를 자신과 수평적 관계로 인식하고 있었다. 엄마는 아들을 자신과 동일한 사회구성원으로 보고 아이보다 딱 한 발짝 앞서서 대화를 주도하였다. 그래서 아이를 대통령 자문위원, 정책입안자, 민감한 이슈에 판결을 내리는 판사가 되어 보게 한다. 한 국가의 시민으로서 할 수 있는 역할을 해보게 이끌어 주는 것이다.


첫째가 얼추 저 집 아들과 비슷한 또래가 되어가고 있다. 김치찌개를 팔팔 끓이면서 진지한 대화를 나누긴 쉽지 않다. 뚝배기 불 조절도 엄마의 중요한 역할이기 때문이다. 교수지만 교양과 지식이 부족한데다가 가족 토론 문화 없이 자란 엄마로서 자연스럽게 시사적인 대화를  전개하는 것은 영 어색하다. 그래서 매일 저녁 8시에 가족이 거실에 모여서 아이 수준에 맞는 다양한 주제의 짧은 글을 읽기로 했다. 읽는 것엔 자신 있다. 다문화 감수성이나 원격의료시스템 찬반과 같은 글이다. 그리고 하고 싶은 이야기나 질문을 맘껏 해보자고 하였다. 처음엔 아이들이 생각나는 대로 아무 이야기나 했다. 계속 들어주되 너무 딴 길로 새면 말한 것과 읽은 글을 연결지어 생각해보도록 질문을 던졌다. 그랬더니 씻고, 먹고, 정리하는 생존형 대화에서 조금 벗어나고 있는 듯하다.


유대인 엄마도 어린 시절 주방에서 어머니와 함께 베를린 장벽 붕괴나 냉전 시대의 종말에 대해 이야기했음에 틀림없을 것이다. 그렇기에 신냉전 시대가 열린 현 시점에서 벌써 유대인 엄마와 나의 출발선이 다르다. 그러나 기죽을 필요는 없다. 분발하면서 매일 20-30분씩 읽고 질문하고 말하는 일상을 쌓아가다 보면, 언젠가 나도 후라이팬으로 부침개를 공중 부양시켜 뒤집는 기술을 보여주면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야기할 수 있지 않을까? 


아이들은 자녀이자 시민이다. 신문의 굵직한 헤드라인을 집으로 들여오자. 가끔 지구 반대편에서 일어나는 뉴스도 등장시켜 글로벌 시민도 되어보자. 아이는 조만간 엄마가 차려 준 반찬도 골고루 먹고, 방 정리도 곧잘 하는 사회적 책임을 다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이 사회에서 시민으로 누릴 권리와 발휘할 역량을 찾기 위해 자발적으로 책을 펼치게 될 것이다.


*YouTube  tvN STORY 채널 유대인 부모가 12살 자녀에게 던진 놀라운 질문

https://youtu.be/3d5aYzLoISw

**한국인의 부모됨 인식과 자녀양육관 연구 (문무경, 조숙인, 김정민, 2016). 육아정책연구소 연구보고 2016-21



본 글은 월간에세이 6월호 (통권 434, pp. 54-57)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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