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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경화 Dec 29. 2017

헤밍웨이의 바다, 꼬히마르

쿠바, 아바나: 국립 미술관, 꼬히마르 - 2015/08/11(화)

마리아 할머니네서 아침식사를 하고 내일 비냘레스로 이동하기 위해 장거리 버스표를 끊으러 비아술 터미널로 향했다. 아바나는 인터넷 상황이 좋지 않아서 인터넷으로 버스표를 알아보고 예매하는 것은 아예 불가능했기 때문에 버스표를 사려면 직접 터미널로 가야 했다. 아바나에서 비냘레스까지의 버스표 값은 1인당 12 CUC(약 12 달러)으로 쿠바의 일반적인 물가나 시내 교통요금에 비하면 비싼 편이었지만 5세 미만 어린이의 교통비와 입장료는 무료였으므로 4.5세인 제나는 여권만 보여주면 어디서든 무사통과인 점이 좋았다.  

비아술 터미널에서 센뜨로로 가기 위해 시내버스를 잡아탔다. 현지인들이 주로 이용하는 시내 버스비는 1인당 0.4 MN(약 20원)으로 그야말로 공짜나 다름없을 만큼 쌌다. 물론 찜통더위에 승객으로 꽉 들어찬 버스에서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손잡이에 매달려 버텨야 하는 것은 고역이었지만, 현지인들 속에서 말도 잘 통하지 않는 낯선 외국인이 되어 길을 묻고 내릴 곳을 물으며 그들과 대화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으니 가난한 여행자인 우리에게는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다. 좁은 공간에서 더위와 사람들에게 지쳐 보채기 시작한 제나를 유심히 보던 할머니 한분이 우격다짐으로 자리를 하나 만들어 주셔서 중간쯤에는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우리가 센뜨로의 중앙공원에서 내린다고 말씀드렸더니 옆에 서있던 할아버지 한 분이 자신을 따라 내리면 된다고 하면서 창밖으로 지나가는 건축물들의 이름을 알려주셨다. 시내버스가 아니면 이런 시민 가이드의 안내를 또 어디서 받아볼 수 있겠는가. 도와주셨던 모든 분들께 감사 인사를 드리고 버스에서 내려 어제 휴관으로 가보지 못했던 국립미술관으로 향했다. 


비나술 장거리 버스 터니널 근처의 시내버스 정류장 풍경
군용 트럭을 개조해 여객용으로 사용하고 있다.
센뜨로 거리


국립미술관은 센뜨로 아바나의 낡은 고건축물들 중에서 거의 유일하게 현대적으로 지어진 건물이다. 국립미술관의 1층에는 로비와 까페테리아가 위치해 있었고 2층은 설치 및 조형 미술품 위주로 전시되어 있었으며 3층은 회화작품 위주로 전시되어 있었다. 미술관에서 형주와 내가 가장 마음에 들어했던 작품은 바람 부는 들판에서 위태롭지만 고고한 모습으로 바람을 맞으며 버티고 서 있는 세 여인을 그린 작품이었다. 나부끼는 머리카락과 옷자락이 내면을 흔드는 혼돈과 그 혼돈을 극복하려는 의지를 섬세하게 시각화하며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국립미술관을 한 번 돌아보고 나서 쿠바의 미술에 대해 말하는 것은 눈먼 생쥐가 코끼리 다리를 더듬는 격이겠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느낀 바를 두어 마디로 표현한다면 '원색의 강렬함'과 '인간 내면에 대한 고찰의 흔적'이었다. 폐쇄적인 사회주의 국가라고 해서 미술의 소재나 표현 방식이 편협하거나 억압되지 않았고 그들도 인류가 보편적으로 가진 호기심과 아름다움을 추구하고 있었다. 무의식적으로 사회주의 국가가 가진 어떤 특이점이나 한계점을 찾으려고 애썼던 것으로 보아 나도 어쩔 수 없이 미국에 의해 해석된 쿠바라는 나라의 프레임에 갇혀 있었던 모양이다.


미술관 관람을 마치고 바르까디 빌딩 쪽으로 돌아 나오다가 사람들이 줄 서 있는 피자가게를 발견했다. 손바닥보다 약간 큰 피자 한 판에 10 MN(500원), 스파게티 한 접시에 15 MN(750원), 망고주스 한 컵에 3 MN(150원)인 이 식당은 값도 싸고 음식 맛도 좋았는데 다행히 점심시간이 지난 시간이어서 길게 줄 서지 않고 바로 주문해서 먹을 수 있었다. 내내 부실한 식사량에 시달렸던 우리는 네 번이나 주문을 반복하며 허기를 채웠다. 길거리 식당이었기 때문에 그 식당에는 앉아서 먹을 의자나 테이블이 없었다. 식당 근처 거리에 놓인 대형 화분에 걸터앉아 위태롭게 식사를 하고 있는 어린 제나가 안쓰러웠던지 식당 옆의 이발소 아저씨가 작은 의자 하나를 가져와 제나를 번쩍 들어 위자에 앉혀주셨다. 피자 다섯 판에 스파게티 세 접시, 망고주스 다섯 컵을 먹어치우고는 이발소 아저씨께 감사인사를 남기고 길을 나섰다.


미술관 근처 현지인 식당. 좁은 창문으로 주문하고 그 창문으로 음식을 받아 들고는 서서 먹는다.
식당 옆 이발소에서 아저씨가 가져다 주신 의자
아바나 거리 풍경


우리의 다음 목적지는 헤밍웨이의 소설 ‘노인과 바다’의 배경이 되었던 작은 어촌 마을 꼬히마르다. 

버스로 이동하려고 버스 타는 곳을 찾아 한 시간을 헤맨 끝에 변변한 표시도 없는 버스정류장을 찾았으나, 사람으로 꽉 들어찬 버스는 승차를 거부하며 번번이 지나가 버렸다. 그렇게 버스 세 대를 보내고 더는 안 되겠다 싶어서 이동 수단을 택시로 바꿨다. 한참만에 잡아탄 택시는 문짝이 닫히는 게 신기할 정도로 낡아 있었고 뒷좌석은 한쪽으로 움푹 꺼져서 타고 가는 내내 몸이 자꾸만 기울어져 손잡이에 매달려 가야 했다. 그렇게 40분을 달려 꼬히마르에 도착했다. 

헤밍웨이의 흉상이 서 있는 작은 공원 바로 앞에 나무판자로 만들어진 작은 선착장이 있었다. 실제로 헤밍웨이 작품 속 노인의 청새치 잡이 배가 출발하고 돌아오곤 했을 이 작은 선착장 위를 걸어가 그 끝에 서서 바다를 바라보았다. 가슴이 벅차올라 마땅히 무슨 말로 이 감정을 표현해야 할지 몰라서 그저 바다만 바라보고 서 있었다. 내 옆의 형주도 ‘아,’하는 낮은 탄식만을 뱉어내고는 조용히 바다를 바라볼 뿐이었다. 나무판자로 만들어진 선착장은 이가 듬성듬성 빠져서 밟을 때마다 삐걱 대서 어린 제나는 내 손을 꼭 붙잡고 걸어야 했다. 비구름이 급히 몰려와 하늘을 덮으니 구름에 덮인 바다는 더 짙어졌고 열린 구름 사이로 해가 비치는 바다는 에메랄드 색으로 빛났다. 멀리 바다 건너편의 바닷가 등대 쪽에는 더위를 피해 우산을 쓰고 앉은 사람들이 한가하게 바다를 즐기고 있었다. 

우리가 도착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동네 아낙 둘과 소녀 하나가 간단한 낚시 도구를 들고 선착장으로 왔다. 아낙들은 허술하게 감아둔 낚싯줄 끝에 매달린 낚싯바늘에 작은 새우 살을 매달아 바다로 힘껏 던졌다. 함께 온 소녀는 제 팔 길이 정도 되는 가느다란 나뭇가지에 낚싯줄을 매달아 바다에 담갔다. 저런 식으로 물고기를 잡을 수 있을까 싶은 마음이 들었지만 우리의 걱정은 쓸데없는 기우였다. 10여 분만에 한 아낙이 손바닥 만한 물고기를 잡아 올렸고 곧이어 소녀도 제 손바닥 반 만한 물고기를 낚았다. 호기심이 동한 형주와 제나가 소녀 곁으로 다가앉아 한 번만 해보겠다고 청하자 소녀는 수줍어하며 낚싯바늘에 미끼를 꿰어 아이들에게 건네주었다. 물고기들도 낚시 초보인 아이들의 솜씨를 알아보았는지 30분이 지나도록 아이들은 물고기를 한 마리도 낚지 못했다. 그렇게 한 시간이 지나는 동안 동네 아낙들은 크고 작은 물고기 여덟 마리를 낚았고, 제나는 옆에서 그들이 잡은 물고기를 만지고 놀았다.


작은 어촌 마을 꼬히마르 앞 선착장
소박한 도구로 낚시하는 아낙들과 소녀
소녀에게서 낚싯대를 빌려 낚시하는 형주
동네 언니 옆에서 낚시하는 제나
동네 아낙들과 함께 온 바둑이
외지인에게 무심한 듯 낚이에 몰두하는 아낙들과 아이들이 함께 있는 선착장과 그 너머로 마을이 보이는 풍경이 참 예쁘다.
마을의 소녀가 잡아 올린 작고 예쁜 물고기
헤밍웨이의 바다를 바라보는 제나


한참 후에 바닷가에 도착한  형주 또래의 사내아이들은 선착장에 들어서자마자 웃통을 훌훌 벗어던지고 바다로 풍덩 뛰어들어 수영을 즐겼다. 그들과 함께 온 일행은 동네 아낙들처럼 낚싯대 없이 줄로 낚시를 하더니 금세 대여섯 마리를 낚아 올렸다.   

자유롭고 한적한 바다. 

이곳에서 헤밍웨이는 살아서 펄쩍펄쩍 꿈틀대는 대자연과 그에 맞서 포기하지 않고 싸우는 한 노쇠한 인간의 고독한 사투를 그린 강렬한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그 거장의 숨결이 깃든 바다에서 한가로이 낚시하던 동네 아낙들은 저녁거리가 다 준비되었다며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그들의 소박한 일상을 사랑했을 거장의 마음이 고스란히 담긴 바다를 뒤로하고 우리도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선착장 앞 헤밍웨이의 흉상
선착장 옆 오래된 성
훼밍웨이의 바다
노인 산띠아고의 바가 드나들었을 선착장을 떠나며
선착장에서 버스 정류장으로 가는 길, 벽에 그려진 청새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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